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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아네트> - 심연을 보다2021-11-17
아네트 스틸 이미지

 

 

10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아네트> : 심연을 보다

 

 

  <아네트>(Annette, 2021)는 한 예술가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의 예술과 삶을 그렸다. 영화에서 비극은 남녀의 애정과 파국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필자는 이 바탕에 세계관의 충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충돌을 말하는데, 이른바 디오니소스 / 아폴로의 대립으로 부를 수 있다.

 

  스탠딩코미디언인 헨리는 사회 규범, 제한을 거침없이 넘어서고, 인간의 어두운 욕망, 그리고 혼돈과 도취에 이끌리는 야생적인예술가다(헨리는 원숭이와 동일시된다), 반면 오페라가수인 앤은 한도를 지키고, 자기통제를 보이며, 아름다운 형상을 구현하는 문명적인예술가다. 이 관점에서 필자는 두 인물의 갈등을 단지 잘난 아내에 대한 못난 남편의 질투나 고급예술에 대한 하급예술의 질투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의 대립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데, 필자는 무엇보다도 <독일 낭만주의>를 중심에 놓고 싶다. 이때 디오니소스 / 아폴로초기 낭만주의’ / ‘후기 낭만주의’, ‘니체 / 바그너로 확장될 수 있다.

 

  니체에 앞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깊은 곳에서 디오니소스적인 흐름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료된 것은 1800년 무렵 낭만주의자들이었다. 낭만주의는 초기에서 후기까지, 또 니체에서 바그너까지 모두 디오니소스의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는 매우 다르다. 그리고 니체는 전자에 가깝고, 바그너는 후자에 가깝다.

  1870년 경 디오니소스 / 아폴로의 대립 구도를 세우고, 바그너 예술에서 디오니소스 세계를 체험한 사람은 니체였다. 그러던 니체가 10여 년 뒤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바그너 예술이 아폴로 세계로 기울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디오니소스 / 아폴로’, ‘초기 낭만주의’ / ‘후기 낭만주의’, ‘니체 / 바그너가 연결된다.

 

 

구글이미지

  (니체 대 바그너 - 출처: 구글 이미지)

 

니체 대 바그너

 

  일반적으로 니체와 바그너의 대립은 바그너의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아름다운 혼란이 지배했던 초기 낭만주의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성동맹이라는 정치질서와 동일시되던 후기 낭만주의의 차이에 상응한다고 본다(뤼디거 자프란스키, 낭만주의, 2007, 14).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차이는 특정한 종교나 정치질서보다 세계관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무한한 것’, ‘완결될 수 없는 것’, 심연에 대한 태도다. 초기 낭만주의는 심연을 완전히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인간이 이를 수 없는 차원이 항상 남아 있고, 그 때문에 예술의 본질은 영원히 생성, 발전하여, 결코 완성되지 않는 것”(슐레겔)이라고 봤다. 그래서 영원한 동경, 방랑, 자기부정(갱신)이 낭만 예술의 기치였다. 반면 후기 낭만주의는 달랐다. 심연을 마치 눈앞에 놓인 사물 같이 접근 가능한 대상처럼 제시하려 했다. 그러면서 예술작품을 완결된 형상(체계)’처럼 제시하려 했다.

 

  바그너를 보자. 바그너는 삶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정치적으로는 좌절하지만 예술가로서는 명성이 절정에 올라, 자신의 예술이 사회 변혁의 실패를 보상, 대체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니벨룽겐의 반지>(1876)를 통해 관객들에게 종교적 개종과 맞먹는 인간 내부의 변화를 일으키려 한다. 그는 예술정신에 따라 구원된 현재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려 했다.

  마침내 <파르지팔>(1882)에서 예술체험은 성스러운 구원의 순간일 뿐 아니라, 종말 때 이뤄질 구원을 예시하고 약속해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종교가 된다. 또 바그너는 오페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신격화된다. 이것은 니체가 분노와 실망에 가득 차 바그너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여기서 니체 / 바그너헨리 / 과 겹쳐진다.

 

: 공연 잘했어?

헨리: 다 죽여줬지. 파괴하고 살해했어

: 잘했네

헨리: 당신 공연 gig?

: ... 관객들을 구해줬어 (“I saved them.”)

헨리: 당신은 참 장엄하게 죽어. 언제나 죽잖아

 

  헨리의 관점에서 앤의 예술은 잘못 가고 있었다. 앤은 바그너와 같이 종교적 구세주처럼, 또는 유능한 사업가처럼 말한다(‘관객들을 구해줬어’). 관객들과 앤의 사이에는 정확한 주고받음이 있다. 앤은 관객들이 바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 주문에 맞춰 공연을 공급한다(헨리의 말처럼 처음엔 죽고, 죽고, 또 죽고. 그리곤 인사하고, 인사하고, 인사하고”).

  앤의 자전적 노래는 그녀가 자기 완결적인 폐쇄 회로에 갇혔고, 예술이 정형화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여신이고, 스스로 만든 왕국에서 여왕이 됐다. 그 세계는 완결됐다. 심지어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여왕은 불나방이 될 필요가 없어”). 그녀는 거울 앞에서 노래한다(거울은 자기애, 자기폐쇄를 상징한다).

 

여신의 목소리를 가진 그 아이

그녀의 목소리는 왕국이 되었지

그곳에 있고 싶었어

그녀는 여왕이었고

 

 

아네트 스틸

 

 

당신 감각을 찾아주겠어.”

 

  이 관점에서 앤과 헨리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헨리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진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내 얘기는 딱히 안 궁금해? 앤 얘기는? 섹스는? 죽음은?” 하지만 앤의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하는 관객들 앞에서 헨리는 분노를 터뜨리고, 자폭한다.

  헨리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진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고, 이로써 자신의 정형화된 공연, 그 진부함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틀에 박힌 공연에 권태를 느끼고(“오늘 저녁 공연은 취소하는 건데”), 스스로의 틀에 도전한다. 이 도전은 관객의 감정 변화를 도발하고, 관객의 취향과 욕구를 바꾸려는 시도와 함께 진행된다. “내 공연의 컨셉은 원래부터 도발”(자막은 건방으로 옮겼지만, 직역하면 도발’ provocation이다).

 

  이처럼 헨리는 자기부정, 자기갱신을 시도한다는 면에서 초기 낭만주의 예술가에 가깝다. 나름대로 성실한 창작자의 길을 가려 한다. 문제는 그가 창조성의 벽 앞에서 멈춰있다는 점이다(“어젯밤에 집에 도둑이 들어서 내 농담을 다 털어 갔거든”). 또 헨리의 관점에서는 앤 또한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헨리는 앤과 함께 바다로 나간다. 창작의 돌파구를 찾고,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그야말로 질풍노도를 만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쇼 피플>(킹 비더, 1928)<아네트>의 연출에 중요했다는 감독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CG CINEMA와 인터뷰, 16/07/2021). <쇼 피플>에서 배우 지망생 페기 페퍼는 코미디 배우인 빌리 분의 소개로 코미디영화에 출연한다. 그녀는 진짜 감정을 담은 연기 때문에 인기를 얻고, 빌리와 연인이 된다. 어느 날 그녀는 드라마영화 제작사의 스카우트를 받는다. 그녀는 비련의 주인공연기로 성공한다. 그러나 상업적 연기에 물든다.

  관객들은 차츰 그녀의 정형화된 연기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페기는 문제점을 알지 못한다. 이때 빌리가 찾아와 이야기해준다. “당신은 성공하면서부터 일을 망쳤어.” “나를 위해 애원하지 않아. 당신 행복을 위한 거야.”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않는다). 그러자 빌리는 당신 감각을 찾아 주겠다.”고 말하며, 그녀 얼굴에 탄산수를 뿌린다. 예전에 함께 코미디영화를 제작할 때처럼.

 

  빌리와 페기의 갈등은 이렇듯 질투가 아닌 예술과 삶의 문제다. <아네트>의 갈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고급예술에 대한 하급예술의 질투가 핵심이 아니다. 헨리는 오페라와 스탠딩코미디를 대등한 공연예술로 여긴다(그는 오페라 공연을 기그 gig로 부른다). 성공한 아내에 대한 실패한 남편의 질투도 핵심이 아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성공가도를 달리고, 사랑 노래를 함께 부를 때에도 헨리는 앤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였다. 헨리는 일찍부터 앤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뜻이다. 또 헨리가 관객의 미움을 산 것은 스스로 공연을 망치며, 인기 하락을 자초한 결과다.

 

아네트 스틸이미지

 

 

  이 관점에서 헨리가 폭풍 속에서 앤에게 왈츠를 추자고 강요하는 장면은 빌리가 페기 얼굴에 탄산수를 뿌리는 장면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헨리 자신의 감각을 찾고, 앤의 감각을 찾아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 행동은 분명 폭력적이다. 또 미성숙함을 보여준다(앤은 그 미성숙함을 장난이란 말로 규정한다. “헨리, 장난 그만해! ... 안전해지면 그때 장난쳐”). 하지만 그 거친 행동에는 나름대로의 선의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비록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지만, 앤의 예술과 삶을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헨리를 열광시킨 질풍노도는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요소다.

 

초기 낭만주의 요소

 

 

  초기 낭만주의 멤버인 슐라이어마허는 요점을 말해준다. 낭만주의는 <유한한 것 속에서 무한한 것을 자각>하는 감수성이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는 <유한한 순간에 맛보는 무한의 경험>을 추구했다. 여기에는 분명 종교적 뉘앙스가 있다. <신성 강림>의 법열. 다만 낭만주의적 강림은 인격신이 아닌 무한, 전체, 절대, 영원, 초월의 강림이다(이때 유한 / 무한’, ‘부분 / 전체’, ‘상대 / 절대’, ‘순간 / 영원’, ‘내제 / 초월의 대립 쌍들은 서로 등가적이다).

 

  이런 뜻에서 낭만주의는 평범한 일상의 낭만화’(노발리스)를 요구한다. 하지만 주의하자. 이것은 예술이 세상에 헛된 가상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무한한 것은 이미 이 세상 속에 내재(=강림)해있다. 다만 인간들은 흔한 것, 알려진 것, 유한한 것에 사로잡혀 이것을 못 보고 있다. 그런 반면 예술은 느낌, 상상력, 꿈속에서 이 현실에 내재하는 무한성의 모습을 포착한다. 그것이 낭만화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일상 현실에서 정신을 해방시키려 하고, 상상력에 가장 높은 지위를 준다. 낭만주의는 현실 원칙을 넘어선다. “환상을 좇고 유희적이며, 비밀스런 것에 몰두한다. 통상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동경의 감정을 드러낸다(자프란스키, 같은 책, 서문). 이것이 초기 낭만주의, (진정한) 낭만주의의 모습이다.

  <아네트>의 헨리가 통상적인성공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 또 아이가 생기자 불안해하는 모습, 그리고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 그것은 안정, 안주를 두려워하고 동경과 방랑을 지향하는 낭만 예술가 성격에 상응한다. 반면, 안정적인 리무진을 타고, 완성된 예술로 관객들을 구해주는 앤은 후기 낭만 예술가 성격에 상응한다.

 

  초기 낭만주의는 무한을 느끼고 맛보는 경험이 결코 완전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완결될 수 없는, 불가능한 과제다. 낭만 예술이 동경과 방랑으로 가득하고, 준엄한 산세, 노도, 심연의 이미지에 몰입하는 이유다. 노도와 심연은 곧 무한의 <접근 불가능성>을 말한다. 헨리는 여기에 열광했다.

  반면 후기 낭만주의는 유한(내재,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한(초월, 전체)인 것처럼 제시한다. 가령 민족을 숭고한 전체성으로 승화시키고, 한 개인을 우상화, 신격화했다. 나치즘이 바그너를 악용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뒤에 보겠지만, 헨리 또한 아네트를 기적의 현신으로 여기면서부터 후기 낭만주의의 유혹에 빠져든다).

 

  무한의 접근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낭만 예술은 무의식, , 광기에서 대안을 찾고, 작품의 서사 전개에서도 현실적인 인과성(개연성)을 넘어서는 우연, 기적, 마법을 불러낸다. <아네트>는 이런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앤의 방에 걸려있는 오페라 <살로메>(1920)의 공연 포스터는 프랑스 소프라노 쥬느비에브 빅스와 앤의 이미지가 겹치게 만든다. <살로메>에서 밤하늘의 달이 살로메와 동일시되며 극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면서도, ‘무덤에서 나온 여자처럼 죽음을 찾아 헤매는 여자를 상징한다는 모티브가 앤의 유령 이미지와 연결된다.

  (한편 <살로메>의 원작자인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 가운데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다면, 그들을 웃겨라. 안 그러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가 있다. <아네트>에서 헨리의 대사와 일치한다).

 

 

아네트 스틸

 

 

낫지 않는 상처

 

 

  헨리의 공연은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과 같이 코러스로 진행된다. 코러스는 관객과 소통을 촉진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헨리의 말과 행동은 차츰 초기 낭만 예술처럼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방적 표출’(=카타르시스 =배출, 배설)로 바뀐다. 이것은 앤의 오페라가 정확한 주고받음’, 의사소통적 표현으로 진행되는 것과 대비된다.

  일방적 표출에는 창의성과 실패의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헨리가 평범함, 습관적인 삶(공연)’을 거부하고 다른 세계’(=심연)를 지향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일방적이란 말은 헨리가 그 세계를 맛보고,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일방적 표출은 헨리 얼굴의 <얼룩>과 같은 의미다. 헨리가 뭔가 다른 세계를 느끼고 맛보았지만, ‘작품 구현’(=표현)에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룩은 곧 <상처>. 말하자면 다른 세계를 경험했지만, 자기 갱신, 창작(구현), 그리고 소통에 실패했다는 징표다. 그런 의미에서 얼룩은 낭만 예술의 영원한 동경과 방랑과 같은 의미 계열이다.

 

  인터뷰에서 감독은 헨리의 얼룩에 대해 이야기했다(CG CINEMA와 인터뷰, 같은 곳). 그 얼룩은 미국 낭만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 글씨(1850) 모티브가 아니냐는 질문에 감독은 같은 작가의 모반(The Birthmark, 1843)에 연관된다고 했다. 모반에서 얼룩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같고, 그것을 제거할 때 사람의 생명이 함께 사라진다.

 

  이것은 낭만 예술에서 낫지 않는 상처의 의미를 말해준다. 예술가에게 상처는 창작의 동력이 된다. 상처는 다른 세계를 체험한 징표다.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술의 목표는 관객들에게 낫지 않는 상처를 주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그 다른 세계를 체험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낫지 않는 상처를 경험한 사람은 원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예술의 불도장이 찍힌 사람은 이전과 똑같이 살 수 없다.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세계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헨리의 얼룩은 앤의 죽음, 피아노 반주자(지휘자)의 죽음에 따라 점점 더 커진다.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은 아네트 이마의 모반이 옅어지는 모습과 대조되면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헨리가 심연에 잡아먹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낭만주의가 말하듯 예술은 인간을 세속적인 세상에서 아름다운 곳으로 승천하게 만들지만, 예술로 인해 세상과 적대관계에 빠질 수 있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변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낭만주의 소설가 호프만은 스퀴데리 양(1819)에서 보석세공인 카르디악을 살인범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카르디악은 자신이 온갖 정성을 다해 완성한 장신구가 자격 없는사람들에게 착용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살인을 한다. 이와 비슷하게 헨리는 피아노 반주자가 아네트를 데려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바그너의 총체극

 

  니체와 바그너 이야기로 우회한다. 어떤 면에서는 니체 또한 예술 때문에 세상과 적대관계에 빠지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인간(특히 바그너)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뀐 면이 있다. 물론 초기 낭만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차이를 감안하면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니체의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비판이 곧잘 초점에서 벗어난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가령 니체가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계기로는 <오페라 문화> 자체에 대한 불만을 들 수 있다. 1876년 바이로이트에 도착한 니체는 바그너가 음악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는 곧 병을 얻었고, 며칠 뒤 그곳을 떠난다. 그는 바그너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각종 부대행사, 또 관객들의 번잡스러움, 말하자면 세속적인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그 전에 니체는 바이로이트에서는 관객도 볼만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참된 예술을 수용하고, 예술에 헌신하는 관객을 기대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관객이 상상 속에서만 있을 뿐이란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 아니, 오페라 문화 자체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니체는 당시 관객들이 공연 도중에 보여준 소란함, 또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한꺼번에 레스토랑으로 몰려가는 모습에서 경악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오페라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경계를 넘어가라. 하지만 현세에 충실하라.”> 이것은 니체가 스스로 말한 것이다. 니체는 어째서 그 요구를 (바그너) 오페라의 관찰에는 적용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극장과 관련한 문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펼치는 <축제극>을 생각했다. 반면 니체는 오페라에서 순수한 음악성과 주제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바그너가 음악가가 아닌 무대예술가나 건축가가 되려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런 관점에서는 바그너가 축제 예산을 마련하려고 속물적인 행동을 하거나 종교색을 띠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를 무대봉헌 기념축제로 불렀고, 다양한 연계행사를 마련했다). 또 니체의 시선으로는 <아네트> 도입부, 예술가들의 예산 타령(“예산이 많지만 이 정도론 부족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해 바그너는 17세기에 정립된 오페라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축제로서의 총체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이때 오페라극장은 하나의 세상이다. 독일 최초 오페라극장인 함부르크 극장의 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들어보자. 1688성 카탈리나교회 목사인 엘멘호르스트는 오페라를 지지하며 인간 삶의 참된 증거’(vera documenta vitae mortalium)로 규정했다. 오페라는 세계의 축소판이란 뜻이다.

  그 뒤에 루터교회 목사인 노이마이스터또한 오페라를 옹호하며, ‘교회 음악과 (세속) 오페라는 하나의 목소리라고 했다(그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모두 음악과 시의 예술’(=오페라)에 스며들고, 둘 다 이중적인 상승을 경험한다고 했다. 세상은 음악을 통해 영적으로 상승하고, 영적인 것은 세속적 음악을 통해 세상에 내려온다는 말이다).

 

  요컨대 이들이 오페라를 보는 시선은 <저속한 세상에서 거룩한 기적을 보는 태도>였다. 이것은 초기 낭만주의의 <평범한 일상의 낭만화>, <유한한 것 속에서 무한한 것을 자각>하고 <유한한 순간에 맛보는 무한의 경험>을 추구한 태도에 가깝다. 바그너의 총체예술은 이 태도를 발전시켰다. 바그너의 극장은 곧 세상이며, 낭만화(=신성강림)된 세상이다.

반면 니체의 관점은 동시대인 19세기 후반에 정립된 콘서트’, 순수한 음악연주개념에 상응하며, <저속함과 구별된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태도다. 여기서 오페라극장의 아우라(=신성강림)는 상실된다.

 

  공연예술 형식의 관점에서 오페라 영화인 <아네트>는 니체보다 바그너에 가깝다. 영화는 도시를 무대로 오페라극장 =세상을 구현한다. 저속한 요소(언어, 행위)를 도입하고, 4의 벽을 허물고 상호 시선을 유도하며,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아우른다. 가령 헨리와 앤이 성행위를 하며 사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니체로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 될 것이다.

 

  또 도시 공간을 (오페라)극장으로 만드는 오프닝에서 <아네트>는 그야말로 총체예술적이다. -마법화되고 메마른 도시를 재-마법화한다. 그리고 도시=극장에 아우라를 되찾아준다. 특히 파동으로 거리를 감싸는 장면은 [ 현실 극장화 낭만화 ]의 전개를 보여준다.

  이때 파동은 곧 호흡()이다. 그것은 오프닝의 파동 그래프가 병원에서 아네트가 태어날 때의 호흡 그래프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오프닝은 도시에 숨을 불어넣어 오페라극장으로 만드는 장면이다. 이로써 파동 ==노래 ==생명의 시각화가 이뤄진다.

 

아네트 스틸 이미지

 

 

 

아네트의 숭배

 

  이처럼 영화는 니체 =초기 낭만주의 = 디오니소스쪽으로 기우는 듯하면서도, 아폴로 쪽으로 옮겨온다. 앞서 아폴로는 한도, 자기통제, 아름다운 형상의 구현을 상징한다고 했다. 물론 예술만 고려한다면 아폴로의 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예술을 넘어 삶, 사회를 고려해야 할 때(가령 헨리가 사람을 해칠 때. 디오니소스의 예술이 원래 뜻과는 달리 삶을 죽이는 예술이 될 때) ‘디오니소스 / 아폴로의 대립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무한성’(=심연)의 세계를 알아차린 사람은 유한성의 사회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회는 디오니소스처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가. 이에 대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아네트의 탄생과 기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네트는 자동인형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것은 헨리와 앤이 아네트를 (자동)인형으로 여겼다는 의미로 보인다. 인간 주체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점은 헨리의 노래에서도 드러난다. “오늘밤 그녀가 노래하며 죽어가는 동안, 난 애를 보네 babysitting.” 카메라는 헨리가 말 그대로 아이를 깔고 앉은 모습을 비추고, <군중>(킹 비더, 1928)에서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비춘다. 웃지 못할 장면이다,

 

  ‘아네트작은 앤이란 뜻이다. 앤이 세상을 떠난 날부터 아네트는 앤의 목소리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이 모습에서 헨리는 앤의 유산이라기보다 신성강림의 기적을 본다. 아네트의 노래는 언어 이전의 황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예술이 아닌 초월계의 예술이 육화’(=구현)된 것처럼 보였다.

  헨리는 앤의 순회공연을 기획하고, 사람들은 아네트의 노래에 열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아이를 착취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가 바란 것은 착취보다 대리 만족이었다. 아네트는 그가 끝내 도달하지 못한 예술을 실현해주는 존재로 보였다.

 

  여기서 헨리는 잘못된 길로 빠져든다. 앞서 후기 낭만주의는 <유한(내재,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한(초월, 전체)인 것처럼> 제시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해 우상화(=물신화). 헨리는 바로 이런 잘못에 빠진다. 그는 아네트를 우상화한다. 대중들 또한 아네트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한다.

  대형 경기장에서 진행되는 하이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풋볼 선수들과 검은색 가운을 입은 소년 합창단은 그야말로 종교적 숭배의 분위기를 표현한다. 아네트에게 열광하는 이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하는 관객들이다. 앞서 이런 관객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던 헨리도 이제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됐다. 킹 비더의 <군중>처럼.

 

 

아네트의 각성

 

  하지만 아네트는 예술을 한 것이 아니다. 그 노래는 분명 아름답지만, 특정한 빛에 대한 조건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빛을 보면 자동적으로 노래한다는 의미에서 아네트는 자동기계다. 아빠의 감각과 엄마의 목소리(음악성)가 빚어낸 자동기계인 것이다.

  자동기계의 반대말은 자유의지다. 그리고 마르쿠제의 말처럼 자유의지는 거대한 거부’(Great Refusal)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아네트는 노래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드러낸다. 아네트는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대신 아빠의 범죄를 폭로한다(“아빠는 사람들을 죽여요”).

 

  마침내 교도소 면회 장면. 아마도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빠와 딸듀엣으로 기억될 장면에서 아네트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말을 노래로 부른다(이것은 <아네트> 영화 GV에서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밝히는 감독의 말처럼 역설적이다). 놀랍게도 아네트는 엄마도 거부한다.

 

내가 아빠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엄마를 용서할 수는 있을까?

엄마의 독을 맞고, 착취당하는 아이가 됐는데!...

둘 다 서로를 위해 날 이용했잖아...

둘 모두의 잘못이야. 둘 다 사라졌으면 좋았을 걸.”

 

  아네트는 부모가 물려준 예술적 재능을 으로 여긴다(“그 독은 한 사람의 심장과 한 사람의 영혼에서 나와”). 그러면서 부모의 예술적 유산(재능), 자신의 예술, 대중의 인기를 모두 거부한다. 아네트는 자동기계로 살기를 거부한다. 이때 아네트는 진정한 인간으로 바뀐다.

  여기서 감독의 생각은 분명하다. 인간은 자동기계로 살기를 거부할 때 진짜 인간이 된다. 이것은 예술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네트는 자동기계처럼 노래할 때가 아니라, 그 반대로 노래를 멈추고, 모든 종류의 압제를 거부할 때 진짜 예술을 했다. 거대한 거부는 그 자체로 예술적 행위란 말이다.

 

  아네트의 거부는 희망을 준다. 영화 제목이 <아네트>인 이유다. 이에 대해 감독은 아이들이 어른들을 제거할 때 진실이 드러난다.”고 했다(CG CINEMA와 인터뷰, 같은 곳). 이 대목에서 감독이 열네 살의 나이에 부모가 준 이름을 바꿨다는 사실. 20대 초에 2의 고다르로 칭송받고, “고다르의 피와 트뤼포의 피를 함께 느끼게”(하스미 시게이코)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감독 자신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말하자면 아네트의 거부는 감독의 예술적 결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경계를 넘어가라. 하지만 현세에 충실하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1886) 그러나 니체가 경고했던 바로 그 과정 속에서 헨리는 괴물이 됐다.

 

  엔딩 장면, 헨리의 노래는 에드거 앨런 포우가 지은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1838)에서 <심연의 동정(Sympathy)>이란 모티브와 가사를 가져왔다. 미국 낭만주의 작가인 포우는 니체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의 위험을 이야기한 것보다 50년 먼저 심연에 관한 상상력의 힘, 심연을 보고 싶은 욕망, 심연에 떨어지고 싶은 갈망, 죽음 충동을 이야기했다.

  헨리는 이 노래를 부르며, ‘변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해명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오히려 그가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결국은 심연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네트, 절대 저 아래 심연을 보면 안 돼.” 아네트의 등 뒤에서 헨리는 외친다. 앞서 말한 포우의 소설에는 “[심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발동했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른바 프레임 효과. 이 점에서 헨리의 말은 경고를 준다기보다, 내심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일 수 있다.

 

  그럼, 대체 심연은 뭔가. 어쩌면 텅 빈 기표일 수 있고, ‘맥거핀일 수 있다(맥거핀은 주변에 놓여 있는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구성 원리가 되는 것). 다만 <의사소통 가능한 전체>가 있고, 그것을 넘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한 전체>가 있다는 구분을 인정한다면, 심연은 두 세계의 사이에 갈라진 경계다(전자에는 세상 =유한 =부분 =상징계 =내재계 ’, 후자에는 무한 =실재계 =초월계가 대응한다).

 

  예술의 관점에서는 내재계의 삶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초월계적 유형이 이상적인 예술가의 모습에 가깝다(앞서 디오니소스 / 아폴로’, ‘초기 낭만주의 / 후기 낭만주의’, ‘니체 / 바그너의 대립 쌍으로 이야기했다). 반면 사회의 관점에서 초월계적 유형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것은 헨리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여기에는 감독의 자기반성이 포함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불교에는 우파사카(upāsaka =거사)란 개념이 있다. 초월계를 알고, 초월계에 더 가치를 두면서도, 내재계의 사람인 것처럼행동하고, 사회와 공존하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 개념은 니체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 <경계를 넘어가라. 하지만 현세에 충실하라.”> 니체의 말이지만, 니체 스스로는 지키지 못한 말이다. 헨리가 아네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아네트가 성숙한 모습, 다시 말해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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