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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남자들 : 니콜라스 레이의 남성들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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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남자들 : 니콜라스 레이의 남성들
박인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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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레이는 5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감독이지만 동시에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장르의 틀 안에서 영화를 제작하면서도 교묘하게 그 법칙을 비껴가거나 시대가 원하는 세계를 묘사하기보다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미국사회의 틈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만들었다. 안락한 가족의 모습보다는 악몽으로 변질되어가는 가족의 권력 구조를 관찰하고, 여성이 주인공인 서부극을 만들었다. 성공한 인물의 이야기보다 사회의 시스템 저편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으며, 극단적인 보수의 세력이 난무하는 냉전의 시대를 병리학적인 모순을 지닌 구조로 인식했다. 그의 영화에는 발작적인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주체할 수 없는 근원적인 어둠에 자신을 내맡긴 남성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들의 불안과 공허는 자기 파괴적인 죄의식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어쩌면 레이가 겪어온 부침의 세월이 그의 인물에게 삶의 조건처럼 지워진 비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불안과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했지만, 그의 영화만큼은 복합적인 두께를 지닌 비극의 현장성에 충실했다. 모순에 빠진 레이의 인물은 그들의 그릇된 행동만큼이나 새로운 삶 또한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담긴 그의 정교한 공간 활용, 정확한 지점에 놓인 카메라의 위치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들, 심리를 드러내는 색감과 빛의 사용은 감정을 분출하는 인물이 위태롭게 현실에 발을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는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 위력을 발휘한다. 레이의 영화를 레이답게 만드는 것은 그의 신경질적이고 병적인 남성들이고 그들이 수행하는 고단한 임무와 감정의 폭발에 숨겨진 귀향의 꿈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go back(home)”이라는 말은 첫 영화 <그들은 밤에 산다>(1948)와 마지막 영화인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 없어>(1976)에 이르기까지 레이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들은 범죄의 세계 언저리를 떠돌거나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체성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술이나 도박, 폭력과 같은 중독적인 상황에 빠져든다.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필름 느와르, 에스키모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한 인류학적인 보고서, 서부의 시대를 살았던 실존 인물의 행적을 따르는 영화에서건 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둠의 힘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그들은 번번이 자신의 의지를 비껴나가고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피폐한 마음의 상태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새로운 출발을 염원하고, 가정에 뿌리를 내린 정착과 집을 원한다.
도주하는 젊은이들에게 닥친 유혹과 타락, 배신으로 인해 새 삶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는 <그들은 밤에 산다>의 젊은이는 사랑하는 여인과 뱃속의 아기가 기다리는 집의 문턱에서 죽음을 맞는다. 무법천지의 서부와 안락한 집이라는 두 세계를 오가는 <제시 제임스 스토리>(1957)의 제시는 자신과 가족을 망가뜨리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겠다고 결심한 순간 죽임을 당한다. 혹은 <어둠 속에서>(1952>와 <파티 걸>(1958)의 남자들처럼 범죄의 세계에 질려버린 그들에게 위안을 준 여성을 만나고, 에스키모의 관습과 백인의 탐욕이 공존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야생의 순수>(1960)에서 마침내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의 모습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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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티 맨>(1952)은 제목에서부터 레이의 남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흥미로운 영화다. 노련한 남성이 젊은이를 교육하는 서부극의 변형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는 이미 쇠락해버린 로데오 선수 제프(로버트 미첨)의 녹슬어버린 육신과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분출되는 로데오의 세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는 로데오 경기를 기다리는 군중들의 흥청망청한 퍼레이드와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인 경기 장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레이는 로데오 경기장 안팍의 짧은 스케치를 통해 돈과 명성을 위해 흔들리는 남성들의 몸이 어떻게 동물과 접촉하고 이탈하는지 요약한다. 거친 야성의 힘을 억누르는 것은 노련한 기술과 배짱, 승부욕을 지닌 남성에게만 가능하고, 동시에 동물과 같은 야생성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숏은 부상당한 제프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황량한 경기장의 정경이다.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쓰레기가 뒹구는 이 공간의 분위기는 실패한 남성의 마음 속 풍경처럼 보인다. 다음 숏에서 제프가 도착한 곳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살았던 농장이고 그는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 잡지와 동전을 찾아낸다.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었던 남성의 귀향은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는 단순한 제스처로 제시된다. 이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충동과 중독된 열정 때문에 로데오 경기에 참여한 제프의 부상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신과 더불어 가장 비극적인 정조를 띄고 있다. 정념이 걷힌 자리를 채우는 건 상념이며, 평생을 떠돌면서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겼던 자의 죽음이 없다면 젊은 부부의 귀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람과 먼지의 질감마저 느껴지던 도입부의 경기장은 말에서 떨어진 후 들것에 실려 나오는 후반부의 숏과 연결되면서 레이의 인물이 겪게 되는 좌절과 쓰라림을 예비한다. 레이는 절룩거리는 제프의 다리와 “튼튼한 몸과 나약한 정신”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맨몸의 가련한 남자들, 향락을 위해 몰려드는 여자들, 주변에 널려 있는 돈에 미친 인간들의 쇠락한 현재가 굳건한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는 저 허약한 인간성에 대해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인물이나 행위에 대해 논평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기괴한 욕망의 나락까지 떨어진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레이의 서늘한 시선은 깊은 절망과 허무로 향한다.
<어둠 속에서>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나란히 놓인 영화다. 필름 느와르의 장르적 특징을 공유하는 어두운 밤의 도시에서 하얀 눈에 덮인 산간 지역으로의 이동은 범죄를 뒤쫓는 형사의 행적을 따라가는 서사로 진행되지만, 레이가 보다 정교하게 표현한 것은 과도한 폭력이 일상이 된 남성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을 지닌 여성(아이다 루피노)의 만남이다. 폭력은 두 공간 모두에서 일어나고 살인과 쓰레기 같은 범죄는 늘 존재하지만 두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냉소적인 형사인 짐(로버트 라이언)이 혼자 지내는 집과 “그냥 어린애일 뿐인” 범죄자와 그의 누나가 살아가는 은신처인 오두막을 보여주는 레이의 방식은 두 세계의 간극을 무심코 드러낸다. 예를 들어 형사가 혼자 지내는 집은 사람의 온기가 없는 곳이다. 경찰차를 기다리면서 급하게 밥을 먹고 총을 장전하는 공간으로서의 집,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목격하게 되는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피로감이 남성의 세계를 구성한다. 반대편에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감싸줄 가족이 기다리는 산간의 오두막집이 있다. 이곳은 범죄에 대한 탐문과 감시가 이루어지는 곳일지라도 밝고 따뜻한 빛에 노출되어 있다. 두 세계에서 비난받는 과도한 폭력성과 무능함의 대명사인 ‘짭새’라는 정체성에서 빚어진 갈등은 세상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짐과 사람을 믿어야 살아갈 수 있는 눈 먼 여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얼어붙은 주인공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범죄 때문에 인간에 대한 환멸만 가지고 있던 짐은 누구든 믿어야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 다시 찾아온다. 두 사람의 고립된 상황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도시 후미진 곳의 범죄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촉각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숙명적인 어둠을 마주보도록 이끌어간다. 새로운 집을 방문한 짐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과 구원이 주어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레이는 그가 황량함을 견딜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는 여운을 남긴다.
<야생의 순수>는 필름 느와르, 서부극, 멜로드라마를 만들어온 레이의 지형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영화이자 위의 두 영화와는 다른 방식의 귀향에 대해 말한다. 레이는 에스키모의 관습과 삶의 태도를 통해 문명과 야생의 공존, 법과 자연과의 공존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꺼내면서 서양인의 시선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레이가 바라본 에스키모 이누크(안소니 퀸)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는 세 가지 국면을 맞으면서 확장된다. 첫째로 에스키모의 삶과 관습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풍부한 정서적 반응을 통한 삶의 모습이다. 이누크는 “함께 웃을” 아내를 찾고 있다. “웃는다”는 에스키모의 언어에 담긴 성적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산, 삶의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의 탄생은 이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에게 아내는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한 환경의 일부이자 가족을 구성하는 출발점이고 일상의 모든 것을 함께 헤쳐 나가는 소중한 존재다. 두 번째는 백인과의 접촉으로 인한 이누크의 변화다.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죽어간 동물의 존엄성을 지켜오던 그들의 관습이 총이라는 차가운 죽음의 도구로 인해 백인들의 자본과 법의 논리와 충돌하게 된다. 세 번째는 백인의 법질서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는 이누크를 잡으러 온 경찰의 추적 때문에 발생한 가족과의 이별과 재회다. 에스키모의 문화와 삶의 태도에 무지한 백인은 단지 교화시켜야 할 야만인으로 이들에게 접근하지만 백인 거주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이누크는 백인 경찰의 목숨을 끝까지 책임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레이는 가족의 탄생, 백인과의 접촉으로 인한 변질의 과정을 진솔하게 뒤쫓는다. 웃음이라는 다양한 표현들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삶과 죽음의 관점,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겸손함, 영혼과 물질에 대한 두 세계의 차이점이 하얀 눈밭, 빙하와 동물들, 백인에게 포획된 동족의 망가진 삶, 백인 선교사와 경찰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자연의 법을 따르는 인간과 사회의 법 제도를 따르는 인간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지, 다른 문화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공존의 가능성에 대해 정직하게 바라본 후 레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누크의 가족을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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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가 암투병중이던 1979년, 빔 벤더스와 함께 연출한 <물 위의 번개>(1980>에서 레이의 집은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원죄의 굴레처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절규는 그의 고통스러운 기침소리에 묻혔지만, 그 순간 비로소 레이는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귀향의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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