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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특별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2019-06-11(화)  - 소극장
6월 이지훈으 시네필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2019.6.11(화)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6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존재의 미학'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Varda par Agnès, 2019)는 감독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한 자화상 형식의 에세이 영화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감독이 삶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존재의 미학을 보여주는 듯하다. 먼저 제72회 칸국제영화제가 아녜스에게 헌정한 포스터를 살펴보자. 포스터는 26세의 아녜스가 첫 작품인 <라 포엥트 쿠르트>(La pointe courte, 1955)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았는데, 감독의 삶과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아녜스는 65년간의 활동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칸 영화제에 초대받았지만, 2015명예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뿐이다. 물론 영화제가 이처럼 포스터를 헌정한 것은 최고의 예우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감독의 사후에 바치는 예우란 면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포스터에는 감독이 유년기를 보낸 프랑스 남부 세트(Sète)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감독에게 바다는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던가. 감독은 자신의 첫 영화를 세트의 바다에서 시작하고, 이번 영화를 노르망디의 바다에서 마무리한다.

    아녜스는 한 남자의 어깨를 밟고 올라 서 있다. 이처럼 장난기 넘치는 창의성과 즉흥성은 아녜스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것이다. 첫 영화는 그야말로 저예산 영화였고, 그 제작 과정은 협동조합 결성을 통한 협업 방식이었으며, 여기서 보여준 독립·협업·모험 정신은 그 뒤로 감독의 일관된 정신적 태도가 된다. 한편 촬영장치가 올라간 구조물을 뜻하는 프랑스어 플라토(plateau)는 즉각적으로 아녜스가 당시에 몸담았던 연극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아녜스는 1951년부터 10년 간 국립민중극장(TNP) 전속 사진사였고, 아비뇽 축제에 참여했다. 1954년까지 영화를 거의 관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녜스가 누벨바그의 시초로 평가되는 <라 포엥트 쿠르트>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연극무대 사진사의 경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 아녜스 예술세계의 중추를 이루는 사진과 영화, 고정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 몽타주와 미장센의 대비, 그리고 시적인 언어의 결합은 연극무대 경험에서 길러졌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거기에 덧붙여 미술사 지식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겠지만).

 

1994년에 나온 자서전

 

    영화 제목은 1994년 감독이 펴낸 저서의 제목과 같다. 영화가 2000년도를 전후로 내용이 나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은 물론이고, 2000년대부터 진행된 시각예술작업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은 형식면에서 이번 영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책은 아녜스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이 자전적 서술 형식을 표현하는 제목은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1975)가 먼저 선보인 것인데, -뤽 고다르 또한 아녜스의 저서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월의 자화상>(1995)을 제작한다. 고다르가 시각화한 것처럼 자전적 서술은 빗금(/) 구조로 이뤄진다. 빗금은 자아를 대상화하는 자아의 균열을 표현하고, 상징적으로 거울을 의미한다.

    책은 알파벳(Abécédaire) 순서로 구성됐다. 이 구성은 겉보기에 여러 가지 항목들을 깔끔하게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논리적 서술이나 기승전결을 갖춘 문학적 서술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다. 이런 서술은 저자의 체계적인 설명을 바라던 독자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 대신 독자들은 시적 언어의 리듬과 아포리즘의 미학을 즐길 수 있다.

    이 서술 형식은 또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4분의 1 정도는 사진으로 채워져 있고, 그 뒤로는 파편적인 단상들이 이어진다(이 같은 서술은 사랑의 단상(1977)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서술 형식은 논리적 서사보다 시적 언어를 우위에 놓는 작가들이 선호한다. 아녜스의 저서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질 들뢰즈는 TV 영상 질 들뢰즈의 A to Z(l'Abécédaire, 1995)를 제작했다.

    여기서 아녜스가 불연속적인 시적 언어를 선호하며, 자신의 영화쓰기(Cinécriture)를 책 쓰기로 실현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영화쓰기의 첫 번째 특징은 글쓰기로 작성된 시나리오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아녜스의 책은 그보다 일 년 먼저 나온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서전 글쓰기(Écrire 1993)와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뒤라스는 자서전을 논리정연하게 구성했을 뿐더러, 고독과 글쓰기의 관계를 강조했다.

    고독의 글쓰기, 글쓰기의 고독. 다시 말해 고독이 없으면 글쓰기도 없고, 고독은 글쓰기의 필수 요소란 것이다. 반면 아녜스의 예술에서 필수 요소는 만남이다. 이번 영화도 예술적 영감이 현실 속에서 우연이란 형태로 찾아온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때 우연은 곧 우연한 만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녜스의 특별한 자서전은 삶과 예술이 결합하는 존재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재의 미학은 이번 영화의 기조를 이룬다.

 

존재의 미학

 

    존재의 미학은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존재의 미학이란 용어는 미셀 푸코가 만든 것이지만 그 개념은 먼저 프레드리히 니체가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의 미학은 유럽 문명사의 관점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원래 유럽 형이상학에서 주축이 되는 범주는 존재와 인식이었다. 이제 존재의 미학은 형이상학의 무게 중심을 존재와 인식에서 미학으로 이동시킨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때 미학이 일반적인 미적 현상에 관한 학()을 넘어 삶의 근원적 체험에 관한 학이란 점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하 <해변>)에서 한 대목을 들어보자. 아녜스는 <창조물들>(Les créatures 1965)의 영화 필름으로 오두막을 설치하고, 그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란 뭘까? 여기에 있으면 영화 속에 사는 것 같고, 영화가 내 집인 것 같아. 늘 이 속에 살았던 것 같아.”

 

    아녜스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존재론적, 인식론적 정의를 내리는 대신 영화는 내 집이라고 답한다. 이처럼 예술이 삶의 근원적 체험과 결합한다는 면에서 존재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도퀴망퇴르>(Documenteur 1980)는 미국 LA 해변에서 기이한 모습을 담는다. 한 사람이 몸 위에 성경책을 올린 채 누워있고, 그 곁에 두 사람이 잠자코 꿇어앉았다.

 

우린 이해가 안 되는 걸 찍는 것도 수긍했어요. 영화에서든 다른 것에서든 느끼고 경험해보는 게 중요하니까요.”

 

    영화라는 예술 행위가 단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나, 감독이 계획한 것만을 담는 게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담는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미적 현상을 넘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여기서도 아녜스는 삶의 근원적 체험과 연결된 존재의 미학을 표명한다.

    더구나 아녜스는 말 그대로 자신을 작품화하는 행위도 지속했다. 아녜스는 20대부터 일관되게 바가지 머리’(bowl hair) 스타일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수도승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묘한 이미지를 창출했다. 또 두 종류 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은 버섯처럼 보이는 헤어스타일과 연동해 장난꾸러기 같은 이미지를 낳았다.

    또 아녜스는 머리 색상과 의상, 그리고 자신의 영화사인 시네-타마리스(Ciné-Tamaris) 건물을 보라와 분홍으로 통일했다. 이것은 심장 모양의 감자와 함께 아녜스의 엠블럼처럼 자리 잡았고 예술가 자신을 작품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삶의 작품화와 연관된 존재 미학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작품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녜스의 작품은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초기 다큐멘터리인 <무프 거리 오페라>(1958)는 첫 딸을 임신했을 때의 기대와 두려움을 담았고, <도퀴망퇴르>는 남편인 자크 드미와 결별하는 상황을 반영했고, <낭트의 자코>(1991)는 드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그렸다. 한편 아녜스의 작품에는 인물화(portrait) 성격이 강하다(이 글에서 자전적 요소는 이야기 narration 구조를 지니는 것을 말하고, 인물화는 시각적인 인물, 사물, 얼굴 묘사를 말한다).

 

인물화 성격

 

 

    어쩌면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인물화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아녜스의 인물화는 자화상과 함께 타자의 인물화를 포함하는데, 여기서 타자는 타인(인간)과 사물을 포괄한다. 가령 아녜스가 감자를 마치 인간을 대하듯 카메라로 찍거나 설치 작품으로 제시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좋겠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의 자화상이 타자의 인물상으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해변> 도입부에서 감독은 뒷걸음을 걸으며 수다쟁이에 작고 통통한 할머니자기 인생 얘기를 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말 관심이 끌리고, 촬영하고 싶은 건 타인(타자 autres)들이죠. 내 궁금증을 자극하고, 동기를 주며, 내게 호소해오고, 날 당황하게도, 열광하게도 하죠.”

 

    2008<르 피가로>(Le Figaro) 신문 인터뷰에서 감독은 <해변>에 대해 모든 사람의 자서전을 만들려 했다고 말한다.

 

매우 사적인 영화이지만 나 자신보다 타인들에 대해 더 많은 걸 말해줍니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책 제목처럼 누구나의 자서전’(Everybody’s Autobiography)을 만들려 했죠. 누구라도 영화의 여러 순간들의 감정과 연결될 수 있는.”

 

    아녜스의 예술세계는 어떻게 자화상에서 만인의 초상화로 확장될 수 있었을까. 또 자화상이 누구나의 초상화로 확장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 예술가의 자화상이 지니는 성격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예술가의 자화상

 

    일반 상식과는 달리 예술가의 자화상에는 자기 정체성, 내면 표현, 자아 분석을 넘어서는 요소가 있다. 아녜스가 자화상 작업의 본보기로 여기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회화 기술의 정통함을 보여주는 전시”(Ernst van de Wetering), “회화의 시험이란 요소를 포함하고, 쿠르베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비전, 예술 철학을 보여주는 선언문”(Michèle Haddad) 성격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분명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화상 장면에는 이런 측면이 있다. 아녜스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을 예찬하며(“작은 디지털 카메라는 다르게 찍고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이 장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확실히 아녜스가 마음먹은 예술의 방향을 알리는 매니페스토성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화상 속에 타자가 들어오는 과정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이 흥미롭다. “우리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이건 우리를 본다. 우리를 파고들고, 마음을 차지해서 중요한 것이 된다면”(시선을 주었다). 낭시는 “Ça me regarde!”(그것은 나를 본다!: 그것은 내 문제다. 내 소관. 내 책임이다)란 프랑스어 표현을 상기시킨다.

    사물(사태)에 실제 이 달려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사물을 중요하게 여길 때 그것이 우리를 바라보는 걸로 느끼고, 이때 사물의 시선은 우리를 하나의 의미, 방향으로 끌어들인다. 이때 자아가 타자를 의식하고, 타자에게 의식이 열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아녜스는 <다게레오 타입>의 촬영감독인 뉘리트 아비브와 대화를 나눈다.

 

뉘리트 : 우리가 바라볼 대상을 선택했다면, 본다는 것 자체로 평범한 것도, 더는 평범한 게 아니겠죠.

아녜스 : 세상에 평범한 건 없어. 내가 찍는 이와 공감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특별하게 생각한다면.

 

    ‘평범비범으로 바꾸는 시선이라고 할까. 자의식이 열릴 때 자아는 타자를 각별하게 바라보고, 타자도 자아를 바라본다(자아가 타자의 시선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타자는 사람뿐 아니라 자연, 사물을 포함한다. 이번 영화에서 아녜스는 해변의 아이들이 모형 새를 설치해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새를 보며 말하면 기분이 좋죠. 진짜 새든 가짜 새든 알아듣진 못해도요.” 아녜스는 지금 타자의 시선에 관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인물화의 시선

 

    이렇듯 타자에게 열린 자아를 그린 자화상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담겨 있다. 낭시의 말처럼 이탈리아어 ritratto초상화를 뜻하며 ‘(뒤로) 물러남을 뜻한다. 초상화에는 현재의 자신이 물러나고, 또 다른 자신이 앞에 나타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법하다. 이 관점에서 <해변> 도입부, 아녜스가 뒷걸음을 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뒷걸음은 과거(기억)로 되돌아간다는 뜻과 함께 자화상의 본질이 뒤로 물러남에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자화상에는 이처럼 자기 정체성자아 속 타자가 공존한다. 자화상 속 타자는 자아가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반영하거나, 자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타자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런 뜻에서 자화상은 자기뿐 아니라 타자를 함께 그린 것이다. <아녜스 V에 의한 Jane B>(1988)에 등장하는 거울 장면을 생각해보자.

 

배우는 카메라를 보면 안 된단 규칙도 깼죠. 카메라를 봐. 그래야 날 보지. 너의 자화상을 내가 찍는 거야. 거울 속의 넌 혼자가 아냐. 항상 날 대신해 카메라가 있을 거야. 거울이나 프레임 안에 내가 보여도 어쩔 수 없어.”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해보자. ‘타자를 함께 그린 자화상. 또는 타자가 그린 자화상’. 아녜스는 이에 대해 찍는 여자와 찍히는 여자. 우린 공범(complice)이었죠.”라고 말한다. 이 거울에는 자아와 타자의 스며듦(공조, 관입)이 표현됐다. 그리고 <해변>에서 아녜스는 거울로 스테프의 얼굴을 하나씩 비추며 말한다.

 

거울은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 애용하는 도구죠. 하지만 저는 거울로, 저와 함께 일했던 모두를 소개했어요. 영화란 게 타인들과 나’ ‘나와 타인들일 수 있단 걸 이렇게 표현했죠.”

 

    이 언급은 단순히 영화가 집단 협업이란 상식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자화상이 타자의 인물화와 겹치고 확장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아녜스는 여러 개의 거울을 해변에 설치해 하늘, 바다, 모래, 아녜스 자신을 비추게 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반성과 반영, 자신의 돌아봄과 타자의 반영이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그렇게 해서 자화상은 인물화가 되고, 모두의 자화상이 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비디오 설치 작품 <누아르무티에의 미망인들>(2006)을 이해할 수 있다

 

프레임 외부의 응시

 

 

    인물화의 시선에 관해 한 가지를 덧붙이자. 낭시는 인물화 속 인물이 특별한 대상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곳을 본다고 말한다. 때론 화가(관객)를 보지만, 때론 정처 없는 외부를 본다는 것이다. <낭트의 자코>(1991)에서 자크의 시선이 그렇다. 자크는 카메라를 바라보다 이윽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한다. 아녜스는 자크의 눈을 클로즈업한다. 한편 아녜스는 단편영상 <한 이미지를 위한 1>(Une minute pour une image 1983)에서 가족사진(아녜스가 태어나기 전인 1915)의 열여섯 명 가운데 오직 두 사람이 딴 곳을 본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바로 아녜스의 할머니와 어머니인데, 이들이 어딘가 같은 곳을 본다는 점이 아녜스를 궁금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프레임을 넘어 어딘가 딴 곳을 보는 것이 모계 유전이라고 말하며 아녜스는 그런 종류의 시선을 예술적 시선으로 여긴다. “즉석 사진을 보면 전과 후가 궁금했고, 영화라면 화면 밖이 궁금했죠.” 그 결과로 탄생한 작품이 <누아르무티에의 세폭화>(2005)이다.

    이렇게 해서 아녜스의 시선은 한층 더 확장된다. 그것은 자화상에서 출발해 만물의 자화상으로 뒤섞이고 넓혀진다. 그 바탕에는 자아와 타자가 상호 의존, 연관된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 인식은 마침내 자신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비전의 확장으로, 세계의 인식으로 넓혀져 간다. 그러면서 아녜스의 인물화는 자아/타자, /, /과 같은 수많은 경계를 흐리고 침범하며 확장되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자신이 처음 영화를 만들 때부터 도시와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줬다고 말한다. 실제 이번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해변의 아이들과 카르티에 재단 정원에서 만난 아이들 이름이 나온다. <라 포엥트 쿠르트>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각본·감독 아녜스 바르다, 그리고 라 포엥트 쿠르트 주민들이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영화가 집단 작업으로 만들어진다는 통설을 넘어, 창작 과정 자체에 타인들이 개입·참여한다는 천명이다. 작가주의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천명은 예술적 영감이 우연한 만남을 통해 찾아온다는 예술관에 연관될 뿐 아니라, 아녜스의 자화상(인물화)이 지니는 특성 즉 확장성과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자화상

 

    이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이 관점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데, ‘시간범주를 덧붙여 보면 좋을 것 같다. 아녜스는 노르망디 해변의 모래 바람과 함께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 장면은 영화 중반부 <해변>에서 인용한 장면과 공명하는 것이다. 아녜스는 거리에 모래를 부어 만든 해변 사무실에서 자크와 자신이 받은 영화상을 모아놓고 다 헛되고 헛되노니”(Vanitas Vanitatis)라고 말한다. 그 말과 함께 세찬 바람, 파도 소리가 들리고 트로피와 상패는 해변의 모래 이미지와 중첩되며 마치 트로피가 모래 바람에 사라지는 것 같은 인상을 연출한다.

    아녜스가 말한 라틴어 문구는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녜스는 자크와 자신이 받은 상을 놓고 바니타스화를 그린 셈이다. 바니타스는 덧없음(ephemerality, 일시·일회성)을 그리는 정물화인데, 이 덧없음은 영화 후반부에 인용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장면 속의 인물 이미지의 성격에 상응한다. “사진이 사라지는 건 익숙하지만, 바다는 너무 빨랐다JR의 말에서 표현된 것처럼 이 인물화는 덧없는 이미지들’(images éphémères)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인물화 이미지가 시간과 함께하는이미지란 것을 안다. <낭트의 자코>시간을 멈추고, 죽음을 부정한다는 평론에 대해 아녜스는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시간과 함께 있죠라고 반박한다. 시간을 멈추는 이미지는 세상의 존재와 시간을 초월해 영원한 이상형을 제시하는 이데아의 미학에 속한다. 반면 <다게레오 타입>에 관한 대담에서 아녜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가게 안 사람들과] 지속 시간을 함께 체험할 때 우린 그 시간 속에 들어갔어.” 이처럼 시간과 함께하는 이미지는 존재와 함께하고, 타자들과 시간을 함께하며, 우리가 함께 겪은 지속 시간의 두께를 보여주는 존재의 미학에 속한다. 그 이미지는 일시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담은 지속 시간의 두께가 한 사람의 일생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이번 영화의 라스트신에서 바로 그 장면을 본다.

    아녜스가 모래 바람 속에 사라지는 해변의 모습은 아녜스가 남긴 궁극적인 자화상이다. 자신의 삶-시간을 모두 바쳐 해변에 새긴 자화상이고, 바다와 바람과 모래와 함께 확장한 겨대한 자화상이다. 이것은 과장된 해석이 아니다. 아녜스의 자화상을 본 관객들은 언젠가 자신이 방문할 노르망디의 해변이 더는 평범한 해변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 장면은 <해변> 도입부 아녜스의 말과 공명한다. “사람을 열었을 때 거기 풍경이 있다면, 나를 열면 해변이 있을 거예요.” 아녜스는 그 내밀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풍경화일까, 자화상일까. 이처럼 아녜스가 일생 동안 한 작업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해변에서 자라고, 해변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예술적 삶을 이 자화상으로 승화시키는 존재의 미학을 실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