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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드라이브 마이 카> - 강하게 사는 약자들2022-01-14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이미지

 

12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 강하게 사는 약자들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일상계 / 비일상계를 대비한다. 일상에서 만족하는 남자가 있다. 반면, 여기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어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떠도는 여자가 있다. 가후쿠는 일상계 (=내재계)에 속하고, 그의 아내와 미사키의 엄마는 비일상계 (=초월계)에 속한다. 비일상계 인물들은 끝내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영화는 그들을 떠나보낸 가후쿠와 미사키가 일상계에 남아, 이 현실을 견디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강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에 담긴 자궁 회귀적문제 틀을 넘어선다. 하루키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특징으로 주인공 남자에게 여자가 사라진다는 설정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 태엽을 감는 새의 연대기, 버닝이 대표적인 사례다. 남자가 여자의 부재를 계기로 자신과 마주한다. 감독은 이 영화 또한 그런 설정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남자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 인생을 다시 세울까. 그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운동이다(코단샤 講談社와 인터뷰, 08/24/2021).

 

책 <여자 없는 남자들> 이미지

△ 무라카미 하루키 - 여자 없는 남자들 (출처: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

 

 

모성의 디스토피아

 

일본 문화평론가인 우노 츠네히로의 관점을 빌리면, 하루키 소설의 /설정은 모성/부성으로 치환될 수 있다(모성의 디스토피아, 宇野常寛, 2018). 여기서 모성은 어머니 같은 여자’, ‘어머니로 기능하는 아내를 말한다. 또 부성은 이 모성=여자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가짜 부성=남자를 말한다. 이때 하루키 소설에서 남자가 여자의 부재를 계기로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은 모성=여자의 보호를 받던 가짜 부성=남자가 그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 자립을 모색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 소설에서 이처럼 남성을 갱신한다는 문제의식이 어떻게 해결될는지 아직은 안개 속이다. 하루키는 <은하철도 999>(1977~1981)처럼 어머니=여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독한 남자가 여행을 한다는 모티브, 무력한 남자를 여자가 뒤에서 돕는다는 모티브를 거듭한다. 말하자면 떠남, 고독, 자궁회귀(추구) 요소를 반복하는 가운데 새로운 남성의 형상화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2014)의 주인공 또한 친구가 없는 인물이고, 자궁회귀 (=퇴행) 성격을 보여준다.

 

미사키: 가후쿠 씨는 왜 친구를 안 만들죠?

가후쿠: 듣고 보니 옛날부터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네.

 

영화는 아내의 애인인 다카츠기가 먼저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선 그 반대다. “내가 그 사람[다카츠키]과 친구가 된 건 아내가 죽고 조금 지난 뒤였어.” “실은 그자를 어떻게든 혼내줄 생각이었어.” 이처럼 주인공은 복수를 하려고 다카츠키에게 접근한다. 그러다가 차츰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바로 그 이유에서 주인공은 그 사람과 연락을 끊는다. ‘그자와 친구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미사키 =모성’, ‘자동차 = 자궁의 모티브를 보여준다.

 

잠깐 잘게.” 가후쿠는 말했다.

미사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했다.

 

친밀 공간’ + α

 

물론 영화 속 자동차도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도입부 침실 대화가 자동차에서 이어진다는 사실로 표현된다. 또 주인공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로 2년 동안이나 자동차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아내 오토의 소리를 듣는다(오토 =소리 =). 그런데 이 친밀 공간에 미사키와 다카츠키가 들어온다.

원작 소설에는 다카츠키가 이 자동차를 탄 적이 없고, 그와 나눈 대화는 모두 가후쿠의 회상으로 들려준다. 반면 영화에는 그가 자동차에 들어온다. 여기서 대화를 통해 그와 주인공, 미사키와 주인공 사이에는 각성의 연쇄가 일어나고, 이들은 한 단계 성숙한 관계로 진입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자동차는 주인공의 친밀 공간을 넘어, 인물들이 함께 동조. 변화. 공진하는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주인공이 미사키의 운전을 평가할 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차 안이란 걸 잊을 때도 있어요.이렇게 편한 건 처음이에요.”

 

자궁회귀적인 면이 있다. 즉 엄마 품처럼 편안하다는 뉘앙스가 있다. 그럼에도, ‘중력이란 단어는 하마구치 감독의 앞선 영화 <해피 아워>(2015)를 떠올리게 한다. 도입부의 무게중심에 관한 워크숍 말이다. 강사는 의자를 기우뚱하게 세우는 묘기를 보여주며,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바로 무게중심선을 찾은 순간이라고 했다.

중심선(重心線)을 찾는다는 것은 지축과 일치하는 선을 찾고, 지구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 사물, 신체는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 것은 곧 생명 (=)을 표현한다. 영화는 이것을 언어적, 심리적 표현을 넘어 물질적, 신체적으로 표현했다. 워크숍은 곧이어 여러 사람들이 등을 맞대고, 새 중심선을 찾아내어 함께 일어나는 과제를 수행한다. 여기서 무게중심은 그야말로 상호 동조. 변화. 공진, 공생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해피 아워>는 인물들이 공생의 중심선을 찾아가는 소통, 인식, 각성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가후쿠의 말(“중력이 느껴지지 않아요”)도 이런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미사키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한 사람의 자폐적 공간’, 즉 주인공이 2년 동안 오토 =소리에 사로잡혀 있던 공간을 넘어, 새로운 공존의 공간으로 생성하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의식의 재설정

 

이처럼 영화는 하루키의 문제 틀을 바꿨다. 하루키 소설은 (정신적으로 자립한 현대적)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자의식을 가진 남자와, 그의 정신적 의존 대상으로서 어머니 =아내여자의 구도에서 벗어나려 하는 남성의 갱신을 고민했다. 반면 영화는 친구가 없는 주인공의 /’, ‘모성/부성의 구도를 넘어 동료들의 동조, 공진, 생성으로 발전한다.

 

가후쿠: 당신 아버지였다면 어깨를 안고 말해주고 싶어.

네 탓이 아니야” “넌 잘못한 게 없어라고.

하지만 말 못하겠어.

넌 엄마를 죽이고, 난 아내를 죽였어

 

가후쿠는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신 미사키와 함께 나이와 성별을 넘어 동료가 된다. ()하루키, (가짜)부성의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 ‘(가짜) 부성 / 모성동료 ]

 

결말부 홋카이도의 눈밭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같은 쪽을 바라본다. 또 연극 무대에서 소냐 (=유나)는 바냐 (=가후쿠)를 뒤에서 껴안고, 같은 쪽을 바라본다. 체호프의 원작 희곡과 다르다(원작에서 소냐는 책상에 앉았고, 바냐 아저씨는 일어나 소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같은 신체의 겹침과 방향 표현은 동료 의식을 표현한다.

동료는 쌍방향 관계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관계가 아니다. 달리 말해 동료는 상황에 따라 역할이 전환되고, 뒤섞일 수 있다. 영화 속 현실에서 미사키는 가후쿠를 독려하는 (연극 속) 소냐 역할을 한다. 한편 눈밭 대화에서 가후쿠는 또한 미사키를 격려하는 소냐 역할을 한다(“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이 같은 동료 관계 (상호 역할 전환)는 현실과 연극의 뒤섞임을 통해 배치된다.

 

영화는 동료 관계의 생성의 한 계기로 도움을 제시한다. 가후쿠는 연극 연출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유나를 돕고, 다카츠기를 도왔다. 무용수였던 유나는 아이를 유산한 상실감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가후쿠의 언어 훈련으로 신체의 움직임을 회복했다고 말한다(아이를 잃었다는 계기에서 유나와 오토는 의미론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고, 이들은 또한 바냐=가후쿠를 격려하는 소냐 역할을 한다. 오토 =소냐의 계기는 나중에 보겠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유나 집에서 식사를 하며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카세트에서 <바냐 아저씨>, 엘레나의 대사가 들린다. “바냐 씨이 세상이 멸망하는 건, 악당[이나 화재] 때문이 아니라.자막은 여기까지이지만, 그 뒤의 대사는 이렇다.

 

엘레나: 증오, 적대감 같은 하찮은 일 때문에 멸망해요.

그러니 당신도 모두를 화해시키는 일을 해 보는 게 어때요?

 

그러니까 가후쿠는 엘레나 = 오토의 제안대로, 자신도 모르게 연극 연출을 통해 유나를 돕고, 다카츠기를 돕고 모두를 화해시키는 일을 한 셈이다. 이들이 가후쿠의 동료가 된 이유다. 영화는 이처럼 가후쿠가 칭찬 (미사키의 운전, 배우들의 연기)과 돕기, 말하자면 스스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을 통해 동료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눈밭 비탈에서 가후쿠가 미사키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려주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이런 과정에 가후쿠는 또한 이들의 도움과 영향을 받고, 자신도 바뀐다. 상호 생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메마른 현실을 동료들과 함께, 상호 생성하며 살아간다. 이 관점에서 엔딩 장면이 인상적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자동차로 유나의 강아지(또는 꼭 닮은 강아지)와 함께 한국 도로를 달린다. 이 요소들은 동료들과 함께하는 공통 감각공통 기억을 말하고, 이에 대한 미사키의 동조를 말한다.

또 미사키 얼굴에는 흉터가 사라졌다. 그녀가 자학(자기처벌)적 태도에서 벗어났고, 가후쿠 또한 자동차를 선물하며 자폐적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사키는 과거에 자신을 위해 차를 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차를 몬다. 이 점에서 엔딩은 영화 제목과 같다. 드라이브 마이. 자신의 삶을 산다는 의미다.

 

하루키의 리얼리티’ (현실감)

 

영화는 이처럼 주인공과 동료들이 일상계,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의 감각은 하루키 소설과 꽤 다르다. 하루키 소설의 현실(또는 현실에 대한 감각’)은 얇고, 약하다. 이는 곧 현실 / 비현실의 경계가 얇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희박해지는 현실>에서 부유하는 퇴행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 감수성과 함께하는 것이 찾는다는모티브다. 주인공이 뭔가를 찾아 떠나고, 어떤 일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가후쿠는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잤는지 알려고 다카츠기에게 접근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내 이유 찾기에 실패한다. 이로써 현실()은 더 희박해진다.

 

이런 정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 사회에 나타난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 하루키는 1979년부터 창작을 시작했고, 이 시기는 사회학자 미타 무네스케’ (見田宗介)가 말하는 이상과 꿈의 시대에서 허구시대로의 전환 에 조응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현실감은 헤이세이 (1989~2019)를 거치며 허무주의성격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1989년 버블 붕괴,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과 옴 진리교사건,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헤이세이 시대에 일어났다.

 

하루키는 옴 진리교 사건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르포 언더그라운드(1997)를 펴낸다. 그는 이 사태를 빚어낸 <현실()의 희박화>에 맞서 진정한 이야기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뒤로도 현실감은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다. 쇼와 후반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1983, 1990)과 마찬가지로 헤이세이 후반의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2014)에서 현실감은 여전히 얇다. 영화 오프닝에서 얼굴이 식별되지 않는 여자, 어스름한 창밖 하늘빛, 그리고 여자가 트랜스상태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하루키적 리얼리티의 희박함에 상응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또 다른 관점에서 현실감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 실마리는 바로 정동(情動, affect)에 있다. 미사키가 태어나고 성장한 헤이세이 시대는 요시미 슌야’(吉見俊哉)의 말처럼 현실의 위기가 심화되는 한편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 미야다이 신지의 말처럼 <감정의 열화 (劣化 =침체)>가 깊어진 시기다. 미사키의 무덤덤하고, 무표정한 얼굴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 같은 인물들의 정동을 되살리며, 현실()의 재건을 시도한다.

 

이 관점에서 영화가 원작 소설에 포함된 안톤 체호프’ (1860~1904) 연극의 모티브를 극대화하는 것은 적절하고, 흥미롭다. 체호프 연극은 감정의 열화를 극복하고, 니힐리즘에 맞선다는 문제의식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감정의 열화를 잘 보여주는 인물은 아스트로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이미지

 

 

체호프 연극

 

아스트로프: 감정이 둔해졌어요.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아.

 

아스트로프의 상태는 일반적인 니힐리즘과 조금 다르다. 이 성격을 멜랑콜리라고 불러보자. 대체로 니힐리즘은 욕망의 좌절에서 온다. 반면 멜랑콜리는 욕망 자체가 활성화되지 않는 상태다. 니힐리즘은 어떤 의미를 추구했으나 좌절하고, 그 결과로 <의미의 무의미화’ (=‘의미 없음’)>를 주장한다. 이에 비해 멜랑콜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의미 자체를 발견하지 못하는 <의미의 무발견> 상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요 인물들은 아스트로프와 비슷한 감정의 열화’, 멜랑콜리 상태에 있다.

 

다카츠키: 나는 텅 비었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유나는 아이를 유산으로 잃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복귀하고 싶다 생각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죠”). 또 오토는 자신을 해초 (=식물) 같은 칠성장어로 비유한다(“그저 흔들거리고 있던 것만 기억나”). 그런데 영화는 오토의 무기력함에 대해 가후쿠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가후쿠의 무기력함이 오토를 지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 ‘가후쿠의 감정 열화오토의 감정 열화’, 외도 ]

 

당시 가후쿠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화는 가후쿠가 그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 문제를 <바냐 아저씨> 대사를 통해 전달한다. 바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욕망의 좌절에 따른 의미의 무의미화를 드러낸다. 니힐리스트 태도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책임이 바냐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가후쿠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이 대사를 듣는다. 그가 집으로 되돌아와 아내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아내의 외도에 대해 가후쿠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바냐: 아무도 내 기분을 몰라요. 울화가 치밀고 분통 터져 밤에도 잠을 못 자요.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요. 바라는 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안 되겠네요.

 

보이니츠카야 : 넌 옛날의 신념을 원망하는 것 같구나.

하지만 나쁜 건 신념이 아냐. 나쁜 건 너 자신이야.

 

체호프 작품은 니힐리즘과 대결한다. 확실히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니힐리즘(또는 멜랑콜리) 분위기는 현재 일본 사회의 감정 침체분위기와 통하는 면이 있다. <바냐 아저씨>는 니힐리즘의 극복을 위해 믿음을 제안한다.

 

정동의 재발견

 

결말부 세레브라코프 교수는 작별 인사에서 사람들에게 일을 하라고 당부하고, 바냐와 소냐는 또한 실의에서 벗어나 일할 것을 다짐한다(“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도록 해요”). 기원후 3세기에 사막의 수도자들은 한낮의 악령 나태’(acedia)의 위험을 경고했다. 여기서 나태는 단순히 게으름이 아니라, 유약하고 동기가 결여된 상태다. 무엇보다 선()과 자신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다. ‘아카데이아의 그리스어 어원은 a (=없음) + keidos (=care =보살핌)로 분석된다. 말하자면 감정의 열화’, 멜랑콜리에 상응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나태의 치료제로 처방된 방법은 육체노동이었다.

 

육체노동은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공통 감각, 공통 기억, 그리고 정동을 활성화한다. 영화는 체호프의 처방에서 신체, 곧 정동이란 계기를 가져온다. 이처럼 하마구치 감독은 하루키적 <현실()의 희박화>에서 벗어나는 처방으로 신체적 정동을 통해, <정동의 리얼>로 현실()을 재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성의 근거라는 관점에서 하루키 소설은 [ ‘이유 있음’ =‘현실’ / ‘이유 없음’ =‘공허한 현실’ ]의 대립 구조로 볼 수 있다. 반면 영화는 현실의 근거를 이유가 아닌 정동에서 찾는다. 정동은 그야말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하지만 정동은 신체적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속이 후련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소름과 같은 말은 정동의 표현이다.

정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직접적인 느낌>이다. 정동은 언어의 기반이며, 언어 이전의 무엇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감정(emotion)이나 정서(affection)와 다르다. 영화는 정동을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지금 뭔가가 일어났어.” -가후쿠 (소냐와 엘레나의 연기에 대해)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연습에 중요한 건 그런 거 아닌가요?” -유나

 

너무 세세해서 전해지지 않는

두 분 다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해요.” -다카츠키

 

정동의 관점에서 가후쿠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가후쿠는 감정의 열화 상태에 있었고, 그 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정동의 리얼을 회복하고, 그 결과로 현실()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가 정동의 리얼을 회복하는 과정은 곧 동료들의 상호 생성 과정이고, 그런 가운데 그는 진실을 대면할 수 있을 만큼 용기를 얻고, 강해진다.

결말부 주인공은 미사키에게 과거의 자신이 강하지 못했다는 사실(=‘감정 열화’)과 함께, 그것이 비극의 원인이었음을 자각, 인정, 고백한다. 다카츠키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만큼 주인공은 강해지고, 현실감을 회복한 것이다.

 

만나면 화를 내고 싶어

책망하고 싶어

나에게 계속 거짓말한 걸

 

사과하고 싶어

내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걸

내가 강하지 못했던 걸

 

정동과 신체

 

앞서 말한 것처럼 정동은 신체적이다. 따라서 단순히 우울한 상태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의 공허함’(파스칼), ‘존재한다는 것 자체의 피로감’(레비나스)에 젖은 사람은 신체 또한 공허한 상태에 있다. 그 신체는 감응하지 않고, 아무런 욕망이 생성되지 않는다. 이런 신체를 유지하는 것이 피로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오토의 외도는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지확인하는 과정이었을 수 있다. ‘해초로 변해가는 칠성장어처럼 아무것에도 감응하지 않는 신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되살려보려는 시도였다는 말이다.

또 그녀가 가후쿠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다면, 또는 미사키의 말처럼 가령 그것이 연기였대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녀가 신체성을 확인하고 되살리는 시도는 가후쿠를 향한 것이었고, 결혼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오토는 아이러니하게도 가후쿠=바냐의 삶을 격려하는 소냐 역할을 한 것이다.

 

정동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는 [ 신체 정동 의미 ]의 순서로 구성된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신체, 정동이 반응하는 게 아니라 신체, 정동이 반응하기 때문에 의미가 생긴다는 말이다. 감정 열화와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먼저 신체성과 정동을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다.

그럼, 어떻게 활성화할 건가. 흥미롭게도 영화는 인간관계와 언어를 통해 정동을 살리는 길을 보여준다. 그런데 언어 이전의 정동을 언어를 통해 살린다고? 문제는 언어의 사용법에 달렸다. 언어를 물질적, 신체적으로 사용할 때 언어는 정동을 살릴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그 가능성을 자동차 운전과 연극 연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자동차 운전을 일종의 언어활동으로 그린다. 미사키의 절제된 운전은 그녀의 절제된 감정 표현과 언어 사용에 조응한다. 또 미사키의 운전 방식은 그녀의 성장 과정을 반영한다. 실제 자동차 운전의 습득은 신체 기억이란 점에서 언어와 유사하다. 그리고 미사키의 운전과 가후쿠의 승차감은 말하기 / 듣기의 관계로 발전한다. 가후쿠가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하는 습관 (‘말하기 / 듣기’)을 대체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지는 계기는 미사키가 다카츠키의 말을 평가하면서부터다(“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이때부터 미사키는 가후쿠의 삶에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그 뒤로는 가후쿠가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가후쿠가 이때 운전석 옆자리인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좌석 배치에 상응한다는 말이다.

 

영화는 가후쿠의 좌석 변화를 관계 변화와 병치한다. ‘조수석 뒷자리운전석 뒷자리조수석. 이것은 감시 신뢰 동료의 관계와 정동의 변화에 상응한다. 그런데 가후쿠가 조수석에 앉게 된 것은 그날 우연하게도 다카츠키가 차에 탔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는 물리적 관계 (=‘좌석 배치’ =‘신체 관계’)가 인간관계를 역으로 규정하는 현상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 물리적 관계 인간관계 정동 ]의 역()규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역규정은 언어 사용에서도 일어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이미지

 

언어의 신체성

 

수화는 신체와 언어의 사이에 있는 신체언어다. 이처럼 신체와 결합되어 정동과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수화는 때론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표현한다. 엔딩 장면, 유나=소냐의 수화는 가후쿠=바냐가 오토(), 즉 언어의 결박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나 집에서 가후쿠가 미사키의 운전을 칭찬하자 미사키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아지에게 다가간다. 이 말없는 동물과의 말없는 대화는 아무런 대사 없이 미사키의 마음을 표현하며, 주변을 따뜻하고 흐뭇한 분위기로 감싼다. 정동의 연쇄가 일어난 것이다.

 

한편 유나는 언어의 역규정을 이야기한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이것은 언어의 물질성이 정동을 촉발하고, 변화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실제 감독의 연출 방식과 연결된다. 이른바 하마구치 메소드. 연극계에서는 이탈리아식 읽기(연습)’라고 부르는 방법이다.

핵심은 공연(촬영)에 앞서 중립적으로 대사 읽기를 반복 연습하는 것이다. ‘중립적이란 말은 전화번호부를 읽듯’(장 르느와르) 선입견, 해석, 감정을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대사를 읽는다는 것은 대사를 읽으며, 그와 동시에 대사를 듣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중립화 (=최소화)하고, 타자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립적인 읽기란 것은 읽기의 능동성과 듣기의 수동성이 함께하는 중동태적 읽기다.

 

중립적 읽기는 기존의 언어를 낯설게 만든다. 천천히, 또박또박 읽으면 모국어조차 낯설어진다. 말이 겉도는 느낌이다. 언어가 불투명한 이물질처럼 현실 위에 떠있다. 이때 언어는 물질이 된다. 물질이 된다는 것은 언어의 경우 단순히 소리가 된다는 말이다. 소리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언어란 것은 소리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립적 읽기는 그동안의 언어 사용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망각하고 있던 언어의 본모습, ‘언어 그 자체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 그 자체란 것은 언어의 용법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의 언어다. 용법을 바꿀 가능성이 열려 있고, 무엇으로 성장할지 모르는 상태다(‘지바 마사야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기관 없는 언어로 부른다. 공부의 철학1). 그러므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한 언어 사용법에서 다른 언어 사용법으로, 한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중립적인 읽기는 이처럼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던 자아를 중립화 (=최소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언어(사용)에 감응할 수 있게 만든다. 찻잔에 새로 차를 따르려면 잔을 비워야 하는 것처럼. 물론 자아는 백지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고유한 기억과 신체가 있으니까. 따라서 중립적인 읽기를 거친 배우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는 틈새에서 자신의 기억과 신체를 투입해, 자신의 색채가 더해진,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 ‘타자의 목소리 듣기감응 자신의 목소리 내기’ ]

 

중립적인 읽기는 연출가의 역할을 낮추고, 배우의 역할을 높인다(가후쿠는 연출 지시를 해달라는 배우의 요청을 거부한다). 프랑스 연극계에서 이탈리아식 연습을 잘 활용한 연출가는 장 빌라르. 그는 배우들과 함께 한 연극 대본을 4시간씩, 40~50회 연습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한 달 반 연습, 2주일 공연이라는 일정과 같다.

장 빌라르의 연출법을 영화에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장 르느와르의 <배우 연출법> (La direction d'acteur, 1968)은 또한 흡수 방출을 이야기한다. 배우가 자신을 이완(중성화)하고, ‘무지와 의심을 참고, 대사를 흡수한 다음, 스스로 새로운 것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르느와르는 목소리에 반짝임이 분출한다고 표현했다. 이 반짝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동이다. 가후쿠는 이 상황을 지금 뭔가가 일어났어.”라고 표현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이미지

 

 

정동의 리얼회복

 

가후쿠는 다카츠기에 말한다. “자신을 바쳐 대본에 대답해. 대본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어. 그걸 듣고 응답하면, 자네에게도 그게 일어나.” 이에 대해 다카츠키는 난 텅 비었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답한다. 스스로 감정의 열화 상태에 있고, 니힐리스트의 무력감에 빠졌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일어난다. 영화는 자동차 안에서 다카츠키가 진실을 고백하고 나자 가후쿠와 다카츠기, 또 가후쿠와 미사키 사이에서 뭔가가 연쇄 발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곧 정동의 연쇄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미메시스로 부른 것이다. 이 미메시스는 거리를 유지한 관조적인 모방이 아니라, 현전(presence)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정동적 감염이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자동차 지붕 위로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을 치켜든다.

 

정동의 연쇄반응은 다카츠키의 바냐 연기에서 분출된다. 곧이어 찾아온 경찰에게 다카츠키가 폭행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은 오토의 이야기에 감염된 결과다. “내가 죽였어.” 이로써 다카츠키가 나름대로 현실()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토의 이야기에서 사람이 살인을 했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현실이 이상한 것이다. <바냐 아저씨>에서 총을 쏘고 난 뒤 바냐의 대사도 비슷하다. “이상해. 살인미수인데도 체포하지도 않고, 재판에 넘기지도 않다니.” 이에 대해 내가 죽였어.”라고 말하는 것은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리얼리티의 희박화에 맞서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을 향한 정동의 표출이다.

 

이것은 또한 가후쿠와 미사키에게도 전염된다. 다카츠키가 오토의 이야기와 가후쿠의 연출을 통해 현실()을 회복하고, 그 결과가 가후쿠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동료들의 상호 생성과 정동의 연쇄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현실, 진실을 대면한다.

 

진실, 사실, 연기

 

미사키는 진실, 사실, 연기의 동일성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차 안에서 다카츠키의 말에 대해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있어 사실을 얘기했어요.”라고 평가한다. 또 홋카이도의 사고 현장을 찾아가서는 엄마의 다른 인격을 말하며 가령 그것이 연기였대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말에서 진실, 사실, 연기는 분리되기 어렵다. 만약 상대의 말이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또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연기라면 그것을 진실과 같은 것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미다(이 생각은 감독의 연기철학일 듯하다. 연기는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 사실을 전달해야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말이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내면에서 끌어내는 방법이 하마구치 메소드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미사키 엄마와 오토가 겹친다. 오토가 가후쿠를 사랑한다는 말의 진실성. 그리고 엄마가 다른 인격인 사치가 되는 것이 지옥 같은 현실을 살아나갈 방도였다면 오토의 외도 또한 그랬을 수 있다(‘사치행복의 옛말 雅語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말처럼 우리는 각자 <의미의 장>에서 살아간다. ‘의미의 장은 각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단 하나의 의미의 장이 특권적으로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의미의 장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전체성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무수한 의미의 장이 있을 뿐이다.

가브리엘의 생각은 분명 구원의 확실함을 주지 못하지만, 절망의 절대성도 주지 않는다. 각자의 진실을 인정하고, 끝없는 의미의 장의 이동을 향유하는 삶도 꽤 괜찮지 않을까. 또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이동을 즐기며,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현대의 실존하는 자들이 살아나갈 방도가 아닐까.

 

이 관점에서 다언어 연극을 생각할 수 있다. 영화에서 다언어 연극은 무엇보다도 정동의 중요함을 확인시켜준다. 언어가 달라도 소통이 일어난다는 것, 또 언어를 넘어서는 소통의 기반으로서 정동의 중요함을 말한다.

다언어 연극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의 만남이다. 언어가 낯설게 다가오고, 물질성 (=‘소리의 덩어리’)으로, ‘언어 그 자체로다가온다. 말하자면 연극이 중립적인 읽기같은 경험을 주는 것이다. 이로써 배우와 관객은 모국어로 경험할 수 없는 정동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 만남에서는 서로를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차이를 향유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각자의 사정 (=환경, 세계), 각자의 진실을 존중, 향유하는 기회 말이다. 이것은 모국어로는, 또는 각자의 닫힌 의미의 장에선 경험할 수 없는 기회다. 여기서 영화는 다언어 연극이 우리의 현실 세계란 걸 보여준다. 각자의 언어 사용’ (=‘의미의 장’)에 익숙해졌기에 자각하지 못하던 세계의 실상을 대면하게 한다. 다언어 연극은 곧 이란 뜻이다.

 

강하게 산다는 것

 

가후쿠 부부가 녹내장의 치료법을 묻자 의사는 녹내장 원인은 아직 불명이라, 완치는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이것은 존재 불안을 완전히 없애주는 대답이 아니지만, 완전히 절망적인 대답도 아니다. “진행을 늦추는안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은 이유를 찾지 못하는 현실의 공허함에 절망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프랑스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에 가깝다. 메이야수는 세계의 근본적인 <우연성>, 근본적인 <이유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비관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우연하고, 이유가 없다는 말은 곧 오늘의 세계가 내일은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미리 정해진 것은 근본적으로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존재 불안을 완전히 없애주는 초월성과 절대적인 높이를 동경한 나머지 비일상계 (=초월계)로 떠나버린 인물들을 그리는 한편, 이들에 대비되는 일상계 (=내재계) 인물들을 응원한다. 영화는 구원과 절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일상계에서 작은 희망을 지니며, 당면한 의미의 장과 다가올 의미의 장으로의 이동을 동료와 함께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불확실함 (불투명)을 견디며 사는 것이다. ‘망자를 안고 산다는 가후쿠의 말처럼. 궁극적인 원인, 이유를 괄호 속에 넣고 의미의 장을 이동, 향유하는 것이다. 사실 허용할 수 있는 경험허용할 수 없는 경험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같은 사람에게도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다. 완전한 고통도, 완전한 쾌락도 없다. 인생은 긍정/부정’, ‘고통/쾌락의 섞임이고, 이들이 복잡하게 섞여가는 과정이다. 이 복잡함을 살아가는 것이 강하게 사는 것이다. 또 각자 그 복잡함의 균형을 찾아 가는 과정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드라이브 <마이> 라고 생각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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