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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붉은 결혼식> - 비극인 줄 알면서도 비극 안에서 살아가야함을 받아들일 때 비극은 완성된다.2017-02-20
붉은 결혼식 스틸컷

 



붉은 결혼식


 - 비극인 줄 알면서도 비극 안에서 살아가야함을 받아들일 때 비극은 완성된다.


김영광 부산영화평론가협회


Review 프렌치 미스터리의 최고봉 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붉은 결혼식>(1973)은 샤브롤의 필모그래피 중 범속한 작품처럼 보인다. 주로 부르주아 공동체의 불륜, 치정, 살인 사건을 다룬 여타 작품들과 비극의 굴레를 같이하지만 의미적인 긴장 요소가 덜하기 때문이다. 흔히 샤브롤의 작품 세계를 부르주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프롤레타리아트적 맥락말이다. 이 맥락이 딱딱해진 원인은 샤브롤이 부르주아 공동체를 드러내는 어떤 방식과 관련 있는 것 같다. 그 방식은 부족함 없이 생활하는 부르주아 공동체에 생업을 뛰어야 생활이 가능한 ()부르주아-외부인을 들여보내는 것이다. 문제라면 샤브롤이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부르주아 공동체와 그 외부의 차이로 도덕적 판결을 기대해서가 아니었지만, 관객이 외부인의 관점에 기대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는 것이다. 환기할만한 건 샤브롤이 이념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들여보낸 외부인들도 부르주아 공동체를 정치적 관점으로 판단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사촌들>(1959)의 샤를이 있다. 그는 법을 공부하지만 균등 같은 사회주의 정의에는 관심이 없다. 부르주아 사촌을 총으로 죽이려했던 이유도 계급적 분노가 아니다. 샤를은 오발의 형식으로 자신에게 돌아온 총알처럼, 끝내 부르주아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는다. 더 직접적인 예는 혁명의 해에 만들어진 <암사슴>(1968)이다. 가난한 예술가 와이(WHY)는 부르주아 여인과 생활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르주아 여인의 외양을 모방하던 와이가 그녀를 죽이고 마는 결말은 부르주아들의 욕망을 욕망해보아도 이해하지 못한 오인의 형식이다. 실상 샤브롤이 부르주아 공동체에 외부인을 들이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한쪽의 손을 들어주거나, 둘의 차이를 반면교사 식으로 종합할 수 있는 역설(paradox)이 아니었다. 양자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간극을 가시화하는 시차(parallax)의 차원이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샤브롤 영화에 기괴한 형식으로 발생하는 비극의 근원은 시차 자체에 있는 셈이다.

 

<붉은 결혼식>은 부르주아 공동체 내부의 치정 사건을 사랑의 모티브로 촉발시키지만, 그 사랑의 혐의는 물질적 욕망과 완전히 결별되지 않는 보통의 샤브롤식 궤도에서 이탈해 있다. 그 이유는 시장인 폴이 아내 루시엔과 부시장 피에르의 불륜을 그대로 승인하고, 불륜남녀는 이득이 없음에도 폴을 살해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단순 치정을 그린 범속한 작품처럼 보일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폴의 이해할 수 없는 면모는 부르주아 공동체 내부에 존재하는 시차를 가시화 한 중요한 부분이다. 그 시차는 피에르와 루시엔의 격정적인 밀회를 다시 사회적 층위의 상징적인 지배 아래에 놓으면서 (라캉의 말처럼)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만든다. 실제로 피에르와 루시엔은 폴이 불륜을 승인한 후 성관계를 갖지 못한다. 폴을 살해한 두 사람이 교환하는 시선에 불길한 기류가 흐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전반적인 상황을 요약하자면 루시엔과 피에르는 성관계가 없는 결혼 생활에 불만을 느껴 불륜을 저질렀고, 불륜 기간 가운데 각자의 배우자와 좁혀질 수 없는 시차를 대면한 것이다. 피에르의 경우 창밖에 갓 결혼한 신부와 송장 같은 아내 사이의 간극을 대면한 순간 치사량의 약물을 먹이고, 루시엔의 경우 그간 알던 남편 폴과 불륜을 승인한 폴 사이의 간극을 대면하며 살인을 결심한다. 즉 두 사람은 각자 대면한 시차로 인해 앞으로 결혼 생활에 불행만이 남은 걸 깨달았고, 그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각자의 배우자들을 제거한 것이다. 불륜 와중에는 새 가정과 결혼 생활을 꿈꾼 적도 없는데, 이제 두 사람이 봉착한 건 (“성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지난 결혼 생활의 비극을 반복해야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종합이 가능한 인과관계가 아니며, 따라 해결 방법이 존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붉은 결혼식>의 성취라면, 각자의 시차로 인해 기괴한 형식으로 반복되는 비극의 굴레에 관한 샤브롤식 해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그리스 비극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 해법은 신과 신, 신과 인간처럼 양자 간 환원될 수 없는 시차가 비극의 근원이라면, 비극의 굴레 앞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행하는 탄원’, 끝내 비극이 해결될 수 없을지라도 비극 안에서 살아가야함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영화에서 탄원은 가장 무력한 위치에서 이 모든 비극을 짐작하고 있던 루시엔의 딸 엘렌으로부터, 죄를 자백한 루시엔과 피에르가 수갑을 찬 서로의 손을 포개는 겸손으로 이어진다. 샤브롤이 그리스 비극에서 주목한 건 무죄 판결을 받는 결말이 아니라 비극이 완성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샤브롤이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찍은 건, 영화가 세상의 비극을 멈출 수는 없을지언정 비극의 완성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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