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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어느 가족>-‘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2018-07-20
어느 가족 스틸컷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일시 : 2018. 07.20(금) 19:00
*장소 : 영화의전당 소극장
*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박사)
*주제 :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휴머니즘’적 사회 비판의 관점에서 한 가족의 생성과 변화를 그린 영화다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성격의 특징이 가족형 공동체에 대한 영화적 시뮬레이션이다. 사고 실험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런 공동체가 과연 가능할까? 모의실험을 한번 해본 그런 영화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먼저 간단하게 감독에 대해서 중요한 점만 말씀드리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텔레비전 맨 유니언’이라고 하는 일본의 독립TV 제작사인데, 상당히 사회현실에 대한 다큐를 많이 만들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생산해서 후지TV 등에 공급하던 독립제작사였는데요.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얼마 안 있어서 아주 초기입니다. TV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라는 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오늘 영화와 상당히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1993년도에는 TV 다큐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타이완 영화감독들이죠. 이것을 찍고 나서 2년 뒤에는 스스로 장편을 만들며 영화계에 데뷔를 합니다.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고, 예를 들어 에드워드 양으로 부터는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 허우 샤오시엔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TV 다큐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46세 되는 한 여성이 복지 혜택을 잘 못 받고 있다가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소재로 다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와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회 복지사가 굉장히 성실하고 좋은 분이었는데, 열심히 일하시다가 자살한 일이 벌어집니다. 행정의 역할을 해주고 싶은데, 양쪽에 끼여서 괴로워하시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얼마전에 나온 감독의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 보면, 그것에 대한 방송을 제작하다가 방향을 크게 바꾼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옵니다. ‘피해자는 시민이고, 가해자는 복지행정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사회는 단순하지 않더라.’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두 사람 모두를 다큐에 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좀 더 초점이 옮아간 것은 자살한 남자 사회복지사의 부인이자 홀로 남은 미망인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의 슬픔과 극복하는 과정에 대해서 다큐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식으로 방향이 크게 전환됩니다. 복지를 입구로 삼았지만, 그것을 실마리로 다큐를 만들었지만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쏠렸다. 이것이 오늘 영화와도 굉장히 이어지는 방식이 아닌가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이후로 가족이라는 것이 혈연으로 맺어졌는가, 시간과 사랑으로 맺어졌는가, 그런 문제의식이 좀 더 밀어붙여진 것으로서 스스로 선택한 가족구성이라는 것을 주제로 그것이 어느정도 가능할까 이야기를 하는데,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짐작하시기에 아마 감독은 이런것들이 앞으로 미래사회는 생각해봐야할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 사후실험을 영화를 통해서 보여준 것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오늘 영화에서 대사를 보면, 저런 대사가 있었죠.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겠어? 옆에 할머니가 뭐라뭐라고 말하자 이렇게 말하죠. ’유대....정 같은거’ 일본에서는 키즈나 (絆·きずな) 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영화에서는 중요한 단어인 것 같고, ‘피가 안 이어져서 더 좋은 점도 있잖아’ 하니까 ‘괜한 기대를 안 하게 되는 건 좋지’ 이런 것들이 저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 대사도 좋았습니다. ‘버린 게 아닙니다,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었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2016년 <너의 이름은> 영화 상영이후에 한국에서 조차 무수비(結び·むすび)라는 말이 많이 돌아 다녔죠. 곧이어 일본에서는 키즈나(絆·きずな) 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하고, 다시 논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해에 일본은 한 해에 한 글자씩 단어를 정한다고 합니다. 그 해의 한자로 키즈나(絆·きずな)가 채택이 되었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이중적인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라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묶어 놓는 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속박의 의미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겁니다. 저 한자가 ‘반창고’할 때 ‘반(絆)’ 인데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각반’이라는 옛날말을 아시나요? ‘각반’은 딱 조인다는 뜻인데 그때의 한자도 저 ‘반(絆)’자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2011년에서 동일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사망했을 때, 그 이후로 일본에서는 가족의 유대 논쟁이 벌어졌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에 자민당이 주축이 되어 헌법 개정을 하려고 하는데, 저 문장을 넣었죠. ‘가족은 사회의 자연·기초적 단위이고 가족은 서로를 도와야한다’ 이 자체는 나쁠 것도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반(絆)’자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 좋은 점으로 보면 유대지만 나쁜 점으로 보면 구속하는 것들이 국가주의로 가는 구속의 시작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국가가 사람을 책임져야지 왜 가족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인가라는 비판도 맹렬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 2016년도부터 아동학대 상담사례가 12만 3천 건을 넘어섰는데, 그 뒤로 계속해서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살인사건의 55%가 친족 간 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비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줄어들지 않고 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도 점점 장난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에 또 갈리는 거죠. ‘가족 이야기, 가족 유대 이야기는 그만하시오’라는 팀이 나오기 시작했고, 반대로 가족이라는 것은 재건설 되어야 한다는 팀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에 나와 있는 책 <가족이라는 병> 같은 경우에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가족 유대 자체가 사람을 억압하는 병이다’라는 것이죠.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반면에 가족을 재건설하자는 팀이 있었는데, 오늘 감독의 경우에는 제3의 길 가족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다른 방식의 가족이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어떤 하나의 모델을 모색하는 시뮬레이션해보는 영화가 아닌가라는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경우에 80년도에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그 직전에 굉장히 집중해서 한 강의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던 사회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사이좋게 살 것인가가 아니고요. 사회에서 거부당했거나 스스로 사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인가. 이런 작은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었고, 이것이 이분의 사후에 책으로 엮어져서 나왔는데, 탄생 100주년 2015년부터 이어지고 있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말씀 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이 영화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점이 있는데, 이 분의 경우에는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볼 때 저런 작은 공동체는 10명이 넘어가면 잘 안되더라는 생각을 하셨고, 제일 중요한 것은 ‘고유 리듬(idiorrythmie)’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고유 리듬이라는 것은 구성원들 각자가 고유한 리듬을 지킬 수 있을 때 공동체가 유지가 되지, 획일적으로 하려고 하면 저 공동체는 반드시 깨진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문헌이나 문학적 사례를 들어서 연구를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바르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가족이 해체되는 것은 사회적 원인이 크죠. 일용직이라 고해서 사회보상도 못 받고, 워크셰어라고 해서 쫓겨난 것이 크지만, 내적 요인으로 본다면 서로의 고유 리듬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는 바르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쥬리’가 들어오면서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바르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족(이기)주의가 없는 가족 (Famille sans familialism)을 생각해 볼 수 없을까 라고 이야기를 했고, 왼쪽의 사진에 이름을 붙였죠. 자서전에 나오는 사진인데 가운데가 엄마고, 왼쪽이 바르트 어릴 때이고, 오른쪽이 아빠가 다른 아들로 가족주의가 없는 가족을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더 찾아보면 바르트는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공동체에서 중요하다고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친밀해 지려면 가까워 져야하는데 그것보다 더 친밀해져도 망하고, 멀어지면 외로워지고, 이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공동체마다 중요하고 공생의 관건이라고 하는데요.

 

재밌게도 오늘 영화에서 ‘Swimmy(1963, Leo Lionni)’ 물고기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오른쪽은 이탈리아 동화작가의 그림인데, 저 그림을 본 듯이 바르트가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고기 떼 공동체는 개미떼보다 더 끔찍한 비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비판을 해요. 어떤 것인가 하니 개미떼들은 개인이 평등화되고 사회적 기능이 개체화, 기계화 된다는 점이 있지만 이건 한술 더 떠서 물고기 떼의 경우에 주체가 완전히 말소된다.

 

균등화된 정서가 길들여진다. 바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꼬마 쇼타가 공동체를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여동생에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도둑질을 시키는 것이 큰 계기가 된 것 같거든요. 원래는 물고기의 눈처럼 활동하고 각자가 살아가려고 생각을 했다가 그 생각이 바뀌게 되는 거죠. 정답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타인을 서로 통제·조종하지 않고, 서로의 이미지를 단념하고 해야 가족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관계의 상상계를 자극하지 말 것. 그래서 오늘의 대사로 보면 괜한 기대를 갖지 않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가족의 형태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왼쪽 사진을 보시면 어떻게 보면 아빠는 정말 착한 사람이죠. 어떻게 보면 쇼타보다 더 어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릴리 프랭키가 ‘어떻게 연기를 할까요?’ 라고 감독에게 물어보니까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하니 릴리 프랭키가 ‘그건 자신이 있다. 내가 원래 그렇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서 안도 사쿠라의 경우 아주 성숙한 어른이죠. ‘엄마라고 불리지 않으면 어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속으로는 바랄지라도 그런 것들이 달랐다. 아빠의 경우 어린아이에게까지 도둑질을 시키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하고 바르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게 지나치게 되면 왼쪽 하단에 사진이 이광기 작가의 작품인데요. 엄마가 ‘내가 나를 어찌 키웠는데’라고 하자 딸은 ‘나는 엄마에게 속았어요’ 라고 합니다. 이런 괴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영화에 대해서 좀 더 들어가 보면, 오늘 본 <어느 가족>은 굉장히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몰락,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감독은 가족이 체험했을 정신적 풍요로움을 그리려고 한 것 같다는 거죠.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다른 정신적 풍요로움을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 공유와 같은 것들을 상상해서 그려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표현의 관점에서 정신적 풍요로움을 연출하는데 굉장히 흔히 쓰는 ‘사랑해 아들!, 사랑해 딸!’ 이런 표현은 한 번도 없더라고요. 그런데도 진득한 것이 전달되고 느껴질 수 있도록 묘사를 했다는 것이죠. 이 점이 저는 재미있었고, 통곡하며 우는 장면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를 ‘간접적인 표현, 침묵의 표현으로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감독은 어떻게 전달을 하려고 했던가.’ 이런 주제를 생각해보고자합니다.

 

세 가지 주제로 볼 건데 먼저 ‘환유’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독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우슈비츠 기념관에서 여러 가지 끔찍한 사진을 보고 했는데,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죽은 유대인들의 엄청난 수의 신발이 쌓인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것보다 그들이 신었던 신발을 보고서 가슴이 무너지더라,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게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사고를 촉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강조하는 것이 그때부터 본인은 오히려 간접적인 것이 직접적인 것보다 더 사고를 촉구하고 사람이 생각하게 만들고 더 행동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유대인의 신발이라는 것과 비할 수 있다면 오늘 영화에서는 어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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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구슬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학에서 어떤 한 사람이 신었던 신발을 가지고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을 ‘환유’라고 합니다. ‘은유’ 내 마음의 호수 이런 것이고요. ‘환유’는 일손이 모자란다 할 때, 일하는 손이라는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것들이죠. 그림을 보시면 인터폴리스(interpolis)라는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보험회사의 광고입니다. 무슨 광고인가하면 여행을 갔을 때, 자동차로 피사의 사탑을 들이 박았을 때, 즉시 연락하면 달려간다는 내용인데요. 저 삐딱한 탑으로 피사의 사탑을 표현하는 동시에, 관광지라고 하는 전체를 대표하는 저런 것이 환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져있는 것, 신발과 사람은 이어져있고, 안경과 그 사람이 이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이, 안경 이리 나와봐!’ 이런 말 할 수 있잖아요. 옛날에 많이 하던 소리인데요. 안경으로 사람을 대신하는 것. 즉, 원인과 결과가 인접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제일 대표적인 방법이 클로즈 업(Close-Up) 그리고 Off-screen Diegetic sound(화면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한 잔을 마셨다는 것은, 잔은 못 마시잖아요. 잔속에 술을 마시는, 잔속에 인접하고 있는 닿아있는 술을 마시는 것. 오늘 저 사람 음주운전 했을 때, ‘한잔 했어?’라고 물어보는 것은 잔을 먹을 수 없으니까 술을 마신 결과를 취했는가라는 원인과 결과가 인접해 있는 것이 다른 것을 대신할 때 환유라고 합니다.

 

오늘 영화에서 보면 화상을 입은 엄마와 쥬리의 신체 한 부분을 보여주잖아요. 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엄마도 공감하는가 ‘똑같구나’ 하는 것이 보여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애기의 발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그 앞부분이 어떤 맥락이었는가 하니까 아이가 유괴 되었다고 뉴스보도가 나옵니다. 아빠가 그러잖아요, ‘혼자 돌아갈 수 있겠느냐. 안 돌아갈래?’ 이런 식으로 약간 돌아가기를 권유하죠. 그러고 나니까 아이가 대답을 안 합니다. 가기가 싫었던 거죠. 그러고 나서 머리를 자릅니다. 그때 발을 의자에 묶어 놓고 있다는 것은 가기 싫은 것의 의사표시이죠. 발은 이동의 환유인데, 이 그림을 보시면 아동 심리학에서 그림을 볼 때 애기가 어때요? 다른 사람들은 다 손 벌리고 있는 것과 발이 보이세요? 애기만 발이 없죠. 아동 심리학에서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발이라는 것은 이동으로 볼 때 발이 없다는 것은 이동하지 않겠다, 혹은 이동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이 경우에는 이동을 거부하는 것을 표현하는 환유라고 볼 수 있다. 저 경우에는 ‘진짜 가족이라면 너를 두고 떠났겠어?’라고 할 때, 꼬마 쇼타의 발을 한참 보여주죠. 저럴 때는 애가 지금 딜레마인겁니다. 이 집을 벗어나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런 갈등관계를 보여주는 환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미의 경우에는 껍질을 벗는 것 ‘탈각’이라고 하죠. 생성, 변화, 성숙, 성장 뒤에 벗고 나면 새로운 존재가 되는데, 그 결과가 되는 산물의 원인이 되는 모습입니다. 모든 성장하는 것을 대표해서 매미가 환유로 작용 하는 것이고, 애들이 이것을 보고 힘내라고 하잖아요. 그게 자기들도 똑같은 처지였잖아요. 그 다음 장면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데 할아버지가 나와서 불량식품을 주면서 동생에게는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너무 좋았습니다. 잡아서 때리고 야단 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면서 달래고, 그때부터 아이가 바뀌었잖아요. 저게 또 재미있는 것이 가게 이름이 야마토야(大和屋)이거든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일본을 상징하는 말이잖아요. 민족의 정신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왜 저 단어를 붙였을까 생각해보면 고레에다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관용의 정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 좀 더 저런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잡화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거창하게 붙인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가 빠지는 장면입니다. 저것은 실제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애기가 촬영하던 중간에 이가 빠진 겁니다. 이것도 아기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밌는 것이 ‘건강한 새 이를 주세요!’하고 지붕위로 던지잖아요. 그때 집 안에서 소리가 들리죠. ‘할머니!, 할머니!’하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는데, 저 소리처럼 화면이 안 보이는데 내용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까 말씀 드린 Off-screen Diegetic sound라고 하는 겁니다. 말하는 아키는 안보이고 아키의 목소리만 그 사람의 한 부분만 들리는 거잖아요. 발성체는 안보이고 목소리라는 부분만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환유입니다. 젖니가 영구치로 바뀌는 것은 아이가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이것과 동시에 할머니의 죽음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굉장히 고레에다 다운 테마이다. 삶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것이 고레에다가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생각이잖아요. 일본도 저렇게 지붕위로 던집니다. 아랫니는 지붕 위로 던지고, 윗니는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웃음)

 

이 장면도 좋았습니다. ‘봐, 저기!’ ‘안 보이지만 소리를 보라고’ 저게 소리는 들리는데 화면에서는 불꽃이 안보이잖아요. 불꽃은 화면 밖 Off-screen이고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야기가 되고 있죠. 모습이 안보이고 소리만 부분만 들리는 거죠. 이것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환유’라는 것이 부분만 제시하기 때문에 굉장히 사람을 끌어들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말 중 ‘사고를 촉구한다’는 것이 환유라는 것이 오히려 사고를 촉구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을 더 자연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와 같이 때리는 것이거든요. 때리는 것이라 현대인들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구슬 장면입니다. 구슬을 보고 쇼타는 바다라고 했는데, 린은 우주라고 합니다. 나중에 마지막 장면에서도 저것을 보면서 오빠와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 그 모든 것을 구슬을 통해 회상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죠. 잠깐 중간 정리를 하자면 환유의 특징은 단어에서 단어로 미끄러지면서 생략된 의미를 찾는 방식이다. 그래서 결여를 메우는 상상력 그래서 ‘욕망의 수사학’이라고 부릅니다. 드러난 부분에서 숨은 부분으로 사고를 확대시켜나가기 때문에 고레에다 감독이 하는 말입니다. 사고를 촉구한다.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저분의 이야기가 틀린 게 없죠. 정론이죠. 그런데 뭔가 완전한 답은 아닌 거죠. 복지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단언, 잘라서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라서 말한다, 단언한다는 것은 복지 관점도 접근제도를 해결할 수 없고, 예술가에게도 제대로 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반면에 간접묘사, 적정거리와 같은 환유의 계열이 있습니다.

 

두 번째 비언어적(nonverbal)언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강연 제목은 저 분의 논문제목을 가져서 온 것입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라는 철학자의 <간접적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라는 논문 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분도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논문을 발표하고 돌아가셨는데요. 이상하게 저 주제만 들어가면 빨리 죽으니까 조심해야할 것 같은데요.(웃음)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 영화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뽑아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이 세계를 인식하고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 바탕에는 신체가 있다. 신체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행위잖아요. 관념적이고, 개념적이고요. 그런데 말이라는 것을 따지고 보면 성대가 울리는 거잖아요. 기본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이 알아듣고, 이야기를 듣고 따분해 하거나 감동을 받는 이유는 내 몸의 움직임이 전달되어서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기본적으로 신체 행동이라는 점에서 신체행동이 말의 근원적 바탕을 이룬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영화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키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스킨쉽이 강렬했던 친구였던 것 같아요. 할머니에게 늘 안기고 싶어 했고, 그랬던 모습이 보였고요. 그리고 침묵의 목소리라는 것이 입을 벌리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그런 것인데, 그 장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일본말에서 본음(혼네,本音)라는 단어를 느낄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짜 소중한 말, 진심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입모양으로 의미작용을 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상상하고 파악해야하는 것이라 환유와 간접적으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본 관객에게는 더 환유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자막이 없거든요. 아빠와 할머니가 말할 때 자막이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일본 웹에 보면 할머니가 뭐라고 이야기를 했을지 논쟁이 많습니다. 우리는 깔끔하게 자막이 나오잖아요. 일본 사람들에게는 그게 100% 정답이 아닌 겁니다.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다. 이것을 또 고레에다 감독이 솜씨 좋게 소설책을 발간해서 소설책에는 답이 있잖아요. 소설책을 사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죠.(웃음) 일본웹에 보니 미안하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이런 내용도 있더라고요. 우린 아닌데, 아빠라고 했는데요.(웃음)

 

쇼타가 정말 예쁘게 생겼죠. 정말 만화책을 찢고 나온 것 같이 생겼는데요. 이 아이가 영화를 1년 걸쳐 찍었잖아요. 찍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키와 얼굴이 좀 커져서 눈 좋은 분들은 성장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참고로 이 영화는 겨울에 시작해서 대부분을 다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안가 장면 말고는 전부다 겨울에 찍은 겁니다. 겨울에 반팔입고 여름인 것처럼 연기를 한 것입니다. 안도 사쿠라는 저때 거의 보살님 얼굴을 하고 있는데요. 저때 아마 ‘안녕’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정말 멋있었습니다.

 
세 번째 Long Take, Long Shot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 장면도 좋았는데, 굉장히 오래 비추죠. 롱테이크라는 것은 카메라를 고정시켰다는 말이고, 롱숏이라는 것은 멀리서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에 대사가 쇼타가 물고기 이야기를 한 직후에 저 이야기를 하잖아요. 아빠가 ‘내가 너를 잡아 먹을테다’하며 장난치는 장면인데요. 뒤에 물을 저렇게 보여주니까 저 두 사람이 물고기 같이 보이기도 하고 굉장히 짠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결국 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이 롱테이크 롱숏을 좋아하는 분 중에 한분인데요. 특징이 이 장면이 끝나고는 암전이 일어나고 계절이 봄으로 바뀝니다. 이 장면은 여름 딱 시작하는 장면이거든요.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롱테이크, 롱숏을 하는 겁니다. 자세히 보면 꼬마들이 작게 보이잖아요. 오즈 야스지로 감독 등도 주로 롱숏을 하는데 사물을 비추거나 사람 없는 자연 풍경을 비추거나 하죠. 그런데 고레에다는 감독은 강조하는 것이 자세히 보면 주인공이 있고, 산수화의 전경 인물처럼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장면 역시도 불꽃놀이를 보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죠. 이 장면도 사람들이 어떤 별자리가 되는 그런 느낌인데요. 이 장면을 보고 저는 어떤 장면이 떠올랐는가 하면, <아름다운 별>에서 아빠가 UFO를 타고 떠날 때 내려다보는 장면이잖아요. 장면이 비슷하다고 해서 찾아보니까 촬영 감독이 같은 사람이더라고요. 대만의 한 영화과 교수가 2016년도에 고레에다 감독과 인터뷰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롱테이크 롱숏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니 고레에다가 ‘인간중심주의가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비인간주의중심이라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아시아적인 발상이긴 한데, 그러면서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하니까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게 선물 받았던 엽서에 적혀있는 天地有情(천지유정)을 인터뷰에 저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가져왔나봅니다. 이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겠다며 보여줬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만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간에 정이 있다. 이런 세계관이 롱테이크, 롱숏에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런 세계 속에서 살았을 정신적 풍요로움을 묘사한 것도 포함이 된다. 그런 동시에 개인적으로 위에서 비추니까 곧 사라질 것 같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우린 얼마나 잘났을까 생각해보면 동료감이랄까 동질감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감독도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장면을 보고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한번 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말씀드렸고 그런 동시에 영화의 대부분은 아이의 시선이죠. 카메라 높이가 린의 눈높이더라고요. 방에 가면 50cm 정도 다다미의 높이라고 하지만 서 있을 때도 굉장히 낮게 꼬마 린 높이로 카메라가 맞춰져있다. 아이가 보고 있고, 하늘이 보고 있으니 어른들이 똑 바로 살아야겠다는 시선으로 간접적인 시선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일본전통예술

 

이게 보면 일본 전통예술에서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식별하는데 한참 걸리시죠. ‘에마키(繪卷)’라고 하는 두루마리 그림인데 영화 촬영하듯이 천정이 다 열려있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시선인데, 여자 얼굴 같은 경우 바로 앉아 있는 눈높이로 묘사가 되어있거든요. 저 공존 할 수 없는 두 시선이 한 그림에 있는 겁니다. 사토 다다오라는 영화평론가는 고레에다 등의 롱테이크, 롱숏이 일본 전통에서 찾자면 두루마리 그림과 ‘야마토에(大和絵)’라고 해서 우리나라 고려시대 중기정도에 완성되고 번성했던 그림들의 계절표현과 상통한다" 이야기 합니다. 오늘 영화를 보시면 잘 느끼셨겠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사계절이 분명합니다. 오늘 영화는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겨울은 아니잖아요. 거기서 오는 시간의 흐름과 무상함과 기억의 문제가 고레에다 영화에서 중요한데요. 이런 전통에서 찾는 분도 계신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경우 이런 일본의 전통예술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 우리가 보편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계절의 변화에서 누가 죽고, 태어나고 그리고 그 계절을 통해 기억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에 겨울이 돌아왔죠. 린이 마지막에 밖을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했을 때, 1년 전 겨울에 아빠와 쇼타가 지나가다가 고로케를 권하던 첫 장면을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계절이 바뀌고 돌아오는데, 기억이라는 것이 모든 어릴 때 중요한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계절이 분명하게 같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을 찬찬히 들여서 한 번 해보시면 어릴 때 중요한 기억들은요. 몇 월, 며칠인지는 몰라도 계절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계절이라는 것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시키는 특성이 있는데요. 기억을 떠안고 산다는 표현으로 이 영화를 보면 기억을 후회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행복했던 자기시절을 후회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를 하면 이 영화는 간접적인 침묵의 언어로 사회 안전망을 벗어난 가족의 풍요와 상실을 표현한 것 같다. 이런 간접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사실 꼬마 둘이라고 봐도 되잖아요. 근데 말을 제대로 못하죠. 특히 린 같은 경우에는. 그런 아이들의 정서, 말 못하는 존재. 아까 영화를 마칠 때 쇼타를 따라가는 아빠가 정말 누가 아이고 아빠인지 모를 정도로 애처럼 달려가면서 ‘쇼타, 쇼타’ 부르는데, 창문 때문에 소리가 안 들리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데 못 듣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감독이 지금 영화를 통해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침묵의 목소리라고 강연 주제를 잡은 것도 말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한번 관심을 가져보자고 감독이 생각한 것 같아요. 간접적 언어를 이 영화에서 많이 썼다고 보이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의 약자, 그들의 정신적 공감, 공유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표현 방식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가족 각자가 풍요로웠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후회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아키도 결국 찾아가서 방문을 열어보고, 쇼타도 아빠라고 마지막에 부르는 것이 마음속으로 아빠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린만 안됐죠. 린이 그렇게 말 못하고, 울지 않았던 것이 더 짠했던 것 같아요. 한국영화 같으면 10번은 더 울었을 것 같은데 안 우니까 더 슬픈 것 같아요. 그래서 후회하고 부정하지 않는 것들이 다르게 보면 우리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데도 저렇게 못살고 있지 않은가? 풍요로움의 기준이 무엇일까? 저렇게 사는데서 풍요롭기는 쉽지 않지만 영화적 시뮬레이션이다. 모의실험이라고 보이지만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가족을 넘어선 유대가 가능할까. 앞으로 시대는 이런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을 감독이 던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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