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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피그> - 요리의 인류학2022-02-24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2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피그> : 요리의 인류학

 

<피그> (Pig, 마이클 사노스키, 2021)는 우리가 요리를 통해 공동체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공동체 감각의 기초는 공통 감각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똑같이, 함께 느끼고 있다고 신뢰하는 감각을 말한다. 영화는 공통 감각의 체험을 다각도로 그린다. 자연, 동물,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관점에서 주인공 ’(이하 로빈)은 요리를 통해 공통 감각의 체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로빈의 감각은 동료들에게 전달되고, 사나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차세대 청년 아미르에게 전달된다. 이처럼 영화는 공통 감각이 시간 축을 따라 가로로 전달되고, 세로로 전달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인물 성격부터 살펴보자.

 

초월주의

 

로빈은 사회를 떠나 숲에서 산다. <뉴잉글랜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형상화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초월주의는 19세기 전반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펼쳐진 철학 운동이다. 유럽 낭만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미국적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대표적인 인물로 랠프 왈도 에머슨’ (1803~1882)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0)가 있다. 이들은 초월주의를 종교와 사회적 실천 영역 전체에 걸친 사상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랠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사진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초월주의는 야생지(Wilderness)를 초월적 세계로 여겼다. 이 야생지 개념에는 두 가지 근원이 있다. 하나는 낭만주의에서 유래한 <숭고>의 개념. 또 하나는 특별히 미국인들이 가졌던 <프런티어> 개념이다. “자연에 맞서는 독립적이고 고결하며 창조적인 인간, 즉 강직한 개인이라는 프런티어 이미지는 미국인의 자화상을 형성했다(조제프 R. 데자르댕, 환경윤리, 7). 초월주의는 이런 야생지의 초월적 세계와 산업도시의 각박한 사회를 대비했다. <피그>에도 이런 분위기가 담겨있다.

 

낭만주의는 <사회>에 갇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마찬가지로 초월주의 운동의 일원인 마가렛 풀러’ (1810~1850) 또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기간을 갖자고 주장했다. 각자가 참된 개인성을 회복하고 난 뒤, 사회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영화에서 로빈이 숲속에 은거하다 도시로 나오는 모습. 또 로빈이 도시 사람들에게 손익 관계로 구속된 사회에서의 삶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식된 뉴잉글랜드인 포틀랜드를 무대로 이 같은 초월주의적 대비 (/도시)를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대륙횡단철도가 개설된 이후 포틀랜드는 뉴잉글랜드의 전통문화를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역사학자인 톰 에드워즈는 당시의 포틀랜드가 이식된 뉴잉글랜드 귀부인이라면, 시애틀은 추진력, 낙천주의, 재치,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행운을 통해 부자가 된 광란의 개척자라고 했다.

두 도시의 문화 차이와 경쟁 관계는 <피그>에도 언급된다. 아미르가 죽어도 시애틀로는 안 가요.”라고 말하자, 랍은 염병 시애틀이라고 답한다).

 

소비 사회

 

영화는 오늘날 포틀랜드라는 도시를 손익 관계의 사슬로 묶인 사회로 묘사한다(물론 이것은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성격일 것이다). ‘지하 격투장’(?)에서는 식당 종사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셰프를 구타한다. 유명한 셰프일수록 돈을 많이 내야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돈으로 전설 (의미, 가치)을 산다는 의미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에드거는 의미가치란 단어를 거듭 말하며, 그것을 모두 돈으로 환산해 생각한다.

 

지하 격투장은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1970)에서 말한 <기호적 소비>를 보여준다. 소비사회는 물자를 소비한다기보다, 물자에 부여된 개념과 의미를 소비한다. 이때 물자는 기호가 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상품의 실질적인 기능을 구입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차이화를 위한 기호(정보, 의미)를 구입한다. 소비행위는 사람들의 개성과 감각(센스, 가치)을 나타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고도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상품을 발매하고, 새로운 기호를 만들고, 다른 기호(상품)와 차별화를 추구한다. 또 사람들은 각자 차이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 소비행위에는 끝이 없다. 이것이 <차이의 원리>. 소비사회는 사소한 차이의 기호를 계속 만들어냄으로써 소비 욕구를 무한하게 불러일으킨다.

이때 사람들의 욕구는 개인의 주체성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호의 시스템에 의해 구동되고 있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호는 <피그>에서 아미르가 선호하는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요리’, 생태학적 로하스’, 그리고 상품이 가진 역사와 스토리텔링을 포괄한다.

 

어쩌면 지하 격투장은 포틀랜드 출신 작가인 척 팔라닉’ (Chuck Palahniuk)의 소설 <파이트 클럽> (Fight Club, 1996) 격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핵심은 소비사회의 모습에 있다. “나의 지인들은 과거에는 포르노 잡지가 있는 욕실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이케아 가구 카탈로그가 있는 욕실에 앉아 있다.” 현대인은 포르노보다 브랜드를 원한다는 것.

 

이 구절을 영화 <파이트 클럽>(데이비드 핀처, 1999)은 주인공의 아파트를 비추며 상품의 기호들(제품명, 가격 등급)을 그래픽으로 시각화한다. 실내는 기발한 신상품들로 가득하다. 현대 사회는 공허한 차이의 원리로 구동되는 기호적 소비의 사회란 이야기다. 한편 로빈은 이와 정반대인 세계=숲에서 산다.

 

영화 <파이트 클럽> 포스터 이미지

△ 영화 <파이트 클럽(1999)> (출처: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

 

수렵 채집 사회

 

소비사회의 반대말은 검약(검소) 사회일까. 그렇진 않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 사회를 수렵·채집 사회로 본다. 그는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를 인용하며 수렵·채집 사회가 원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라고 말한다.

 

수렵·채집 사회는 물자를 소유하지도 않고, 저축하지도 않고, 미래(경제)를 계획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유롭다. 필수품의 염려에서 해방된 생활을 한다. 이들이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들처럼 살면 미래를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물자가 있을 때 단번에 써버린다. 이 점에서 낭비의 사회다. 낭비=만족이 허용되는 경제적 조건에서 살아간다.

(이에 비해 현대 소비사회는 낭비를 방해한다. 소비사회는 차이의 기호를 계속 만들어내며 소비 욕구를 계속 촉발한다. 그 결과로 물자가 끝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결핍의 사회이지 낭비=만족의 사회가 아니다).

 

이 점은 초월주의를 대표하는 소로의 생각에 상응한다. 월든의 첫 장 경제에서 그는 삶의 진정한 필수품이 뭔지 묻는다. 로마 스토아 철학자처럼 그는 검약을 조언하지만, 그는 또한 사치(extravagance)를 조언한다. “(다시는 또 오지 않을) 하루 동안에 가진 것을 소비하는 것.” 그는 진정한 경제는 타이밍 (=‘시의적절함’)의 문제라고 쓴다.

 

영화는 로빈이 사는 숲을 이처럼 소비사회에 대비되는 세계로 설정한다. 로빈은 값비싼 트러플 버섯을 돼지에게 주고(“트러플 하나 먹어”), 요리를 만들어준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낭비. 또 탈()인간중심주의다. 로빈의 지진 괴담’(200년 주기의 지진으로 포틀랜드가 침몰한다는 것)은 또한 그가 사회 너머의 세계와 접속되어 있다는 점을 말한다. 로빈은 미국 환경윤리학자인 J. B. 캘리콧의 <대지윤리>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대지윤리 (Land Ethics)

 

캘리콧은 물, 공기, 흙을 비롯해 유기체와 무기물 모두를 생명 공동체로 여기는 대지윤리를 제안한다(대지윤리의 옹호In Defense of the Land Ethic, 1989). 대지윤리는 전체론이다. 도덕적 고려의 초점을 개별 존재로부터 생명권 전체로 전환시킨다.

그는 생태윤리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주의가 내세우는 공리주의’, 또 동물해방론이 제안하는 의무론이 모두 부족하다고 본다. 그러면서 환경윤리의 핵심을 <도덕감>에서 찾는다. 느낌, 태도, 성향, 사랑, 동정과 같은 도덕적 <감정>에서 찾는 것이다(캘리콧은 이 개념의 사상적 근거를 데이비드 흄과 아담 스미스에서 찾고,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인용한다).

 

이 관점에서 애정과 동정의 감정은 인간 개인에서 확장되어 사회를 포괄하고, 대지로 확대된다. 우리는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보고 아이를 도우면 이익이 있을 것’(공리주의)이라거나, ‘아이에게는 각자 본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도와야 한다는 것’(의무론, 규범주의)이 아니라, 정서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돕는다. 마찬가지로 대지윤리는 나무가 부러지면 내 마음이 상한다는 정서 차원에 바탕을 둔다는 말이다.

 

이 개념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용어로 자기관여(Self Involvement)에 조응한다. 자기관여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자아 속에 내포시키는 것을 말한다. <피그>에서 로빈은 숲과 돼지에게 자기관여를 느끼고 있다.

그가 돼지를 찾겠다고 도시 곳곳을 뒤집어놓자 아미르는 새 돼지를 사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로빈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답한다.

 

로빈: 트러플 찾는 데에 돼지는 없어도 돼

아미르: 뭐요?

로빈: 나무들. 나무들이 어디를 찾을지 말해주지

아미르: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로빈: 사랑하니까 (I love her).

 

로빈은 대지윤리를 실행하고 있다. 이때 자기관여 (=동일시)의 관점에서 2막 타이틀 장면은 흥미롭다. 로빈의 꿈에서 숲속을 걷는 돼지는 로빈 자신일 수 있다(그는 돼지의 도움이 없이 트러플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이 점에서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트러플을 생각해보자.

 

-횡단적 아비투스

 

트러플은 인위적인 조정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과학적으로는 논란이 있지만, 트러플 향기는 수컷 돼지의 페로몬 향기라는 속설이 널리 퍼져있다. 감독도 인터뷰에서 그런 믿음을 이야기했다(Dread Central, 19/07/2021). 역사적으로 암퇘지가 트러플 돼지로 활용된 것은 사실이다. 또 암퇘지가 트러플을 매우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트러플을 찾아내면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운다(오늘날 트러플 개로 대체된 이유다).

 

그럼, 인간이 트러플을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트러플을 먹을 때 인간은 암퇘지가 되는 게 아닐까. 여기서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횡단적 아비투스> 개념을 참조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동물의 관점에서 먹기에 관한 문제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식용 개미를 사람들의 귀뚜라미라고 부른다. 원숭이는 귀뚜라미를 먹는다. 그러니까 인간이 개미를 먹는 것은 원숭이의 관점에서 귀뚜라미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에두아르도 콘은 이때 인간이 다른 존재의 관점을 취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다.

 

우리의 신체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의 신체에 올라탄다. 다른 부류의 신체화에 구비된 관점, 즉 주격인 로부터 다른 세계를 본다. 잠시나마 다른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다.” (How Forest Think, 국역 숲은 생각한다, 3)

 

아마존 원주민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 각자가 자기들로서, 즉 관점을 가진 존재들로서 살아간다고 본다. 이때 다른 부류의 자기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신체화된 그들의 관점 속에 머무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발상은 로빈이 돼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암퇘지의 관점에서 트러플을 먹는 현대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다른 부류의 자기들의 관점 속에 머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느끼는 감정은 인간관계의 확장에서 오는 착각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대등한 기원을 가진 감정일 수 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뉴기니 여인들이 자기 아이들과 새끼 돼지들을 함께 가슴에 품고 기르고, 자기 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며, 만약 병이 나면 자기 자식인 것처럼 걱정한다고 했다(음식문화의 수수께끼, 9).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요리의 소외

 

영화는 포틀랜드를 포스트모던 사회로 묘사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사회는 1970년대 이후의 사회를 말한다. 로빈이 셰프로 활약한 시기는 1980~1990년대로 보인다(아내가 2000년에 사망한 뒤 업계를 떠났다).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시대와 겹친다. 이 점에서 로빈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이행한 시대에 과거’(?)의 가치를 지켜나간 인물이다. 이때 그가 지키려 했던 가치는 뭔가. 무엇보다도 리얼에 관한 가치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포스트모던 사회는 기호를 소비한다. 기호란 원래 현실에 있는 오리지널을 모방한 모상이다. 하지만 이런 모상 가운데 실제의 오리지널을 갖지 않는 것이 많이 만들어진다. 장 보드리야르는 오리지널이 없는 모상을 시뮬라크르로 불렀다.

시뮬라크르가 많아지면 무엇이 오리지널(=현실)이고 무엇이 모상(=비현실)인지 모르게 된다. 현대사회는 이런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상태를 하이퍼리얼이라고 불렀다. 영화는 요리 영역에서 포틀랜드의 하이퍼리얼과 로빈의 리얼을 대비한다. 로빈은 핀웨이 레스토랑 셰프에게 말한다. “이것들은 진짜가 아니야” (None of it is real).

 

요리에서 리얼의 문제는 기술 발전과 연관되고, 이것은 또한 시스템화와 연결된다. 시스템화가 진행될수록 현실감은 희박해진다. 요리는 원래 기예’ (Technique)에 속한다. 또 일반적으로 기술은 [ 기예 테크놀로지 테크 ]로 발전한다(기예에 과학이 더해지면 테크놀로지가 되고, 이것이 고도화되면 ‘(하이)테크가 된다).

한편 기술 발전은 노동 분업을 수반하고, 이에 따라 사회가 시스템화 된다. 현대 사회는 1970년대에 출발해 1980년대에 시스템화 됐다(미국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이것을 <맥도날드화> (1993)라고 불렀다. 그것은 매뉴얼에 의한 사회의 합리화를 말한다).

 

요리 분야의 시스템화는 <요리의 소외>를 낳았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요리하는지를 모르게 된 것이다(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 <소일렌트 그린> (1973)은 선구적으로, 또 음울하게 이 문제를 예견했다). 요리의 소외는 삶의 현실감을 축소시킨다. 이 관점에서 로빈은 반대 지점에 서있다.

 

로빈: 난 내가 요리했던 모든 식사를 기억해요

내가 서빙 했던 모든 사람을 기억해요

 

로빈에게 요리의 리얼은 이처럼 <인간적 유대>에 기초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음식을 만든다는 것. 여기에는 <감정의 직접성>이 있다. 이는 곧 자기관여의 감정이다. 영화는 핀웨이 식당에서 오늘날 요리의 현실과 로빈의 요리 철학을 대조한다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슬로우 푸드와 로하스

 

핀웨이 식당은 아시아 음악이 흐르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작품 같은 음식을 선보인다. 하지만 이곳도 소비사회의 논리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곳의 셰프인 데릭은 사업’ ‘기대’ ‘투자’ ‘평가라는 용어를 늘어놓는다.

또 한편으로는 해체주의 요리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지 재료지역 산업같은 지역성과 푸드 마일을 들먹인다(“이건 정말 훌륭해요. 2012년 산 '피노'인데 불과 30km 떨어진 곳에서 생산됐어요.”). 그럼에도 이 개념들은 고급 기호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준다. 기호의 소비는 차이를 만드는 기호를 요구하고, 차이의 기호는 에코 로하스, 상품의 역사, 스토리텔링을 아우른다.

 

로빈의 철학은 슬로우 푸드에 가깝고, 핀웨이 식당의 철학은 로하스 (LOHAS: Life 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에 가깝다. 슬로우푸드 운동은 1970년대부터 요리의 소외에 맞서 일어난 운동이다. 이 운동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공동체 (인간적 유대)의 보전>에 바탕을 둔다. <그 결과로> 우리가 좋은 식품을 먹는 것이다. 한편 로하스는 2000년대, 대량 유통에서도 안전한 식품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두 개념 모두 안전한 식품을 먹는다는 결과는 비슷하지만, 바탕에 있는 정신은 꽤 다르다.

 

로하스는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매크로 시점이고 슬로우 푸드는 지역, 동료, 지인을 생각하는 마이크로 시점이다. 이를테면 이웃을 위해 좋은 식품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로하스는 말 그대로 라이프 스타일이고 슬로우 푸드는 공동체에 기초한 소셜 스타일이다. 이 차이는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한 <라이프 스타일><공동체 감각>의 차이에 상응하는 면이 있다.

 

라이프 스타일은 개인이 선택하는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다. 반면 공동체 감각은 개인이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기여하는 신뢰감과 기여도를 말한다(‘나는 동료에게 기여할 수 있다.’ ‘동료는 나를 도와준다.’ ‘나는 동료의 일원이다’). 공동체 감각을 가지면 타인에 대한 기여 자체가 행복으로 느껴지고, 보상도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의 눈도 신경 쓰지 않게 되어 정신적 병리에서 해방된다고 아들러는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로하스는 (개념 있는) 개인의 취향 또는 브랜드에 머물기 쉽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쉽다. 바로 그 점에서 기호의 소비 시스템에 지배 받기 쉽다. 이때 로하스에 관한 사람들의 욕구는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유행=트렌드로 형성되고, 차이의 시스템에 의해 구동된다. 그런 만큼 유행의 변화에 취약할 수 있다.

반면 슬로우 푸드는 국지적이지만, 바로 그 점에서 (국지적 공동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속 가능성이 높다. 또 인간적 유대, 공동체 감각’ (소속감, 신뢰감, 기여도)에 기초한 <감정의 직접성>이 살아있다. 말하자면 공동체 감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자신의 기여를 실감할 수 있다.

 

해체주의 요리와 진정성

 

핀웨이 식당의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작품처럼 보이지만 기호의 소비성격이 있다. 말하자면 <다품종, 소량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포디즘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먼저 로하스의 기호가 있다(“현지에서 조달된 가리비” “채집한 월귤 열매”). 이와 함께 1990년대 말부터 유행한 분자 미식학페란 아드리아의 해체주의 요리 개념을 더했다. 페란 아드리아는 자크 데리다의 철학을 인용하며 프랑스 정전’(French Canon) 요리를 해체했고 [‘요리의 고정 관념 파괴요리의 각 요소를 재조합’]을 실험했다.

 

데릭: 우리의 관심사는 현지 토산물을 재료로 쓰되

그것들을 해체하는 겁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음식 전반에 대한 감성을 높이는 겁니다

 

분자 미식학은 말 그대로 분자 (화학, 물리학) 관점에서 맛을 연구한다. 요리 개발에 과학기술을 활용한다는 면에서 분자 요리는 기예를 넘어 테크놀로지와 테크에 이르렀다.

가령 핀웨이 요리에서 월귤 열매 거품은 페란 아드리아의 시그니처 기술인 에스푸마’ (Espuma. 식자재를 거품으로 만든 요리)이고, “급냉동한 바닷물 어란 박스는 시카고 셰프인 그랜트 애커츠가 엔지니어와 협력해 발명한 쾌속냉동 요리법을 응용한 듯하다.

 

분자 미식학이 요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로빈은 이 요리에서 현실의 희박함을 느낀다. 그가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손끝으로 요리를 꾹꾹 눌러본 이유일 것이다. 더욱이 문제는 요리를 만든 셰프 자신도 이 요리에서 진성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게 당신이 좋아하는 풍의 요리인가?” 로빈의 질문에 데릭은 이 스타일이 최첨단이고, “다들 열광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대답이 아니다. 로빈은 원래 데릭의 꿈이 진짜 영국식 펍을 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번드르르한 것이 아닌 간소한 메뉴를 대표 요리로 하는 펍 말이다.

 

(이 장면을 달리 보면, 화려하고 복잡한 요리, 특히 프랑스 요리에 대한 앵글로색슨 세계의 적대감이라는 오랜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두 세계의 대립은 17세기 말부터 드러났다. ‘간소한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영국적 특성은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에서도 지속됐다. 미국 청교도주의 관점에서 오트퀴진위선적인 행위처럼 비치기도 한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음식의 세계사, 6).

데릭은 과거의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현실이 희박해진 것이다. 요리의 현실감도 엷어지고, 데릭 자신의 존재()도 없어진 것이다.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로빈: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자네는 점점 더 없어지지 (there’ll be less of you)

자네는 그들을 위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자네를 보지도 못해

자네조차도 보지를 않으니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

(We don't get a lot of things to care about)

 

자막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로 번역했다. 하지만 직역하면 우리는 신경 쓸 게 별로 없어’ ‘진짜 소중하게 여기고 돌봐야 할 것은 많지 않아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로빈의 말은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데릭은 꿈=진정성을 버리고 소비사회의 논리(대중의 평가, 선호도)를 따랐다는 것, 그래서 존재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 로빈은 그 점을 충고한다. 그러자 데릭은 눈물을 글썽이며 와인을 들이킨다. 로빈의 충고를 긍정하고 이해한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교감을 아름답게 그린다. 그럼 로빈이 요리에서 진정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뭘까.

 

헤스티아인류학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로빈의 꿈은 자신이 과거에 운영한 식당의 이름에 담겨 있다. 헤스티아. 고대 그리스 여신이다. 난로, 화덕을 상징 (=의인화)하고, 가정의 중심을 의미한다. 헤스티아에게 바치는 제물은 돼지였다. 로빈이 잃어버린 돼지를 찾아 헤맨다는 모티브를 떠올리게 한다(그리고 한자 의 어원에 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헤스티아=화덕이라는 면에서는 엔딩 장면, 아내가 불러주는 노래 <아임 온 파이어>(I’m on Fire, 브루스 스프링스턴, 1985)를 떠올리게 한다. 셰프는 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셰프는 불을 중심으로, 즉 화덕에서 만든 음식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음식을 제공한다. 이로써 공동체를 조성하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이다. 헤스티아가 공동체의 중심인 이유다. 영어로 초점을 뜻하는 포커스(focus)도 원래 화덕이라는 뜻이다.

 

요리는 인간 특유의 행위이고, 인간성의 본질과 연관된 행위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1969)는 요리가 언어(사용)만큼이나 인류 고유의 활동이라고 봤고, 자연과 문화의 분기점을 요리에서 찾았다. 그 뒤로 진화인류학자 리처드 랭엄 (2009)은 인간 진화의 중심 동력을 요리에서 찾았다. 요리는 소화를 외부화시킴으로써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두뇌를 발전시켰다. 그 덕분에 인간이 진화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특히 불을 이용하는 요리다.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의 말처럼 화식(火食)은 음식을 변형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를 변형시켰다.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을 때, 모닥불이 교감의 장소가 됐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불을 이용한 요리는 공동의 식사와 예측 가능한 식사 시간을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요리는 식사를 고정된 장소, 고정된 시각에 함께 수행하는 활동으로 만듦으로써 사회화했다(그 이전까지는 공동체가 함께 식사할 만한 유인이 거의 없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같은 책, 1).

 

헤스티아가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상징은 여기서 탄생했을 것이다. 불과 음식이 결합되면서 공동생활의 초점이 생겨났다. 이것은 요리를 담당하는 전문적 기능을 낳고, ‘기쁨과 책임의 공유를 창출한다. 로빈의 꿈은 이처럼 요리의 인류학적 의미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로빈은 공동체의 기반인 <공통 감각> 체험의 디자이너라고 볼 수 있다.

 

미메시스

 

앞서 아들러의 공동체 감각을 언급했다. 이 감각의 기저에 있는 것이 공통 감각이다. 아들러는 공동체 동료들이 서로 돕는 협조의 기본은 서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그러면 서로 자신이 기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통 감각은 이런 개념적 언어 차원보다 앞서는, <언어 이전의 것>이다.

 

요리는 이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요리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말이 되지 않는 것의 영역이다. 로빈 또한 말수가 극히 적다. 전화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빈은 15년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던 동료들과 더불어 신뢰와 존중이라는 정서의 유대를 지속한다.

소금 바게트를 잘 만드는 헬렌이 로빈을 따뜻하게 포옹하고 떠나보내는 모습은 언어 이전의 교감을 전달한다. 그 유대는 과거에 로빈과 함께 요리를 만들며 형성된 공통 감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리우스를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게 만든 것은 로빈의 요리였다. 그 무서운 남자를 요리로 제압한 것이다. 이때 다리우스는 평소의 삶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느꼈다. 그것은 손익 계산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벗어나 행복한(했던) 시간으로 초월하는 순간이었다.

뉴잉글랜드 초월주의가 기대고 있는 낭만주의 예술론의 관점에서 이 요리는 예술작품이다. 낭만주의 예술의 메시지는 사회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술로 기능하는 요리를 통해 다리우스는 사회의 외부를 맛볼 수 있었다. 그 초월의 세계는 지금도 다리우스의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세계. 바로 아내와 함께 나눴던 공통 감각의 세계였다.

 

요리는 이처럼 공통 감각을 체험하게 하고, 로빈은 그 체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이 체험은 시간 축의 가로(동료들, 다리우스)로 전달되고, 또 세로(차세대)로 전달된다. 로빈이 제공하는 체험은 과거에 아미르 부모를 감동시켰고, 현재의 아미르를 감동시킨다.

그 결과로 아미르는 로빈을 모방한다. 아미르는 결말부 자동차 안에서 클래식음악(=예술)에 대한 해설(=언어) 듣기를 중단한다. 언어 이전의 세계를 맛보고, 언어를 초월한 세계를 엿보았기 때문이다(전반부 로빈이 해설 듣기를 중단시킬 때 아미르는 저항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재료를 마련하고, 함께 요리를 만들었고, 함께 요리를 먹었다. 이처럼 언어가 아닌 요리를 통해 로빈의 문화적 DNA가 차세대에 전달된 것이다. 이 문화적 밈의 전달을 미메시스라고 불러보자.

문화 DNA는 강제가 아닌 감동에 의한 미메시스(모방)로 전달된다. 이때 미메시스는 중동태적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면에서 수동적이지만, 스스로 좋아서 따라한다는 면에서는 능동적이다. 또 미메시스로 얻은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인격의 일부가 된다.

 

함께 살아간다

 

특히 공동체의 <윤리>는 공통 감각을 통해 세워지고, (개념 언어가 아닌) 미메시스를 통해 전달, 계승된다. 이때 윤리는 자신과 가까운 친구, 가족, 연인을 지키겠다는 감각의 공동성을 말한다. 로빈이 돼지를 찾아 나선 이유, 또 아미르가 마침내 로빈의 분노와 슬픔에 공감한 이유일 것이다.

(앞서 로빈의 태도를 자기관여로 이야기했다. 자기관여는 공동체 감각과 다르지 않다. 자신과 돼지를 공동체로 느끼는 감각 말이다. 이 감각의 기초는 함께 먹는 것에 있다. 인류학 용어로 공식’ (共食 commensality)은 공동체 감각의 기반이다.)

 

미메시스는 비범한 사람으로부터 평범한 사람 쪽으로 옮아간다. 여기에 감염된 사람은 비범한 사람이 되어, 그 다음 감염을 낳는다. 영화는 이 같은 감염의 연쇄를 보여준다.

로빈의 비범함은 다른 사람(또는 존재)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감각에 있다. 로빈은 그것을 요리의 태도에서 보여줬다. “난 내가 요리했던 모든 식사를 기억해요. 내가 서빙 했던 모든 사람을 기억해요.” 이는 곧 로빈이 다른 사람(존재)들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두 달 동안 견습 요리사였던 데릭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고, 그것을 기억한다.

 

이것이 공동체의 공동 전제, 즉 윤리를 구성한다. 이것은 공리주의 (이익)도 아니고, 보편적 규범주의 (의무론)도 아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관심과 배려의 문제다.

로빈은 다른 사람(존재)들을 익명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가 요리할 때는 반드시 특정한 ~를 위한 요리였다.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각각의 <>에게 맞춰 요리를 제공(afford)했다. 아미르 부모가 너무 행복해했고 그 저녁을 두고두고 이야기한 이유일 것이다.

 

어포던스 (affordance)

 

상대에 따라(맞춰) 제공한다는 것은 어포던스와 대칭적이다. 생태심리학 용어로 어포던스는 대상이 제공하는 행동 유발성을 말한다. 평평한 바위를 보면 앉고 싶다, 라고 생각한다기보다, 이미 앉아 있다. 어포던스는 직접적인 감각이다. 또 어포던스는 대상에 따른다. 대상을 컨트롤하지 않고, 대상에 융합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 상궁이 장금에게 처음 가르친 것은 물 한 그릇을 떠오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어떤 물을 제공할지는 상대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 요리를 통한 소통은 여기서 출발한다. 요리의 관점에서 어포던스는 상대에 대한 배려다. 상대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감각이다. 이것은 미메시스와 같이 중동태적이다. 상대에 따라(=수동) 제공(=능동)하니까.

 

로빈의 태도는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의 용어로 그는 타자성을 획득했다. 그는 타자의 시선을 자유자재로 취함으로써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됐다. 수많은 타인들과 소통한 경험을 축적해 어떤 사람 앞에서도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로빈의 카리스마는 이런 태도(다른 존재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감각, 어포던스)에서 비롯한다. 막스 베버는 인물에 잠재된 비일상적 능력과 자질을 카리스마라고 했다. 카리스마는 타인들이 자신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이고, ‘힘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이다. 미메시스 능력과 함께 간다. 또 미메시스의 연쇄는 공동체의 공동 전제, 윤리를 형성하는 힘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곳

 

로빈은 끝내 돼지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로빈은 과거에 마련한 홈베이스를 확인했다. 공통 감각, 공동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 사랑, 신뢰, 존경의 공동체. 현대 사회 속의 초월계. 이곳은 언젠가 로빈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현대인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로빈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되는 이유다.

 

결말부 로빈은 아미르에게 손을 내민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새로운 약속을 맺었다. 또 다른 인연의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아미르는 또 다른 아버지를 얻었고, 로빈 또한 정신적인 위안을 얻었다.

숲속 오두막에 돌아온 로빈은 아내 로리가 남긴 카세트테이프를 듣는다. 도입부 로빈이 주저하던 모습과 대조된다. 이제는 로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치유됐다는 뜻이다. 노래 소리와 함께 공통 감각의 기억이 이어진다. 로빈은 돼지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눈을 들어 하늘 쪽을 쳐다본다.

 

영화 <피그>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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