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부대행사

부대행사

'이지훈의 시네필로' <가버나움>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2019-01-17(목)  - 소극장
1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가버나움 2019.1.17(목)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1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가버나움>

 

'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영화는 베이루트 빈민가 아이들의 지옥 같은 삶을 그렸다. 진솔한 느낌을 준다. 실제 베이루트 거리에서 촬영하며 직업 배우를 거의 쓰지 않았고, 베이루트 빈민가와 거리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담았다. 어린이의 키 높이에서 주인공을 묵묵하게 따라가는 카메라는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세계를 진솔하게 전달한다.

영화의 주제 또한 간접적·우회적인 방식보다는 다소 직설적·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대표적으로 겨우 열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고 명쾌하다. 이처럼 주제 설정과 연출이 직설적인 데 비해 연기는 절제되었다고 할까. 어린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감정의 절제를 보여준다. 아니, 연기라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우러난 모습으로 봐도 좋겠다.

오직 고난의 삶에 찌들고 절어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담담한 모습, 아마도 체념에서 나온 것 같은 달관한 표정을 초등학교 연령의 어린이들이 보여주는 것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영화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반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영화 후반부 주인공과 어머니가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이 어른거린다.

주인공 자인의 눈동자에 한순간 눈물이 핑 돈다. 그러나 자인의 눈동자는 곧이어 차분하고 무표정한 눈빛으로 되돌아간다. 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토록 어른처럼 만들었을까. 영화는 어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장벽 앞에서 고난을 겪고 좌절하고 조로(早老)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먼저 영화 제목부터 생각해보자.

 

가버나움: 예수의 도시

 

    오프닝 타이틀은 베이루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부감 화면에서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제목을 병기한다. 이때 가버나움의 프랑스어 표기[Capharnaüm]는 영화의 전체 설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영어에서 가버나움[Capernaum]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 이름이고, 예수가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곳을 뜻한다. 반면 프랑스어 가버나움은 중의적이다.

    예수의 도시란 뜻 외에도 잡동사니를 두는 곳또는 혼돈’(chaos)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뜻한다. 말하자면 프랑스어 가버나움은 기적과 혼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어째서 예수의 도시가 혼돈을 뜻하게 됐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불교에서 나온 단어인 야단법석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장소에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구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한편 가버나움의 실제 역사를 생각할 때 그 이중적 의미는 좀 더 깊은 울림을 던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창했던 이 도시는 서기 7~8세기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고 폐허로 변했다. 도시 전체가 잡동사니 쓰레기더미처럼 변한 것이다. 베이루트가 한때 지중해의 파리, 지중해의 스위스(금융 중심이란 뜻)로 불렸지만 지금은 쇠락한 것처럼 말이다.

    이 맥락에서 영화는 고대 도시 가버나움을 현재의 베이루트에 대한 비유로 삼고, 가버나움에 연관된 성경의 주제들을 배경으로 가져온 것 같다. 여기서 문제의식은 단순히 한때 번창하던 도시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넘어 그 멸망의 문명사적 원인을 살피고, 소생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마태복음에는 뜻 깊은 구절들이 있는데, 영화와 관련해 멸망, 어린이, 가족상잔이란 주제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의 구절들

 

    먼저 멸망의 테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1:21-23) 가버나움 일대의 사람들이 현실적 이익에만 집착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보고 예수가 탄식하는 대목이다. 가버나움이 음부(하데스=hell)에까지 낮아진다는 것은 ()지옥이 되고, 멸망한다는 뜻이다. 가버나움이 지옥, 폐허, 멸망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럼,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대답은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이것은 교만 독선 아집을 버리라는 뜻이다. 또 어린이와 같은 약자를 인격체로 대접하고 존중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덧붙은 구절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요컨대 기성 사회가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옥으로 변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가버나움도, 베이루트도 이 문명사적 패러다임 전환의 메시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의 구절들은 가버나움이 지옥이 된 이유를 밝히는 말이자 소생의 해법이 담긴 말인 셈이다.

이처럼 어린이의 위상을 높게 세운 것은 어린이나 여자가 한 사회의 표준적인 개체로 여겨지지 않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어린이에 관한 일련의 언급에서 한 도시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헤아리는 기준으로 어린이가 등장했고, 영화는 이 관점을 채용했다는 점이다.

 

성경적 테마

 

    다시 말해 영화는 가버나움의 이중적 의미, 즉 예수의 기적과 대조되는 멸망, 폐허, 지옥의 양면성을 배경에 깔고 있다. 특히 어린이의 관점에서 영화는 만약 사회가 어린이를 영접하지 못하면 지옥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메시지는 베이루트 빈민가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조명하며 현재의 레바논, 베이루트를 겨냥한다.

    표층 차원에서 영화는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지만, 주제 설정에는 이렇듯 성경적 주제가 깔려 있다. 이 관점에서 예수가 가버나움의 미래를 언급하는 구절 하나를 덧붙여 보자.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0:21)

    이 구절은 영화 속 부모가 지주에게 몇 마리의 닭을 받고 어린 딸을 팔아넘기고 그 딸이 얼마안가 죽는다는 설정, 또 주인공이 부모를 고소해 법정에 세운다는 설정을 연상하게 한다. 또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 드니 빌뇌브, 2010)이 그린 것처럼 과거 레바논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킨 레바논 내전(1975~1990)에는 동족상잔을 넘어 가족상잔이라고 말할 수 있는 비극적 측면이 있다.

    이처럼 감독이 오늘날 베이루트의 모습에서 고대 도시 가버나움의 모습을 보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 기독교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갈등으로 시작된 레바논 내전은 어느 쪽의 잘잘못을 따지기 힘들 만치 서로를 할퀴고 뒤엉키며 온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종전 후 평화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과 이를 둘러싼 국내외 갈등은 또 한 번 레바논을 무너뜨렸다.

 

레바논, 가버나움

 

    시리아 난민들이 150만 명이 넘게 레바논으로 이주해왔는데, 원래 레바논 인구가 450만 명 정도였으니 그 난민 숫자는 레바논의 수용 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들이다. 영화 <가버나움>이 그린 것처럼 UN은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출생 등록을 하지 않고, 경제적 이유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결혼시키는 조혼(早婚)으로 고통 받는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미국, 이스라엘, 유럽 EU를 한편으로 하고 시리아, 이란, 헤즈볼라, 하마스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국내외 갈등은 레바논을 지속적인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오늘날 레바논 정부는 이 총체적 위기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이에 대해 시민들의 좌절감도 커졌다.

    지난 2015년부터 진행된 쓰레기 시위는 시민들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쓰레기가 도시를 가득 채우자 이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하는 정부가 바로 쓰레기란 여론이 들끓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수돗물을 구하지 못해 바닷물을 길어 올렸던 것처럼 레바논은 전력, 상수도와 같은 공공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베이루트가 그야말로 가버나움 즉 폐허, 쓰레기더미가 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 후반부 주인공과 사진사의 대화에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 사진사가 주인공에게 좀 더 왼쪽으로 가달라, 또 오른쪽으로 가달라고 얘기하자 주인공이 말한다. “전 이쪽이 오른쪽이고, 이게 왼쪽이에요.” 기성 사회는 자신의 입장에서 오른쪽 왼쪽을 생각할 뿐,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멸망의 문명사적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아이 되기 Becoming Child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킨다는 것은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 convert이고, 상대가 서있는 장’(立場)에 서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기는 이들이 서있는 장에 함께 서는 것에서 출발한다. 감독은 베이루트 사회가 영화 속 사진사와 마찬가지로 어린이가 서있는 장에 서보지 않았고, 이들과 같이 되지 않았으며, 이들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베이루트가 지옥이 됐다고 보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서있는 장에 함께 서지 않는 것은 어린이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린이를 무시 방임 방치하는 것을 방임죄 Crime of Neglect로 부른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 또한 방임죄다. 영화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어른들을 고발한다. 찰리 채플린의 <키드>(The Kid, 1921)에서 주인공 남자와 아이를 떼어놓는 어른들처럼 부모가 어린 아들과 딸의 생각을 무시하고 딸을 팔아넘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이 부모를 법정에 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부모를 고소했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주인공은 자신의 출산 자체가 방임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이처럼 주인공은 무책임한 부모에게 출산의 이유를 묻고 판사에게 호소한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를 가리키며] 그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영화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 1959)에서 주인공이 하고 싶은 말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감독은 베이루트 어린이, 아니 세상 어린이를 대변해, 아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아이들은 원치 않는 세상에 던져졌다. 그야말로 실존철학적인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이들의 존재를 무시,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겠나. 그러면서 감독은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라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피임과 낙태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임의 결과: 같은 죄를 반복하다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을 꼽으라면 영화 후반부 주인공과 아기가 헤어지는 장면을 들고 싶다. 이 장면이 슬픈 까닭은 단지 두 사람이 헤어진다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이 아기를 팔아넘기는 상황 때문이다. 부모가 여동생을 팔아넘길 때 그토록 저항하고 절규하던 주인공이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돈을 받고 아기를 판다. 비록 뻔뻔스러운 부모에 비해 처연한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비슷한 것이다.

    같은 죄가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비극적인 것이다. 방임죄가 무거운 이유는 이것이다. 방임죄는 부모의 죄악을 자식이 반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같은 죄를 반복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야말로 비극적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비토리오 데시카(Vittorio De Sica) 감독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죄악의 반복이란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형제처럼 지내던 아이들이 어느 날 어른들이 짜놓은 죄악의 함정에 빠져 교도소에 갇히고 마침내 어른들처럼 서로를 해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구두닦이>(Sciuscià 1946). 젊은 시절 공무원으로 헌신했지만 지금은 쥐꼬리만 한 연금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퇴직 공무원이 결국엔 사회가 자신을 버린 것과 똑같이 자신의 반려견을 버리려 하는 상황을 그린 <움베르토 D.>(Umberto D. 1952).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이 종국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치려 하게 되는 상황을 그린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 1948).

    문제는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낳았던 처절한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는 지역이 있다는 것, 또 그런 상황에서는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정서와 문제의식이 언제나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호소한다는 것이다. <가버나움>이 제시하는 죄악의 반복이란 주제가 와 닿는 이유도 이런 보편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가족 관계에서 죄악의 반복은 곧 죄악의 대물림이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 보면, 주인공의 부모도 누군가의 아이였을 것이고, 그 부모 또한 이들을 방임했다. 나아가 사회도 이들을 방임했다. 이 점에서 영화 속 부모의 항변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죄악의 대물림을 끊으려고 얼마나 애썼나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이 어린 주인공만큼, 또 에티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자인 라힐만큼 몸부림치고 애쓴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만 강변할 뿐(“제 입장 돼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식들의 입장을 돌이켜 보는 데에는 인색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게 해서 죄악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것이다. 죄악의 총체성. 베이루트를 내려다보는 부감 앵글은 도시의 총체적 상황, 즉 가버나움의 상황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감독의 베이루트 사랑

 

    나딘 라바키 Nadine Labaki 감독은 1974년생이다. 한 살이 되던 해에 레바논 내전이 시작되었으니 유년기 15년을 전쟁과 함께 보낸 셈이다. 감독은 마론파 기독교인으로 프랑스가 세운 성 요셉대학을 졸업했다. 그럼에도 그동안 제작한 영화들은 서로 다른 종교의 공존을 찾고 레바논, 베이루트를 소생시키는 염원을 담았다.

    <이제 어디로 갈까>(Et maintenant on va où? 2011)는 레바논의 한 시골 마을에서 기독교 주민들과 이슬람 주민들의 갈등을 풀어줄려고 분투하는 여인들을 그린 코미디 영화다. 첫 장편 영화인 <카라멜>(Caramel 2007)은 베이루트의 한 미용실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여자들의 일상과 사랑과 우정을 그린 코미디인데, 엔딩 화면에는 나의 베이루트에게”(À mon Beyrouth)란 문구가 나온다. 베이루트에 대한 사랑이랄까 소생의 염원을 느끼게 한다.

    감독이 2016년 베이루트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것도 이 염원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감독은 베이루트 마디나티 Beirut Madinati’[Beirut My City]란 정당의 후보였다. 이 정당은 <가버나움>이 묘사한 것과 같이 열악한 도시 공공 인프라(상수도 전기 주택 쓰레기...) 개선을 목표로 정파와 종교의 장벽을 넘어 연대한 시민 조직이다. 12개 지역 가운데 6개 지역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얻을 정도로 선전했다. 비록 승자독식 선거제도’(FPTP) 때문에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가버나움>을 제작한 것도 이런 사회 실천적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2014년 감독이 페이스북(2014. 8. 12.)에 올린 장문의 글은 영화의 모티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감독은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어린이를 화자로 설정해 어린이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기성 사회의 모순을 질타한다. 글에서 중요한 내용을 옮겨본다. (내용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누고 제목을 붙여봤다. 특히 영화에 직결되는 부분에는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며 간단한 언급을 덧붙였다.) 

 

감독, 어린이의 목소리로 말하다

 

- 왜 저를 낳으셨나요?

미안해요. 그만둘래요. 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전 당신들의 세계에 맞지 않아요.전 자라나서 당신들처럼 되고 싶진 않아요. 어른들은 저를 실망시켰어요.왜 저를 낳으셨나요? 그토록 빨리 생명을 앗아갈 거면서왜 저를 낳으셨나요?* 제가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을 거면서.”

* 영화 속 주인공 자인이 부모를 법정에 소환하는 기본 계기다.

 

- 결핍 박탈(궁핍) 학대 성폭행편협제 작은 신체는 당신들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어요. 전 배고픔, 박탈(궁핍), 쫓겨남, 학대, 성폭행을 이겨내기엔 너무 약해요.당신들의 폭력, 혐오, 왜곡(도착 perversion), 편협함(비관용 intolerance)을 이해할 수 없어요.이것은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나요? 전 꿈이 있었고, 계획이 있었어요.*그건 살인자, 혐오자, 고문기술자, 강간범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 자인이 판사에게 이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한다. “전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 그것이 신의 가르침인가요?

당신들이 신의 가르침으로 이해한 것이 이런 것인가요?신은 [전쟁터의] 장군 warlord, 지주 landlord도 아니에요.전 당신들의 혼돈 chaos 속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당신들의 세계에 맞지 않아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과분해요.”* 이때 혼돈은 가버나움에 상응한다.

 

어린이라는 가치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다함께 예배하고 절을 하는 가운데 자인 혼자 우두커니 앉아 그 모습을 응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처럼 어른들로부터 버림받고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종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어른들의 신앙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감독은 이 장면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어떤 신념, 이념, 제도도 보편적 인간 가치를 짓밟아선 안 된다. 그리고 보편적 인간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은 바로 어린이들의 행복과 생존이 아닐까. 달리 말해 어린이들의 행복과 생존을 도외시하는 신념, 이념, 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레바논 출신 마론파 기독교인이었던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예언자> ‘아이들에 대하여편에서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대의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 당신이 그들처럼 되려 하는 것은 좋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려 하진 말라고 했다. 삶은 과거로 역행하지도, 어제에 머무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브란의 말처럼 어른들은 과거에 형성한 선입견, 편견, 아집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가로막는지 모른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자신의 생일조차 모르던 주인공은 마침내 엔딩 장면에서 드디어 자신에게도 신분증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웃는다. 이 정지 화면은 가버나움이란 말의 이중성, 그 기적과 혼돈·멸망의 양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어린아이를 인격체로 대접하고, 그들의 생각과 생존과 행복을 보장할 때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메시지.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신념, 이념, 제도는 어린이들의 행복과 생존을 전제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 어린이가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린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 이 생각을 대전제로 한다면 세상의 갈등과 분쟁은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엔딩의 정지 화면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