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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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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벨파스트> - 일상이라는 기적2022-04-20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3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벨파스트> : 일상이라는 기적


<벨파스트> (케네스 브래나, 2021)는 감독의 실제 어린 시절을 반영한 영화다. 출향 소년의 마음속에 영원한 홈베이스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렸다. 이때 홈베이스는 1차 사회화가 일어나는 장에 상응한다. (1차 사회화는 어린이가 주변의 경험과 상호 작용을 통해 삶의 기술, 유대감, 가치관을 처음으로 배우고 발전하는 기간이다.)


성인에게 홈 베이스는 감정적 회복기능을 하는 거점이고, 마음의 안식처다. 이에 비해 9세 소년 버디에게 홈베이스는 앞으로의 인생 여정에 디폴트’ (기본 값)로 주어진다.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의 용어로 말하면 사회·문화적 표준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할머니 목소리로 들려주는 영화 트레일러 오프닝이 흥미롭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이야기가 있어.

그걸 다르게 만드는 건

이야기의 결말이 아닌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지.”

 

이렇듯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홈베이스다. 이를 형성하는 요인으로는 특정한 장소도 있고 사회적 장치도 있다. 영화는 그 사회적 장치, 즉 사회·문화적 표준을 내면화하는 요인을 다양하게 묘사한다. 버디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 유대감, 공통 감각, 또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은 언설, 그리고 미디어 (TV, 영화, 연극).

이처럼 버디의 홈베이스는 장소성을 넘어선다. 특정한 곳에서 형성됐지만, 특정 장소로부터 분리 가능한 착탈식사회적 장치를 포함한다는 면에서 장소성을 초과한다. 버디 가족은 그들의 고유한 사회적 장치를 갖추고 벨파스트를 떠나는 것이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 이미지


제 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벨파스트>로 각본상을 수상한 케네스 브래너 감독(출처: 연합뉴스)

 

종교 갈등

 

먼저 장소성부터 살펴보자. 19698, 북아일랜드 수도인 벨파스트. 앞으로 30년 넘게 지속될 트러블’ (The Troubles, 1968~1998)이 촉발되는 시점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을 가리키는 트러블은 영화의 묘사처럼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이 점에서는 영화 캐스팅 자체가 화합적이다. 버디 가족은 개신교다. 하지만 엄마 역을 맡은 배우 커트리너 밸프’ Caitriona Balfe와 할아버지 역을 맡은 키어런 하인즈’ Ciarán Hinds는 가톨릭이다. 한편 버디는 가톨릭 집안의 소녀 캐서린을 좋아하는데, 캐서린 역을 맡은 올리브 테넌트스코틀랜드 장로교교회의 목사 가문이다.)

 

표면적으로 트러블은 종교 갈등의 성격을 띠지만, 속으로는 사회·정치 관계가 얽혔다. 아일랜드 개신교 신자는 대부분 12세기부터 이곳을 계속 침공한 영국인의 후예다. 이들은 700년 간 정치, 경제를 지배했다. 반면 아일랜드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은 대부분 원주민, 피지배민들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대다수 영국 왕실을 지지하고, 영국에 속하기를 바란다(‘충성파’, ‘연합파로 부른다). 반면 가톨릭은 대부분 아일랜드 민족주의와 공화정을 지지한다.

 

그런 한편 영화의 무대인 북아일랜드에는 신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개신교에는 한국 장로교의 근원이기도 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 있다. 영화는 벨파스트 출신 가수 밴 모리슨<캐릭퍼거스>를 들려준다(아빠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마치고 아침에 떠나는 장면). 1690년 오렌지 공과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아일랜드에 처음 상륙한 곳이 바로 벨파스트의 캐릭퍼거스 부두다.

버디 가족도 이들의 후예로 보인다. 할머니가 애독하는 <피플즈 프렌드>는 스코틀랜드 던디에서 발간되는 여성 문예 잡지로 스코틀랜드의 지역성과 종교색이 깔려 있다. 또 버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사투리인 아이’ (Aye =Yes)를 자주 사용한다.

 

매크로 시점 (‘개신교 =지배층 / 가톨릭 =피지배층’)으로 보면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마이크로 시점으로 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버디 가족은 개신교이지만, 가난한 노동자 계층이다. 정치 입장도 흑/백이 아닌 회색이다.

 

버디 : 우리 편이 이렇게 만든 건가요?

아빠 : 우리 동네엔 누구 편 같은 거 없어. 전에도 없었고.

 

우리 편과 그들 편.’ 이런 이분법은 없()다는 말이다. 또 이것은 아빠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앨리슨 가든에 따르면 비록 정치 체제는 이분법적 사고로 작동하지만, 실제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회색의 색조로 산다.

(앨리슨 가든은 벨파스트 퀸즈 대학에 기반을 둔 작가, 연구자다. 벨파스트의 복잡한 역사와 오늘날 북아일랜드의 메아리, <타임>, 11/11/2021.)

앨리슨의 말은 일상과 정치의 괴리를 보여준다. 이처럼 개인들 각자는 이분법적으로 살지(살고 싶지) 않는데, 현실 정치는 이분법적으로 작동한다는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하나.

 

회색의 소멸

 

아빠의 말처럼 아일랜드 현실이 처음부터 극단적으로 이분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신교와 구교의 관계는 1840년대 대기근부터 악화됐다. 영국 정부가 대기근의 대처에 실패하자 민심이 요동친다. 영국에서 독립해 아일랜드 공화국을 세우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운동에는 신교도가 큰 역할을 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비롯해 신교도가 이끈 문예부흥 운동은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세우고, 독립을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정치적, 문화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신교도의 주도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예운동도 가톨릭이 주도하게 되고, ()영국, 반개신교 색채를 띠게 됐다. 이런 가운데 아일랜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 신교도의 권리를 축소하는) 자치 법안이 잇달아 통과되고, 독립이 가시화되자, 신교도들은 이제 소수집단으로 전락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이분법의 언어가 작용한다. 독립에 관해 신교도들의 의견이 양쪽으로 갈린다. 또 신교와 구교의 관계는 갈등 관계로 바뀐다. 특히 북아일랜드 신교도들 상당수는 남쪽 신교도와 달리 <분단>에 앞장섰다. 독립전쟁 (1919~1921) 시기에 이들은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을 수 있게 싸웠다.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아일랜드는 분리됐다. 그 뒤에 분쟁을 촉발한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 문제였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일자리를 둘러싼 배타주의로 전개된다. 갈등은 급기야 1968년 폭발했다. 데리에서 아일랜드인의 권리를 주장하던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한다. 이에 신교도들이 여러 도시에서 구교도를 공격한다. 바로 영화 도입부 장면이다. 두 세력의 갈등은 이분법으로 치닫고, 회색 영역이 사그라진다. 마침내 분쟁이 시작된다.

(분쟁 직전 벨파스트 경제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벨파스트의 조선업과 항만 시설을 파괴했다. 또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글로벌 경제 침체1975, 1982, 1991년이 분쟁 30년 기간에 포함된다. 조선업과 항만(수출) 산업이 중심이던 벨파스트에 글로벌 경제 침체는 치명적이었다. 분쟁이 촉발되고, 장기화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예이츠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이분법적 언어, 세계관을 불신하는 인물이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가 예이츠의 시를 인용한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예이츠는 이분법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그는 영국인의 후예로서 개신교를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했다. 또 예이츠는 20년에 걸쳐 모드 곤’ (Maud Gonne)을 짝사랑했다. 그녀는 가톨릭이었다.

이처럼 예이츠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인물이고, 바로 그 점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었다. 이때 할아버지는 예이츠의 시를 통해 예이츠 / 모드 곤버디 / 캐서린의 유비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연민이

사랑의 마음속에 숨겨졌구나

<사랑의 연민> (1893)

 

예이츠는 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했지만, 당시 가톨릭이 이끈 무장투쟁에는 반대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장렬히 산화하자, 비애에 젖어 이들을 애도한다. 할아버지는 이 시를 인용하며 자신의 아내, 곧 버디 할머니의 희생적인 삶에 경의를 표한다.

희생이 너무 오래면

마음을 돌로 만드는 것

“too long a sacrifice can make a stone of the heart”

<1916년 부활절>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갈등의 상흔 (또는 상존)

 

버디는 아빠에게 자신과 캐서린의 관계에 미래가 있을지를 묻는다. 웃기게 들리지만 이것은 현실을 반영한 질문이다. 당시 이곳에는 이교도와 결혼을 금지하는 로마 교황의 칙령 네 테메레’ (Ne temere)가 지켜졌다. 1908년에 공표되어 전 세계 가톨릭교도에게 적용된 이 칙령은 아일랜드에서 유래했다. 아일랜드 교회 관습이 보편적인 가톨릭 규범이 된 것이다.

 

버디 : 쟤랑 저한테 미래가 있을까요?

쟤가 천주교인 걸 아세요? (You know she’s a Catholic?)

버디는 쟤가 천주교인 걸 아세요?”라고 묻는다(영화 자막은 쟤가 천주교일까요?”라고 옮겼다). 그러자 아빠는 어떤 종교라도 상관없다고 말한 다음,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고해성사를 하러 가야되나?’ 라며 농담을 던진다. 이 농담도 현실적이다. ‘네 테메레칙령에 따라, 천주교인과 결혼하려면 천주교로 개종해야 한다.

네 테메레칙령은 신교와 구교 간의 세력 경쟁이 낳은 산물이다. 또 버디와 아빠의 대화는 그 갈등에서 빚어진 웃기면서 슬픈대화다. 그런 가운데 아빠는 이분법을 불신하고, 희화하고, 탈피하려 한다.

 

행동 대장 빌리 클랜튼이 이끄는 집단은 1966년에 조직된 준군사 조직인 얼스터 의용군’ (UVF)을 묘사한 것 같다. 현실 역사에서 의용군의 근거지는 감독이 살던 마운트콜리어 거리의 아랫동네인 샹킬 로드. 현재 샹킬 로드의 아래쪽과 위쪽에는 평화선’ (Peace Line)으로 부르는 벽이 둘러 세워져 있다. 영화에 나온 바리케이드가 경계 벽이 된 것이다.

오늘날 벨파스트 곳곳에는 평화선이 있고, 각각을 더하면 전체 길이가 17마일에 이른다고 한다. 분쟁이 종결된 1998년 당시보다 평화선이 더 길어졌고, 준군사 조직은 최근 4년 간 60%가 넘게 증가했다고 한다. 갈등이 여전히 계속된다는 의미다.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버디 =감독 집은 알렉산드리아공원에 인접했다. 오늘날 이 공원에는 공원 공간을 동서로 가르는 3미터 높이의 벽이 세워져 있다. 신교와 구교 신도들의 충돌을 막으려고 세운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버디가 공원 울타리 사이의 틈새로 들락거리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구부러진 철봉은 이분법을 넘어선 소통의 상징처럼 보인다. 두 세력이 아무리 맞서도(아니, 극단적으로 맞설수록) 숨통을 틔어야 한다는 것. 말하자면 중간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영화는 틈새를 꿈꾼다. 흑백으로 촬영됐지만, 회색 영역을 옹호한다. 감독=버디의 홈베이스는 이처럼 탈()이분법 세계관으로 형성되었다.

 

증강 현실

 

감독은 실제 어린 시절 벨파스트 풍경이 단색으로, 흑백으로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온라인 잡지 <데드라인> Deadline과 인터뷰. 01/22/2022). 단색의 인지는 정서적으로 다소 어두운 것이다. 풍경의 거대함 (크레인, 케이브힐), 화강암 회색, 비가 내리는 세상. 이것은 어느 정도는 암울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단색의 인지는 미디어의 영향이다. 버디=감독이 흑백 TV로 보던 서부영화와 연결되어 있다. 감독은 존 포드 영화의 모뉴먼트 밸리를 보는 시선으로 벨파스트의 케이브힐을 겹쳐 봤다고 한다. 또 웨스턴 영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공원을 걷고, 거리를 바라봤다고 한다. 게다가 빌리가 버디의 이웃을 주먹으로 쓰러뜨리는 만화 같은 장면은 이런 인지를 강화했을 거다. 요컨대 버디=감독은 웨스턴 영화의 시선에서 벨파스트 풍경을 겹쳐 보며 <증강 현실화>한 것이다 (결말부 가족은 케이브힐 정상에 올라 벨파스트에 작별 인사를 한다).

 

또 버디가 미디어를 통해 주위 환경을 증강 현실화하는 양상으로는 <대탈주>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도입부 아빠가 군인들의 검문을 통과하자 프랭키 웨스트는 아빠를 스티브 맥퀸으로 부른다. 그런 다음 프랭키는 휘파람으로 <대탈주> (The Great Escape, 1963) 주제가를 부른다. 벨파스트 현실을 포로수용소상황으로 본 것이다. 아빠는 또한 엄마에게 호주와 캐나다의 안내 책자를 보여주며 탈출로’ (escape route)라고 말한다.

이런 발상을 강화해준 것은 영화다. 버디는 TV 드라마 <스타 트렉>의 대사와 엔터프라이즈 우주선을 통해 벨파스트의 닫힌 사회 너머에 있는 열린 <세계>를 생각한다. 이 발상은 영화관에서 증폭되고, <치티치티 뱅뱅> (1968) 관람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큰 주제는 <대탈주>이고, 색상은 <컬러>.

여기에는 닫힌 사회 / 열린 세계’, ‘흑백 / 컬러의 대비가 있다. 벨파스트의 현실=사회는 흑백(단색)이고, 영화 속의 현실=세계는 컬러다. 버디의 시선에서는 영화 속 현실이야말로 벨파스트 너머에 있는, 진정한 세계라는 생각을 표현한다 (할머니와 함께 본 <크리스마스 캐롤> 연극도 컬러로 묘사된다. 대탈주 세계관은 없지만, 연극 무대가 사회 너머의 세계라는 점에서는 영화와 공통된다).

 

이때 영화, 연극은 가상현실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현실과 닿아있어 현실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증강현실로 작용한다. <토르> (139, 1967. 4.) 만화도 마찬가지다. 토르와 시프는 아빠와 엄마였을까, 아니면 버디 자신과 캐서린이었을까.

 

이 유년기는 그 뒤에 감독이 활용, 구현할 작업의 <데이터베이스>를 마련한다. ‘영화/연극’, ‘/’, ‘히어로/악당’, ‘사회/세계. 감독의 데이터베이스는 이때 만들어졌다. 나머지 생애는 그 데이터베이스의 요소들을 연결하고 스토리를 부여하는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유년기의 삶을 해석, 재구성하는 데 50년이 걸린 셈이다.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벨파스트> 각본 작업에 ‘3개월, 50이 걸렸다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감독의 삶을 재구성할 때 출발점이자 바탕이 되는 원-장면은 바로 일상이 순식간에 (감독의 표현으로는 심장이 한 번 뛰는 동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다.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일상이라는 기적

 

도입부 폭동 장면을 생각해보자. 분명 9세 소년의 눈에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사건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일상의 허약함을 목격했다. 일상 (생활세계)이 붕괴하고, 비일상 (계엄, 감시, 이웃의 분열)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버디는 이때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 또 일상이 그냥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일상은 가족과 이웃, 서로의 노력 (또는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여기서 일상은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라는 발상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아빠, 엄마가 미남 미녀로 묘사되고, 서로를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아스테어로 부르며 거리에서 멋지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 또 할아버지가 사랑 노래를 부르며 할머니와 춤추는 모습, 그리고 결말부 아빠가 엄마에게 마치 미혼의 청년이 연인에게 구애하고 청혼하는 것처럼 <변함없는 사랑> (Everlasting Love, 1968)을 부르는 모습에서 표현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자아 연출의 사회학, 1956)은 드라마투르기 (극작술)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사람은 사회에서 배우처럼 자기가 맡은 역할의 연기를 한다는 것. 우리는 연기자로서, 또 관람객으로서 공동 작업하며 사회를 성립시킨다는 것.

또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은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족에 적용했다. 이때 가족은 (다른 가족과 공유하지 않는) 공통 전제를 공동 작업으로 유지하는 연기 공간이다.

 

이런 발상의 요점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인간관계를 만들고,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항상 안심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없다. 친구이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공동체이든 상대적인 비유동성’ (=안심)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또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노력, 시간이 축적되어 타자 (공동체의 외부)와 차이를 만들고 대체 불가능성을 낳는 것이다.

 

분명 인간관계를 연기한다는 것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각자의 역할, 관계에 필연적인 근거가 전혀 없고 다른 것일 수 있다고 하는, 포스트모던한 부정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자가 <굳이> 선택한 부자유를 통해 상상적인 것을 증폭시킨다는 면에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끝없는 대체 가능성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연기를 너무 부정적으로 여기진 말자. <드라이브 마이 카>(2021) 미사키의 말처럼 상대의 말이 자신에게 있어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또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연기라면 그것을 진실과 같은 것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이때 진실, 사실, 연기는 분리되기 어렵다.

이 맥락에서 일상, 공동체성의 연기에는 선의와 자발성이 관건이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행위를 말한다. 맹목적(관습적) 역할 수행이 아니라, 재귀적 선택에 의한 연기 (작위)라는 의미다. (과거에는 자명하다고 여겨진 전통이나 공동성이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재귀성이라고 부른다).

 

재귀적 선택의 이유를 묻는다면 단지 내가 하고 싶으니까라고 답하면 충분하다. ‘운명같은 외재적인 이유를 들먹이면 안 된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이유는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처음부터 자신 속에 있다. 그것은 대체로 언어 너머에 있는 비언어적인 것이다.

 

언어는 이분법적이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의 <여자를 다루는 방법> (How to handle a Woman, 1967) 노래가 흥미롭다. 할아버지는 사랑앓이를 하는 버디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가 가르쳐주는 방법은 언어적 기교 (아첨, 위협, 조롱, 간청, 로맨스 작가 )가 아닌 사랑이고, 마음속에서 우러난 자발성이다.

노래는 아서왕이 늙은 현자’ (=멀린)의 충고를 상기하는 구조다. 이 장면에서 멀린 아서왕 할아버지 버디의 정서적 연쇄가 일어난다. 정서적 매체인 노래를 통해 문화적 DNA미메시스’ (모방)되는 것이다.

 

노래 (음악)와 언어는 확실히 다르다. 언어는 중간적인 것’, ‘3의 것을 배제한다. 언어가 그리는 세상에는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 있을 뿐이다 (사고의 기본 법칙인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은 이 원칙에 조응한다). 언어는 언제나 이항 대립을 설정한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앞서 일상과 정치의 괴리를 이야기했다. 개인들 각자와 달리 현실 정치는 이분법적으로 작동한다는 역설 말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언어를 생각할 수 있다. 언어가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인간은 음률을 분할하고, 그 분할된 요소를 교환 가능하게 함으로써 단어를 만들었고, 그것이 개념 언어로 이어졌다. 개념 언어와 함께 인간은 분업적 협동과 기술의 축적, 전승을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사회를 운영하고, 시스템화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개념 차원에서나 음성 차원에서나 정확하게 분절되고, 이분법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대규모 정주 사회를 운영할 수 있었다. 분절과 이분법은 관리 (=행정화)와 계산 (=시장화)에 적합하다. 시스템화에 알맞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인간은 언어 덕분에 사회를 운영할 수 있지만, 언어 때문에 사회에 갇히게 된다. 언어의 기본 속성인 분절과 (중간, 3자의) 배제, 즉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게 된다는 말이다. 영화는 <이분법 즉 언어>에 대비되는 <노래, (신체성), 유머, 상상>을 보여준다.


언어를 맹신하지 마라

 

영화는 빌리 클랜튼과 같은 극단주의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그 원인으로 언어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사회의 근본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면 <이분법, 즉 언어>의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버디 : 하지만 확실히 정답은 하나뿐이잖아요

할아버지 : 정답이 오직 하나뿐이라면

사람들이 저렇게 온 동네에서 자폭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할아버지는 버디에게 수학 문제의 답이 헷갈리면, 숫자를 <불명확하게> 쓰라고 충고한다. 유일한 정답은 없으니까 (할아버지는 그것을 스프레드 베팅’ spread betting이라고 부른다). 또 할아버지는 표준어도 맹종하지 않는다. 표준어와 사투리의 경계를 흐린다.

그리고 사회 시스템도 언어와 비슷하게 접근한다. 월세 시스템 이야기다 (세입자에게 월세를 되돌려 주는 방식). 이런 사례는 모두 엄격한 언어=시스템화 (시장화, 행정화)를 무력하게 만든다.

 

엄마는 사회 시스템화의 정점에 있는 세무서와 갈등한다. 그러면서 세무서가 자신에게 인간적인 예우를 갖춰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아빠는 또한 언어 즉 이분법을 믿지 않는다 (“우리 동네엔 누구 편 같은 거 없어”). 그 불신을 난센스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빠는 난센스를 두 번 말한다. 한 번은 종교에 대해, 또 한 번은 바리케이드에 대해. 이들은 모두 분리(분절)와 이분법에 관련된 것이다.

버디 가족은 이처럼 사회 시스템의 언어를 맹신하지 않는다. 정치인, 종교인이 내놓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개념 언어도 맹신하지 않는다. 버디 가족은 국가를 말하지 않고, 충성파도, 연합파도 말하지 않으며, 폭동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 이들이 믿는 것은 가족이고, 이웃이다.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것 또한 가족이고, 이웃이다.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버디 가족은 이처럼 개념 언어, 이항 도식을 이용하되 (‘스프레드 베팅’), 불신하고, 꿋꿋이 앞으로 나아간다. 또 이들이 나아가는 여정에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꾼 인간관계, 즉 홈베이스다.

여기서 영화는 진정한 웨스턴 영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창한 언어를 믿지 않고, 이분법 (/)을 따르지 않고, 가까운 사람,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는 면에서 말이다. 또 영화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을 떠올리게 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한 영혼이 이 나라 [아일랜드]에 태어나면

그물을 던져 그 영혼을 날지 못하게 해.

민족성, 언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

나는 그 그물들을 넘어 날아가려 할 거고

 

소설의 주제는 날아감이다. 탈주, 망명을 뜻한다. 주인공의 이름 디덜러스’ (=다이달로스)<벨파스트>하늘을 나는 자동차치티치티 뱅뱅과 대탈주에 조응한다. 디덜러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지옥 설교를 듣고, 망명할 결심을 굳힌다.

디덜러스는 버디 가족과 마찬가지로 개념 (추상, 거대) 언어를 불신하고, 불합리·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전진한다.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고, 삶으로부터 삶을 재창조하는 것!”

 

어떤 면에서 <벨파스트>는 감독의 입장에서 그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상당히 공통되는 모티브가 있다 (게다가 어린 시절 디덜러스는 개신교 소녀를 좋아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디덜러스에게는 홈베이스가 없고, 유머가 없다.

 

아이러니

 

감독은 벨파스트의 가혹한 상황에서 유머는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영화에도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 많다. 웃음은 긴장을 완화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언어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질 들뢰즈의 관점에서 영화는 두 종류의 웃음을 일으킨다.

들뢰즈는 자허-마조흐에 대한 소개(1967)에서 인간이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사디즘 (가학적 방식)과 마조히즘 (피학적 방식)이다. 전자는 아이러니, 후자는 유머에 상응한다. 아이러니와 유머는 모두 웃음을 낳고, 긴장을 이완시킨다. 하지만 웃음의 성격은 다르다.

아빠 : 난 가톨릭에 전혀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가톨릭은 공포의 종교야

아빠의 말이 보이스오버로 들리고, 카메라는 으스스한 고딕 양식의 개신교 교회를 비춘다. 거기서 목사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죽음, 또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두 갈래 길을 설교한다. 이 설교는 개신교도 공포의 종교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반어적이고, 아이러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공포는 무조건 나쁜 건가”, “종교가 공포를 포함하면 안 되나”, 나아가 공포란 어떤 건가” “종교란 것은 뭔가.”

 

이처럼 아이러니는 코드’, 기존의 관습적 정의를 전복한다. 그것도 끝없이. 아이러니는 근거를 의심함으로써, 관습(습관)적인 언어 행동에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런 언어 행동을 흔들리게 만든다.

모이라의 말이 그런 경우다. 신교도와 구교도를 이름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모이라의 말은 즉시 오류로 밝혀진다. 그럼으로써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신교도와 구교도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아이러니는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유머


반면 유머는 시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버디 가족과 이별을 앞두고 이모는 목 놓아노래를 부른다. 이때 이모부는 뜬금없이 묻는다.

 

이모부 : 그 돈 어쨌어?

이모 : 무슨 돈?

이모부 : 장모님이 노래 배우라고 주신 돈

지바 마사야의 말처럼 유머는 코드 변환이다. 이모부는 이별의 슬픔이라는 사태를 노래 실력문제로 바꿔놓았다. 그럼으로써 이모의 슬픔을 웃음으로 완화시키는 것이다.

또 이모부는 고지방 음식으로 악명 높은 얼스터 프라이를 만들며, 아일랜드가 어떤 분야에서든 세계 1종목을 보유하는 것은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 이 농담은 건강 걱정의 시각을 세계 대회의 시각으로 바꾸며, 국민 요리의 유해성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완시킨다.

 

한편 유머는 자해적 방식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아빠는 <24시간이라는 시한부 생명을 사는 환자>에 관한 농담을 한다. 이 농담에서 환자는 풍전등화와 같은 벨파스트의 운명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아빠는 자신과 우리 모두를 희화화하며 연민을 자아낸다. 그러면서 운명 공동체로서의 공감을 형성한다.

 

또 유머는 저항의 방법이다. 이모부는 바리케이드 검문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래서 자신이 방문할 버디 집의 주소를 밝히지 않는다. 버디 집에는 주소가 없고, 그 대신 이름이 있다는 거다. “그럼 그 집 이름은?” “멍청한 놈”(Arsehole). 이 대화는 통제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마조히즘=유머는 이런 것이다. 사디즘=아이러니는 규범을 철저히 무시하고, 정면 돌파하는 방식으로 규범을 조롱한다. 반면 마조히즘=유머는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고, 이로써 규범의 불합리성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런 마조히즘적 저항을 비중 있게 보여준다.

 

[ 인내 (순종) 저항 (반전) ] 영화는 이 주제를 존 밀턴의 문장으로 표현한다. 주민들을 대표해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프랭키는 밀턴의 실락원(1667)을 인용한다.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다.” 이 같은 마조히즘=유머는 앞서 말한 언어 (시스템)를 이용하면서도, 넘어선다는 주제에 조응한다.

아빠의 가훈(?)은 또 다른 각도에서 <순종과 위배>의 동역학을 보여준다. “착하게 굴어라. 그게 안 될 땐? 들키지 마라.” (Be Good. And if you can’t be good. Be Careful.) 짓궂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 (care)가 담겨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이 이것을 불쾌하게 여긴다면, 그렇게 행동하지(생각하지) 않는 척하겠다.

 

척하다는 것. 위선(거짓)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일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소중한 관계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일 수 있다. 앞서 말한 드라마투르기의 관점에서, 선의와 자발성에서 우러난 연기, 재귀적 선택에 의한 연기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적어도 이런 상호 연기가 있었다면 30년 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척하다는 어쩌면 상호 존중, 관용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홈 베이스

 

버디의 홈 베이스는 이렇게 형성됐다. 홈 베이스의 본질은 공기나 물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난 선의와 노력으로 가꿔나가는 인간관계였다.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언어=이분법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강함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유머와 약간의 아이러니를 아울러 지니는 것이었다.


영화 <벨파스트> 스틸컷 이미지

 

버디 가족은 이 같은 홈 베이스를 장착하고 벨파스트를 떠났다. 마치 달팽이가 집을 지고 떠나듯. 이때 홈 베이스는 유동적인 근대성’, 곧 모든 것이 변화하고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 마음의 지주가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홈 베이스는 어디를 가든, 무엇이 되건변하지 않는 진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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