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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영화 특별전 <도살장의 소년>2017-05-08

 



한 줌도 안 되는 구원일지라도

영화 <도살장의 소년> 

김현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Review Irish film special 아일랜드 영화 특별전 2017.5.2(화)~5.18(목) 


<도살장의 소년>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영화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잔혹한 성장영화인 것 같다. 성장영화? 그렇게 부르기도 뭔가 어색해 보인다. 어떤 영화를 성장의 이야기라고 할 때는 대개 주인공의 성숙의 과정을 그린 경우를 말한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가 인생의 어려움을 딛고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인생의 가치관이 불확실하고 경험이 미숙한 상태에서 성숙의 상태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품은 영화를 우리는 성장영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살장의 소년>은 그런 도식을 적용하기가 힘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년은 성장하지 못한다. 애초에 성숙의 기회를 얻지 못하며 소년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년의 성숙을 방해한다. 게다가 소년 스스로도 성숙을 맹렬히 거부하며 퇴행을 거듭하다 끝내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만다. 이것은 모든 성장영화의 관습과 훈훈한 해피엔딩을 거부하는 안티 성장영화이다.

 

<도살장의 소년>(The Butcher Boy)은 제목부터가 이미 반쯤은 스포일러다. butcher, 그리고 boy. 명사이자 동사인 butcher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있고 결국 소년의 운명을 지배하는 말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병원에서 전신 깁스를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그의 박복한 유년 시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1960년대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주근깨 많은 소년 프랜시(이몬 오웬스)에게 주어진 것은 온통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늘 술에 취해 아내와 아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트럼펫 연주자인 아빠,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엄마, 그들 가족을 돼지들이라 부르며 경멸하는 이웃 누젠트 부인, 마을을 벗어나 들어간 수도원에서는 프랜시를 성추행하는 신부가 있고... 산 넘어 산. 세상은 그에게 그저 가혹하기만 하다.

 

이런 세상에서 그가 버티는 방법은 세 가지다. 위악과 환상으로의 도피, 그리고 우정이다. 프랜시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더 삐뚤어진다. 그를 돼지라 부르며 경멸하는 누젠트 부인에게 돼지 흉내를 내며 조롱하고, 부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어놓는다. 부부싸움(사실상 대부분 엄마가 일방적으로 맞는다)이 일상인 집에서 가출을 시도하며, 억지로 보내진 수도원에서는 그를 성추행한 신부에게는 놀랍게도 그가 한 짓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으로 협상을 이뤄낸다. 점점 더 고통스런 상황에 처할수록 프랜시는 점점 더 사악한 아이가 되어간다. 이런 그를 위로하는 것은 환상이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의 유년 시절이 그러하듯, 프랜시도 악당을 쳐부수는 내용의 그 시절 대중문화에 빠져든다. 존 웨인과 인디언이 나오는 서부극이나 <도망자> 같은 TV드라마(훗날 해리슨 포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나 만화는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내재된 폭력성을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종교적인 환상에 빠져 성모마리아를 만나기도 한다.

 

프랜시가 끝내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환상의 붕괴다. 서부극 속 인디언처럼 손을 칼로 그어 말 그대로 피를 나눈 형제와 같았던 그의 친구 조는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프랜시와 거리를 두게 되고 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와의 우정을 부정한다. 프랜시가 환상 속에 머물며 성숙을 거부하는 동안, 그의 친구는 성숙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프랜시는 엄마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자신을 낳았으리라는 환상에 기대어 엄마아빠가 신혼여행을 한 곳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가 바라는 미담 대신 괴로운 진실만 알게 된다. 그 시절 핵무기에 대한 공포, 살벌한 반공의 분위기도 프랜시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멘탈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소년의 머릿속에선 핵이 폭발하는 장면과 만화에서 본 괴물의 이미지 등 온갖 환상이 나타나고, ‘자신을 괴롭히는 악당=빨갱이=외계인이라는 뒤죽박죽이 된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그의 머리에 성립되고 만다. 결국 어떤 환상에도 기댈 수 없게 된 프랜시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킬 상대를 찾아간다.

 

닐 조단 감독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을 들 수도 없는 소년의 이야기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를 말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도입한 패트릭 맥케이브의 원작 소설과 같이 감독은 어른이 된 프랜시의 나레이션을 적극 이용한다. 그의 목소리는 비극적인 상황을 설명할 때도 힘차고 때론 우스꽝스럽다. 마치 술 취한 성인 남성이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를 비웃듯이 회상하는 걸 듣고 있는 기분이다. 이런 화술은 영화 속 비극적인 상황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슬픔과 분노를 유발하기 보다는 기괴하고 부조리한 느낌을 준다. 감독은 주인공의 입장을 들려주되, 그를 섣불리 피해자 혹은 가해자라고 판결하게끔 유도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프랜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의 기구한 삶을 끝까지 보고 듣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어른이 된 프랜시(스티븐 레아가 주정뱅이 아빠 역할과 함께 12역을 연기한다)에게 어린 시절 그가 환상으로 보았던 성모마리아가 다시 나타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였으나 또 그만큼 세상에서 가장 사악해 보였던 소년이 초라하게 나이든 어른이 되어버렸을 때, 천사가 그에게 무언가를 전하며 영화가 끝난다. 한 줌도 안 되는 구원일지라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그가 최악의 인생을 산 최악의 인간이라고 해도. 이것이 닐 조단 감독의 최후변론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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