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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XV <거울의 여자들>2018-03-27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월드시네마 XV World Cinema XV  2018.3.23(금) ~4.22(일)

불안의 징후들

요시다 요시시게 <거울의 여자들>

 

시민평론단 심미성

 

여자는 24년 전 7월 11일, 아이를 낳고 행방불명된 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딸의 이름은 가와세 미와. 그러나 24년 만에 마주한 여자의 눈빛이 딸과 닮았다는 점을 빼고는 그녀가 잃어버린 미와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 여인은 지금까지 미와가 아닌 ‘오노우에 마사코’로 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 영화는 결말에 이를 때까지 ‘미와’와 ‘마사코’를 동일인으로 확정하지 않지만, 딸을 찾는 어머니 가와세 아이가 그렇다고 믿도록 만드는 많은 단서가 깔려있다. 가령 그녀의 딸 미와 역시 마사코처럼 기억상실과 거울을 깨는 히스테리를 앓고 있었고, 마사코가 습관적으로 공원에서 어린 아이를 유괴하는 날짜는 아이를 낳자마자 사라졌던 11일에만 되풀이 됐다. 무엇보다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모자수첩에는 ‘가와세 미와’와 딸 ‘나츠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렇게 많은 단서들을 갖고도 두 여자는 서로가 모녀관계라는 사실에 확신하지 못한다. 정말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강박적으로 믿고 싶어 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정체가 발견되기 직전의 불안 속에 있는 딸만이 모호하게 존재할 뿐이다. 사실 DNA 감정을 받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확인된다. 그러나 모호한 관계를 쌓아 가는 그들은 가족이기를, 또는 남이기를 염려하며 모든 것이 확인되는 그 순간을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시시게의 <거울의 여자들>은 그 불안의 징후를 전방위적으로 뿜어내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불길한 사운드인 공간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이렌과 기차 소리, 느린 호흡의 전개가 무언가 돌출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돌발하는 사건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넋이 나간 듯한 인물들의 표정이 섞여 똑똑히 설명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공포에 이르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두려움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주체는 불분명한 것, 모호한 것, 곧 ‘실체 없음’이다. 그들의 넋 나간 시선은 자주 허공에 가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대화하는 두 사람은 마주보질 않는다. 둘은 멍한 얼굴로 나란히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으며 그 응시의 대상은 다시 ‘실체 없음’이 된다. 마주보기를, 실체에 다가서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억상실을 가진 마사코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지?”라고 묻는다. 이와 같은 질문처럼 영화에서 혼란한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매개체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이 때 거울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 늘 깨져있다. 거울이 없다면 볼 수 없을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거울은 실존하는 것들을 비추지만 이 영화의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역설적으로 ‘부재’의 관념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거울의 여자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자를 살펴보자. 가와세 아이는 수십 년 전 딸을 잃었고 남편은 그보다 훨씬 전에 죽었다. 그녀가 딸로 믿고 싶어 하는 여자 마사코는 기억상실로 모든 혈연관계에 대해 무지한 상태인데다 스스로의 존재마저 흐릿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던 나츠키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할머니에 해당하는 가와세 아이를 ‘엄마’라 부르며 자랐다. 이 세 명의 여자는 모두 상실과 부재를 표식처럼 안고 살아온 불안정한 인간들이다.

 

영화가 이들을 프레임에 담는 방식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서사의 중심에 놓여 있지만 이들은 많은 쇼트 속에서 후경으로 밀려난다. 카메라는 거울 속 멀리 비친 그들의 또렷하지 않은 얼굴을 담고, 건물이나 탁자, 의자, 자동차 따위의 사물에 밀려나 배경처럼 존재하며, 간혹 프레임의 가장 구석진 모서리에 서 있는 아기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요시시게 감독은 어쩌면 이들의 감정 상태에 몰입하기보다 그들을 분리시켜 타자화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기존의 형식을 따르는 것을 일종의 패배로 보았던 요시시게가 터부를 건드리는 도발적 시도가 영화 곳곳에 심겨 있다는 증거들이다.

<거울의 여자들>은 공간적 배경을 일본과 히로시마로 삼고 있는데다 원자폭탄의 트라우마가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상을 피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설수록 이는 선연해진다. 결국 세 여자의 개인사에는 원폭과 피폭의 상흔이 씻기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종말의 기억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세대를 거쳐 되물림 되고 있다. 피폭의 위험 탓에 커가는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유괴범’이나 ‘살인자’일지 모르는 딸이라도 찾고 싶다. 역사와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히스테리는 모든 인물에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므로 달리 말해 이 영화가 묘사하는 모든 인물은 병든 역사이거나 그 안에 속한 개인인 것이다. 가와세 아이는 영화의 말미에 장지문에 비친 아이와 어머니가 놀고 있는 그림자를 본다. 그것은 그녀가 목격하는 환영이다. 그림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눈이 부시도록 환한 섬광이 비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종말의 한 국면을 겪은 병든 여자와 관념으로서의 히로시마가 겹친다.

 

<거울의 여자들>에서 후유증을 앓는 여자들은 줄곧 남성으로부터 위안을 찾는다. 가와세 아이가 그랬고, 오노우에 마사코가 그렇다. 혼돈과 불안 속에 위태롭게 존재하는 이들이 남성에게서 위로받는 행위는 결말에 이르러 조금씩 형세를 바꿔간다. 마사코는 뒤를 봐주던 남자를 비롯해 가족일지도 모르는 이들로부터 다시 행적을 감춘다. 가와세 부인과 나츠키가 장지문에 비친 해 저무는 핏빛 하늘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장면에서 나츠키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의 핏빛이야. 내 엄마일지 모를 여자의 핏빛이고, 그건 내 피 속에 흐르는 여자의 핏빛이야.” 이 영화의 결말이 희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 불행의 제 3막을 공표하고 있는지 분명히 헤아리기 힘들다. 하지만 요시다 요시시게는 하나의 서사가 하나의 의미를 갖는 형태를 거부했던 감독이기에 <거울의 여자들>을 불안으로 시작해, 불안을 앓다가, 불안하게 끝맺는 모호함의 영화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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