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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XV <라탈랑트>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2018-03-27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월드시네마 XV World Cinema XV  2018.3.23(금) ~4.22(일)

물, 꿈과 현실의 경계 - <라탈랑트>와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

 

한창욱(영화평론가)

 

얼마 전 개봉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2017)에서 ‘물’은 영화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은 사랑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성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인종과 민족, 계급과 성적 지향, 종과 종의 경계를 넘는 행위다. 그것은 물과 같다. 영화가 그리는 물의 형태는 무정형이다. 차창 밖 물방울은 자신을 밀어내는 바람의 흐름에 따라 흐르다가 나뉘고 또 합쳐진다. 물방울은 정해진 형태가 없기에 경계를 넘어 또 다른 물방울을 포용한다.

 

장 비고의 <라탈랑트>(1934)와 장 르누아르의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1932)에서도 물은 경계적 속성을 띤다. <라탈랑트>는 ‘라탈랑트’라는 배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담는다. 라탈랑트 호의 선장은 막 결혼을 마쳤다. 그는 새신부와 함께 배에 오른다. 새신부는 약속된 행복을 좇아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갈등을 겪으며 방황한다. 우리는 그들의 다툼과 화해의 과정을 따라가며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지켜본다. 물은 ‘흐름’이다. 그것은 거슬러 가지 못하는 운명과도 같다. 고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자는 배 갑판에 올라 배의 진행 방향을 거슬러 걸어간다. 카메라는 선체의 윗부분만 잡으면서 강물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한다. 그 구도 속에서 여자는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한 슬픔과 연민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물은 추락과 생명의 장소이기도 하다. 막 결혼식을 마친 선장과 여자가 배에 오르기 직전, 부선장 쥘은 선원에게 꽃을 꺼내오라 지시한다. 그들은 꽃이 시들지 않도록 양동이에 꽃을 담아 통째로 강물에 넣어 놓았고, 싱싱한 꽃을 새신부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필 그때 선원은 꽃을 꺼내다 물에 빠뜨리고 만다. 우리는 즉각 강물에서 생명과 추락이란 암시를 느낀다.

영화는 모순되어 보이는 두 성질에 조금씩 경계라는 측면을 더한다. 라탈랑트 호가 한 도시에 정박했을 때, 카메라는 강둑과 강물을 대각선 구도로 각기 절반씩 잡아낸다. 그런 상태에서 자전거 한 대가 강둑과 강물의 경계선을 따라 스쳐 지나간다. 추락한 꽃처럼 자전거도 추락할 것 같다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위태로운 순간이다. 이후 영화는 위태로움의 정서를 강물 바깥으로 확장하다. 파리에 도착하자 선장의 아내는 번화한 도시의 화려함과 역동성에 흠뻑 빠진다. 언제든지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곧 위태로움은 단절로 현실화된다. 선장과 다툰 여자는 배로 돌아오지 않는다. 선장은 시름에 잠긴다. 그러다 여자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여자는 물 속에서 눈을 뜨는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예전에 선장은 여자의 말대로 해봤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여자가 사라진 뒤 선장은 물에 뛰어든다. 여자를 보기 위해서다. 그 순간, 선장은 물속에서 소망을 실현한다. 그는 여자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강물에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환영을 본다. 환영을 보기 위해서는 간절한 소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물은 곧 소망을 환영으로 보여주는 곳, 영화-스크린과도 같아진다. 소망 충족 장소인 동시에 상실된 것을 기억하는 장소다. 상실은 성취되지 못한 약속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래서 강물은 추락과 상실을 감각하고, 약속된 소망을 기억하는 장소다.

 

<라탈랑트>가 표현적 측면에서 꿈과 현실을 나타낸다면, <익사 직전의 구조된 부뒤>는 플롯 내부에서 그것을 구축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즉각적으로 고전 ‘구운몽’을 떠올린다. 이 영화 또한 인물이 기존과는 다른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내용을 담기 때문이다. ‘구운몽’에서는 인물이 소망-꿈을 성취한 뒤 그 성취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익사 직전의 구조된 부뒤>에서는 각기 다른 인물들이 현실과 꿈의 내외부를 향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진-출입한다. 우리는 인물들의 그러한 차이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성을 환기하면서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는 ‘꿈’으로부터 출발한다. 신화 속 바쿠스와 님프가 사랑놀이를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곧 영화는 현실세계로 넘어간다. 큰 서점을 운명하며 부유하게 살아가는 레스팅구아는 시구를 읊으며 직원인 앤 마리와 연애를 즐긴다. 우리는 레스팅구아의 대사를 통해 앞선 장면이 그의 꿈과 같다는 점을 알게 된다.

레스팅구아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장소를 꿈꾼다. 그의 욕망은 꿈속 ‘바쿠스’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바쿠스가 되고 싶지만, 교양인으로서 그러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느강 주변을 바라보다 ‘완벽한 부랑자’ 부뒤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할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한다. 이후 레스팅구아는 부뒤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면서 ‘교양인’으로 만들려 한다. 아마도 그에게 부뒤는 자신이 되지 못하는 바쿠스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부뒤를 자신과 같은 교양인으로 만드는 것은, 현재 자기 자신에 대한 위안 행위다. 이루지 못할 꿈을 의도적으로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을 선회하여 표현한다는 그의 문학적 취향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는 레스팅구아의 노력과 부뒤의 자유분방함을 대조함으로써 부르주아의 내적 갈망과 현실 인식을 풍자한다.

<라탈랑트>와 마찬가지로 <익사 직전의 구조된 부뒤>의 ‘물’ 또한 일종의 경계면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부뒤가 세느강에 빠지자, 사람들이 퐁데자르 다리 위로 모인다. 그들은 레스팅구아가 부뒤를 구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레스팅구아의 서점 앞까지 몰려가 구경한다. 그 순간, 세느강은 사람들에게 스크린과 같은 공간이 된다. 안전한 곳에 머물러 ‘위기’라는 스펙터클을 구경하게끔 허락된 곳이다. 이는 집과는 반대되는 장소다. 사람들은 레스팅구아의 집이자 서점으로 가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다리 위 사람들은 강을 스펙터클이 현현하는 공간으로 맞이한다. 이와 달리 부뒤에게 강은 추락과 죽음, 제거의 공간이다. 부뒤는 죽기 위해 그곳에 뛰어들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옴으로써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삶의 양태는 바뀌었을지언정 부뒤의 성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부뒤가 새롭게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은 부뒤의 삶이 진정으로 ‘비포-애프터’로 나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변화된 외적 삶 양태를 보고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의 외적 양태와 인간의 내적 속성이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부뒤를 통해 대변한다.

우리는 다리 위 사람들과 같이 추락과 구조 이후 어떤 급진적 변화가 스펙타클로 재현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부뒤는 그러한 스펙터클을 거부한다. 부뒤는 반-스펙터클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부뒤는 어떤 공간에서든 자신의 리듬으로 산다. 그의 거부는 곧 동질적 삶-리듬에 대한 거부다. 그것은 자아에 이상을 담지해 놓은 자기중심적 이성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영화는 ‘물’을 매개로 하여 그러한 이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물은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꿈에서 나오는 출구다. 복권에 당첨되면서 부뒤는 앤 마리와 결혼한다. 부뒤와 앤 마리를 비롯하여 레스팅구아 일행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지나간다. 그때, 부뒤는 갑자기 물에 떠다니는 꽃을 잡으려고 하다 물에 빠지고, 부뒤가 물에 빠지는 것과 함께 배가 전복되자 모두 다 물에 빠져 버린다. 부뒤는 강물을 따라 떠내 갔다가 뭍에 올라 그 길로 허수아비와 옷을 바꿔입고는 제 갈 길을 가고, 모자까지 강물에 버린다. 하지만 부뒤에게 버려진(?) 레스팅구아 일행은 처량하게 뭍에서 자신들의 깨어진 몽상을 되새긴다. 영화는 마지막에 하늘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 화면 위에는 푸른 물과 푸른 창공을 노래하는 가사가 흐른다. 하늘과 물. 혹은 이상과 꿈의 균열. 우리의 세계는 그것들의 공존으로 구성된다.

<라탈랑트>와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는 ‘물’을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면으로 삼는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삶의 질적 변화에 대한 여러 감정을 목격한다. 그 감정의 양태는 조금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삶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나 두려움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전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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