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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쿠오바디스, 아이다> - 사라예보에서 스레브레니차까지2021-06-01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 이미지

 

 

5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사라예보에서 스레브레니차까지"

 

 

   <쿠오바디스 아이다>(2020)은 한 여인의 시선을 통해 1995년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에서 벌어진 참사를 그렸다. 이 사건은 보슈냑(=보스니아 무슬림)의 참사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도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다. 1976년생인 감독은 10대 후반 보스니아 내전’(1992~1995)을 겪었다. 현대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가운데 하나인 사라예보 포위전당시 대피소에서 현재의 남편이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다미르 이브라히모비치를 만났다.

   그런데 <시네유로파>와 인터뷰(Cineuropa, 05/12/2006)에서 감독은 자신의 종교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나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기던 티토 치하의 무슬림 가정에 태어났다. 나 자신은 예술가이고, 예술이 나의 종교다.” 영화가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보편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도 이런 태도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

 

   이 사건은 보스니아 무슬림의 참사이지만, 영화는 종교 측면을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역사 배경도 밝히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 사건을 보편적 관점에서 그린다. 말하자면 특정한 민족, 종교, 역사가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반인륜적 범죄로 고발한다. 이처럼 영화는 겉보기에 몰역사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단지 교조적인 역사주의를 벗어나는 탈역사적관점을 보여준다.

 

탈역사

 

   이때 교조적인 역사주의란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절대시하고, 그 관점으로 과장, 왜곡한 역사적 맥락에서 모든 사회 현상을 파악, 설명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보스니아 무슬림을 학살한 세르비아 집단은 이런 역사주의에 빠졌던 것 같다.

   당시 그 집단은 자신들의 패권주의를 남슬라브 민족의 단결로 포장하고, 과거에 무슬림이 영토를 빼앗고 박해한 역사를 근거로 오늘날 무슬림을 모두 민족의 배신자, 적으로 돌리며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했다. 이것이 만행을 낳은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감독의 선택은 뛰어나다. 교조적인 역사주의가 역사의 이름으로 학살의 본질을 흐리며, 학살을 정당한 복수로 미화하는 반면, 탈역사주의는 문제의 프레임을 바꾼다. 이 관점은 정당하게도, 정치·역사가 아닌 인류 보편의 윤리 문제로 학살을 보게 만든다. 영화의 탈역사는 보편성을 향하고, 보편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스레브레니차의 안개 스틸

 

<스레브레니차의 안개>(2015) 스틸 이미지  

 

   “미래 세대를 위해선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스니아 출신 영화감독 사미르 메하노비치의 다큐 <스레브레니차의 안개>(2015)에서 한 생존자가 한 말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역설적이다. 한 공동체의 현재,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역사의식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보스니아 상황의 딜레마가 있다. 이곳의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이지만, 이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미래를 생각하려면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감독은 이 문제를 어떻게 영화로 구현할까. 먼저 발칸 반도의 역사를 살펴보자.

 

발칸 반도의 역사

 

   발칸 반도는 동서양의 교차로이고, 산악 지대다. 다양한 문화가 이곳으로 유입됐고, 산악 지형에 따라 각 지역이 작은 단위로 분리됐다. 이곳에 수많은 나라, 민족이 형성된 이유다. 7세기 남슬라브 민족이 들어왔다. 서쪽 해안에 접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는 서유럽문화, 로마가톨릭이 정착했다. 동쪽 내륙 세르비아에는 동로마문화, 세르비아정교가 정착했다. 보스니아는 이 사이에 있다. 보스니아가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지역이 된 이유다.

   14세기 오스만제국이 (이미 헝가리 지배를 받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 발칸 반도 대부분을 지배한다. 이제 남슬라브 민족은 본격적으로 분열한다. 혈통과 언어는 같아도 문화가 다르기에 다른 민족으로 분화되는 것이다.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 따라 세르비아 대부분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보스니아 상당수는 이슬람으로 개종, ‘이슬람화된다.

   19세기 남슬라브주의가 형성된다. 분화된 민족들을 이전처럼 통합하자는 정치 이념으로 발전했다. 그 결실이 유고슬라비아 왕국(1918~1945)이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1945~1991)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리한 이념이었다. 현실적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다른 민족으로 분화했으니까. 1877년 오스만에서 벗어난 세르비아는 오스만과 게르만 민족에게 대항한 역사를 근거로 역사적 종주권을 내세우고, 세르비아 중심의 통일을 추진했다.

   이른바 세르비아주의. 서로 대등한 통합을 기대하던 크로아티아는 여기에 실망했다. 보스니아 또한 보슈냑 민족의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실망했다. 1941년 이곳에 추축국(이탈리아, 독일) 괴뢰국이 들어서며, 크로아티아계 민병대 우스타샤와 보슈냑계 한트샤르70여 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계 민병대 체트니크가 이들에게 맹렬한 반격을 펼칠 때, 우리는 이로부터 50년 뒤에 일어나게 될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서막을 보게 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 연방공화국을 세운 티토는 세르비아 세력을 축소시키고, 각 지역 민족주의 발흥을 막는다. 이에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출신인 티토가 자신들을 속이고, 박해한다고 여겼다. 쿠스트리차 감독의 <언더그라운드>(1995)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여러 개의 종교, 언어, 민족으로 이뤄진 나라들을 남슬라브주의를 주축으로 통합하려는 이념은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었던 같다. 유고연방은 마침내 ‘1989년 혁명’(동유럽 공산체제의 몰락) 이후 하나씩 해체된다. 1992년 보스니아도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보스니아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이에 반발하며 스르프스카공화국을 세우고, 보슈냑이 많이 사는 도시들을 공격한다. 보스니아 내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믈라디치의 연설

 

   영화 전반부 스르프스카 참모총장인 라트코 믈라디치1995711일 스레브니차에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세르비아의 명절을 하루 앞둔 기념으로

(On the eve of yet another great Serbian holiday)

세르비아인에게 이 도시를 바칩니다.”

 

   여기서 세르비아의 명절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을 말한다. 베드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외경<베드로행전>의 일화가 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다 길에서 예수를 만나는데, 예수는 로마 쪽으로 가고 있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예수는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라고 답한다. 베드로는 크게 뉘우치고, 죽음을 대면하는 용기를 얻어 로마로 되돌아가고, 거기서 순교한다.

   이 일화는 영화와 연결된다. 스레브레니차는 전쟁 이후 스르프스카 공화국에 속하게 된다. 결말부 아이다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학살한 그 도시로 되돌아간다. 영화 서사는 베드로의 일화와 유사한 구조다. 스레브레니차와 로마, 스르프스카 군대와 로마군,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스레브레니차로 되돌아가는 아이다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각오하고 로마로 되돌아가는 베드로를 닮았다. 한편 이슬람 코란에서 아이다는 되돌아오는 자를 뜻한다.

   그런데 믈라디치의 말은 또 다른 위대한세르비아 명절을 전제한다. 정말 위대한 명절이 따로 있는데, 비록 그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yet) 위대한 명절에 도착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전제하는 명절은 비도브단’(Vidovdan)으로 짐작된다. 628일이다. 그러니까 믈라디치는 좀 더 일찍 비도브단에 맞춰 이곳을 점령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걸로 볼 수 있다.

 

비도브단

 

   이날은 세르비아정교에서 중요시하는 성 비투스 축일이지만, 세르비아인에게는 또한 역사적 의미가 깊은 날이다. 무엇보다도 1389코소보 전투가 벌어진 날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로 14세기 발칸 반도의 최강자였던 세르비아가 몰락하고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최강자가 된다. 그 뒤로 이날은 민족 저항의 상징이 된다.

   1914사라예보 사건도 이날 일어났다. 192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헌법도 이날 제정됐다. 1948년 티토가 소련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 노선을 천명한 것도 이날이다. 두브라브카 스토야노비치 교수는 스레브레니차 사건에 관한 강연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오스만터키와 1389(코소보 전투)정신적 제한시간’, ‘신기원을 설정한다고 했다.

   모든 일이 거기서 시작되고, 끝난다. 가령 보스니아 내전도 비도브단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보스니아 무슬림의 제거는 오스만에 복수하고 역사를 바로 잡는 민족저항운동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처럼 비도브단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용서한다. 대세르비아주의에 관련된 것을 모두 미화하고, 정당화한다는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정치인들의 잘못도 크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발칸 반도에서는 옛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처럼 행사하면서 치명적이기 그지없는 민족주의를 선동했다(타인의 고통).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표적이다.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코소보 600주년행사를 대대적으로 열며, 대세르비아주의를 선언했다.

   이로부터 세르비아인의 시계는 1389년에 멈췄다. 스토야노비치 교수의 말처럼 오스만터키 지배 500년이 끝난 지 200년이 넘었는데, 대세르비아주의는 아직도 세르비아가 낙후한 원인을 터키에게 돌린다. 오늘날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이 늦은 것도 터키 탓만 한다.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미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구시대적인 민족주의를 대안처럼 내세웠다. 하지만 오늘날 유고슬라브 민족들이 합치면 무조건 잘 살 거라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세르비아인들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연방에서 분리, 독립하기만 하면 무조건 잘 산다고 주장하는 각 지역 민족주의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믈라디치의 수사학

 

   이 관점에서 믈라디치의 연설을 더 들어보자. 그가 어째서 이런 말을 했는지, 또 영화가 어째서 이 부분을 생략했는지. 그는 앞서 영화가 재연한 말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히스의 반란 이후로, 마침내 이 지역에서

터키인들에게 복수할 때가 왔습니다.”

 

   비도브단의 역사관이 반복된다. ‘다히스의 반란1801년 세르비아 지역 용병’(=예니체리)들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오스만제국이 임명한 지방총독을 살해하고, 70명의 세르비아인 사제와 촌장들을 살해했다. 1804년 이들의 폭정에 항거하던 세르비아인들은 무참하게 희생됐다. 믈라디치의 수사학에 주목하자. 그는 현재 스레브레니차에 사는 무슬림을 터키인으로 불렀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곳 무슬림들은 터키인이 아니다. 굳이 따지면 수백 년 전 오스만터키 치하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믈라디치는 오직 이들이 이슬람교도란 이유만으로 터키인이라고 부른다. 이 역사관은 1804년 세르비아인들이 희생된 책임을 1995년 보스냑 전체에게 전가한다. 그러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을 복수로 정당화한다.

   교조적 역사주의는 이런 것이다. ‘교조적이란 말은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고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이미 수백 년이 넘게 분화한 민족들을 서기 7세기 이전 역사처럼 통합하자는 것은 교조적이다. 1389년 이후 발생한 비극의 책임을 모두 현재의 보슈냑 전체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교조적이다.

   교조적 역사주의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 믈라디치는 정치적으로 과장, 왜곡된 역사의식 속에서 보스니아 내전의 성격을 남슬라브 민족과 타민족간의 전쟁으로 바꾸고,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옛 영토 수복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이처럼 과도한 정치적 역사의식이 문제다. 믈라디치의 연설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것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이 말을 담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감독이 교조적 역사주의에 비판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믈라디치의 연설에서 역사의식에 관련된 언급을 생략함으로써 탈역사 관점을 드러낸다. 또 영화는 믈라디치의 당당한 모습과 심약한’(?) 모습(영상 촬영에 신경 쓰는 모습, 총소리에 놀라 겁먹는 모습)을 대비한다. 이때 영화는 괴물 믈라디치를 탈신비화한다.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을 그리는 것이다.

   이 장면에 이어 카메라는 유엔군 기지를 비춘다. 카레만스 대령은 여기 25천 명이 있는데 음식도 물도 화장실도 없습니다.”라고 본부에 알린다. 이처럼 영화는 거창한 역사 담론보다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없는 모습, 남편과 아들을 살리려고 동분서주하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다. 그야말로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그리는 것이다.

 

거기, 이웃!”

 

   아이다는 전쟁 전에 열렸던 축제를 회상한다. 큰아들이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이 음식을 즐기는 가운데 네 명의 남자가 무언의 건배를 한다. 건배의 의미는 나중에 밝혀진다. 이들은 스르프스카 군인이 되어 피난민들 앞에 나타난다. 말하자면 총을 들고 나타난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같은 학교 친구이고, 이웃이란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스레브레니차는 산골 마을이다. 원래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보스니아 전체를 봐도 한반도 면적의 1/4보다 작은 땅에 세 민족이 함께 살았다. 인구 구성은 대략 로마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4%, 이슬람 보슈냑이 48%, 세르비아 정교의 세르비아계가 37%였다. 1992년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냑은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나머지 37%, 세르비아계는 반대했다. 이들은 유고 연방 잔류를 선언하며, 이웃을 공격했다.

   영화가 묘사하는 축제는 19911231일 해넘이 축제로 짐작된다. 이날 사회를 보던 남자가 나중에 거기 이웃! 미타르라고 이름을 부르며, 이웃 남자를 잡아가는 장면이 충격적이다. 영화는 대체 이웃과 친구를 적으로 만드는 민족주의나 역사의식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물음을 던지게 한다. 이 물음은 일찍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이 던진 물음이기도 하다.

 

드리나 강의 다리 아마자

 

드리나 강의 다리 앞에 서 있는 작가 이보 안드리치 (출처: 문학과지성사)

 

   <드리나 강의 다리>(1945)1577년에 세워진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를 말한다. 소콜로비치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정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오스만 제국 예니체리로 성장하고 재상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조카가 세르비아정교 대주교가 될 수 있게 했고, 비셰그라드에 다리를 건설했다(이곳은 스레브레니차와 가깝다. 드리나 강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지리적 경계를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소콜로비치 다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존을 상징한다. 안드리치의 소설은 이 공존의 상징인 다리가 1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다(오스트리아 군대는 이 다리를 건너 세르비아로 진격한다). 이것은 보스니아의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과거에는 단지 서로를 종교가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서로 존중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종교가 다른 민족으로 맞서 싸우게 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사실 1400년대 오스만 터키가 세르비아를 정복할 때 오스만은 이미 세르비아가 사용하던 비잔틴 관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농민들의 관점에서 오스만 정복의 영향은 대폭 감소했다. 세르비아인은 종교, 문화, 생활양식을 대부분 보존할 수 있었다. 한편 보스니아는 오랫동안 주변국들의 빈번한 침략과 세력권 교체를 겪으며 종교적 관용의 전통이 생겼고, 종교 개종에 관대했다. 게다가 보스니아를 점령한 오스만은 이슬람으로 개종할 경우 갖가지 혜택을 줬다. 이에 보스니아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는 이 같은 공존의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공존하던 단순한 종교 집단들은 19세기 민족주의 발흥과 함께 민족 집단화되고, 이 민족 집단들은 정치 집단으로 변모했다. 소콜로비치 다리가 무너진 이유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스타리 모스트에서도 볼 수 있다. 1556년 모스타르에 세워진 이 다리는 1993년 보스니아 내전에서 크로아티아계의 포격으로 무너졌다. 내전 초기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냑은 힘을 합쳐 스르프스카와 싸웠지만, 1년 만에 각자의 영토를 넓히려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처럼 근현대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의식은 부정적인 면이 컸다. 여기에는 보스니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도 한몫을 했다. 그는 이슬람적으로 순수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슬람선언>(1970)을 발표하고, ‘전쟁 불사론’(1991)을 말하며, 공존보다 갈등을 부추긴 면이 있다.

   <스레브레니차의 안개>에서 한 생존자가 미래 세대를 위해선 역사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영화가 보스니아 무슬림의 종교적 측면이나 민족적 관습을 거의 묘사하지 않고,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반()역사, 반민족, 반종교가 아닌 반인륜 범죄로 묘사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

 

   영화에서 한 병사는 보슈냑 여자들이 탄 버스 차창을 두드리며 망할 이슬람교도 새끼들이라고 말한다. 영어 대사는 무슬림 매춘부들!” “창녀들!”로 적혀 있다. 이 장면은 당시 스르프스카 군인들이 저지른 성폭행을 암시한다. 이 시기 성폭행은 민족 정화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민족 정화란 말은 궁극적으로 임신을 목표로 삼았다는 말이다.

   보스니아 내전의 성폭행 피해자는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감독은 첫 장편영화인 <그르바비차>(2006)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그르바비차는 사라예보의 한 지구인데 어원적으로 짐을 진 여자’ ‘혹을 지닌 여자란 의미다. 영화는 사라예보 포위전시기에 군인들에게 성폭행 당하고 임신한 엄마가 전쟁 뒤에 홀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그렸다.

   영화는 당시 스르프스카 집단이 보스냑 여자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집단적, 지속적 성폭행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스레브레니차에서도 비슷한 범행이 저질러졌다. 그런데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성폭행 내용을 담지 않으면서도 여성(주의)에 대한 시각을 뚜렷이 담는다.

   영화의 여성주의는 앞서 말한 탈역사 관점과 연결된다. 과거에 역사가 전쟁으로 얼룩졌고, 또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전쟁이 남성들의 게임이라면, 탈역사는 여성주의와 연결된다. 영화는 남성들의 전쟁 게임에 갇힌 여성들의 용기, 사랑, 회복력을 담았다. 이 관점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는 아이다와 함께 차밀라를 들 수 있다.

   차밀라는 아이다의 조용한 분신이다. 그녀는 중요 장면에 모두 등장한다. 신년 축제(‘동보스니아 베스트 헤어스타일 대회에서 아이다에 뒤이어 무대 위를 걷는다), UN 대피소, 그리고 엔딩 장면 학예회 자리에도 등장한다. 차밀라는 심지어 아이다가 없는 곳에서 서사를 전개한다(여자 피난민들의 버스, 점령군과의 협상 자리).

   차밀라는 경제학자이자 회계사다. 그녀는 협상을 마치고, 믈라디치의 속뜻을 곧바로 알아차린다. “다 눈속임이에요.” 차밀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던 아이다의 남편은 그녀가 어리석다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더 현명했고,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준다. 차밀라는 또한 강인하다. 협상 장소에 들어갈 때 신체적 모욕을 당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믈라디치의 언어적 모욕을 받는 와중에도 그녀는 부드럽지만 당당하게 대응한다.

   또 그녀는 아이다처럼 스레브레니차로 되돌아온다. 이 여인들에게 놀라운 용기와 회복력이 잠재했다는 것, 그리고 이 여인들이 전쟁 후 도시 공동체 재건의 주체가 되리란 것을 함축한다. 이 관점에서 차밀라는 아이다와 함께 남성의 세계, 또는 폭력의 세계에 맞서는 여성의 연대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전후(戰後), 가해자와 피해자

 

   전쟁이 끝나고 아이다가 살던 집에는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놀랍게도 마을 곳곳과 피난민 수용소에서 학살을 지휘하던 스르프스카 군인이었다. 또 엔딩 장면, 학예회 관람석에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전쟁은 199512월에 끝났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스르프스카 대통령이었던 라도반 카라지치에게 40년 형, 믈라디치 장군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남았다. 보스니아는 두 개의 자치공화국, 즉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중심)과 스르프스카 공화국(세르비아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국가가 됐다. 스레브레니차는 스르프스카에 속한다. 이곳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사는 이유다.

   영화는 아이다가 교사로 복귀하고, 가해자의 아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무대에서 아이들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여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곳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진실을 직시할 건가, 외면할 건가하는 문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앞날을 상징하는 것이다.

   1991년 인구수 3만 명 정도였던 스레브레니차가 유엔 보호 안전 지역으로 선포되자 2년 만에 인구가 6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스르프스카 군대의 포위 작전 때문에 도시 전체가 공포, 굶주림, 질병에 직면한 수용소로 변해갔다. 그리고 1995711일 유엔평화유지군 기지로 찾아간 25천 명 가운데 남자들은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평화유지군)과 국제사회의 책임도 크다. 이 사건은 예고된 것이었고, 적어도 참사의 규모를 줄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유엔을 믿고 찾아가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수 있다. 영화 속 아들의 말처럼 숲으로 달아난 사람들의 1/3은 생존했다. 이 사건은 르완다 사태이듬해에 일어났다. <호텔 르완다>(2004)에서 유엔평화유지군 올리버 대령은 자신들의 역할이 평화 유지’(peace-keeper)이지 평화 조성’(peace maker)이 아니라고 했다.

   스레브레니차의 경우도 비슷했다.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유엔(평화유지군)과 국제사회의 무능력, 무정책, 무행동이 참사를 더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830일 나토(NATO)는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고, 11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으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은 이미 일어난 뒤였다.

 

국제사회 원칙

 

  그 뒤로 국제사회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나토의 코소보 개입이다. 국가 주권보호책임개념을 다듬었다. 대량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주권국가가 보호책임을 다하지 못하는(않는)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첫 사례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발생한 리비아 사태다.

   영화는 이 같은 국제사회 원칙에 부합한다. 탈역사 관점은 전쟁의 역사적 맥락(정당성)보다 인명과 인권의 가치를 우선시한다는 면에서 인도주의에 기초한 국제사회 원칙에 상응한다. 역사의식이 과잉한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라는 것을 알아야만 전쟁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지금, 독단적으로 무자비한 학살이 벌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보스니아 상황을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해법을 찾기 어렵다. 오스만 제국부터 시작된 보슈냑과 세르비아의 갈등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완전히 결백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보스니아의 비극은 오히려 역사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역사의식 과잉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가령 현재의 보슈냑 전체를 1940년대 한트샤르나 수백 년 전 오스만과 동일시하며, 인종청소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역사의식 과잉이다.

   이런 교조적 역사주의에 대해 영화는 또 다른 역사주의로 맞서지 않는다(그것은 새로운 갈등을 낳을 뿐이니까). 그 대신 문제의 프레임을 바꾼다. 영화는 보스니아 상황의 전후맥락, 즉 역사를 말하지 않고, 스레브레니차 사건 하나만 비춘다. 또 주인공 아이다는 순수한 영웅은 아니다. 어쩌면 가족의 생존만 걱정하는 가족 이기주의자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 가족 이기주의는 역설적으로 보편성으로 연결된다. 거대한 역사 담론이 아닌 인간의 시각, 또 거창한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이때 가족 이기주의란 설정은 어떤 이유로도 민간인 학살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자식, 남편. 이웃의 생명보다 가치 있는 정치, 역사 논리는 없다는 의미다. 이처럼 영화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린다. 민족, 종교, 역사가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고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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