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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출발 <스위티>2017-09-06

 


가족이라는 서늘한 굴레

제인 캠피온의 <스위티>

 

문성훈(부산영화평론가협회)

 위대한 출발 - 영화사상 최고의 데뷔작들 2017.9.1.(금) ~9.21.(목)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제인 캠피온의 데뷔작 <스위티>는 케이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토로하는 불안어린 독백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지녀온 나무에 대한 공포, 그 한없이 증식하는 뿌리가 어둠 속 침실바닥을 파고들어 급기야 자신을 질식시키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은 케이의 복잡한 자의식을 관통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가족에 대한 오랜 반감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불안은 공허한 삶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지독한 운명론자인 케이는 점술가의 미심쩍은 조언을 받아들여 직장동료의 약혼자였던 어수룩한 청년 루이스를 유혹해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영화의 도입부를 통해 케이는 제 삶을 둘러싼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끈질긴 운명의 일부이자 근원을 이루는 자신의 혈연으로부터 도피하고픈 강박을 드러낸다. 내향적이면서도 언뜻 돌발적인 일면을 드러내기도 하는 케이의 신경증적 면모는 연인 루이스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 케이의 집 앞마당에 심어둔 루이스의 조그만 묘목, 그리고 불현듯 그녀의 집을 방문한 친동생 스위티의 존재는 케이의 내면을 휘감은 불안의 실체를 끄집어낸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 <스위티>는 평범치 않은 가족사를 지닌 과묵한 여성 케이의 불안과 결핍을 다룬 자못 내향적 구조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듯하지만, 케이의 내면 기저에 도사린 불안을 외면화한 스위티가 다시금 그녀의 삶 가운데 난입함으로써 괴상한 가족영화의 외피로 선회하게 된다.

 

케이의 집으로 모여든 그녀의 일가는 하나같이 상궤를 벗어난 일면을 지닌 인물들이다. 어쩌면 오랜 기간 떨어진 채 각자의 삶을 살아왔을 그들은 갑작스레 이루어진 재회의 순간 가운데에도 별다른 감회조차 표하지 않는다.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이 왕년의 가족은 한때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막내였지만 연예계에 진출하겠다는 한갓된 허영에 젖은 채 차츰 통제를 벗어난 문제아로 변모해버린 스위티로 인해 골머리를 썩는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스위티에 대한 케이의 감정에선 혈육에 대한 일말의 연민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막내딸을 애지중지하던 자매의 아버지는 망나니처럼 날뛰는 스위티 앞에서 속수무책 무능한 모습으로 일관하며 그녀의 비행을 부채질할 뿐이다. 마뜩찮은 상황 가운데서 케이의 집으로 모여든 이 혈연집단은 찰나의 일시적 재회 이후, 가까운 시일 내에 예정돼 있는 또 한 번의 필연적 이별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상태다. 비록 그 이별이 파국의 과정을 내재하고 있을지라도.

 

케이는 연인인 루이스가 자신의 집 마당에 심어둔 묘목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그녀를 짓누르던 나무에 대한 공포는 곧 스위티로 대변되는 가족에의 환멸과 연결되지만, 이는 운명 속 남자라 굳게 믿었던 루이스에 대한 의구심으로까지 확장된다. 루이스의 얼굴에 새겨진 물음표 표식은 점술가의 말마따나 그가 케이의 반려자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불확실과 예측불허로 점철된 지난한 삶의 행로에 지나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케이의 가족은 영화의 후반부, 불화와 소동의 구심점이었던 골칫거리 스위티가 비극적인 퇴장을 맞이함으로써 모처럼의 평화를 되찾게 된다. 스위티에게 비뚤어진 애정을 쏟아 부었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를 어린 시절의 어릿광대로 추억하며 쓸쓸히 눈물짓지만, 다시금 가족의 해체를 맞이하게 된 케이는 한동안 거부해왔던 루이스와의 섹스를 통해 새로운 앞날을 모색하려 한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 자매의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 영화 속 케이의 독백처럼 인간이 사는 곳엔 어디든 나무가 자라는 법인지라 악몽과도 같은 뿌리에 대한 공포는 그녀의 내면 가운데 똬리를 뜬 채 언제든 또 다른 스위티가 되어 이 가련한 운명론자를 집어삼킬 태세다. 그렇다면 스위티는 케이의 세계에서 정녕 괴물과도 같은 존재인 것일까.

 

영화 <피아노>로 널리 알려진 제인 캠피온의 데뷔작 <스위티>는 밝은 색조의 이미지와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이면에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독의 날선 비판의식이 스며든 영화다. 언니인 케이와 달리 돈이라는 본명 대신 예쁜이를 뜻하는 애칭 스위티로 불려온 소녀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의 이미지로 박제화를 강요해온 아버지의 성적 환상이 투영된 존재다. 아버지가 스위티에게 쏟아 붓는 사랑은 너무도 맹목적이어서 그러한 감정은 이내 비뚤어진 숭배의 양상으로 변질되고 만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비껴난 케이는 가족에 대한 환멸과 거부감을 지닌 존재로 자라게 되지만, 이와 반대로 지나친 애정과 그릇된 숭배의 대상으로 성장한 스위티는 온전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지 못한 채 세상과 불화하는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스위티>에서 그려진 비루한 세계에서, 가족이란 집단은 허울만 남은 채 더 이상 제 구실을 이루지 못할 한낱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인 캠피온이 그려낸 전복된 가족에의 추억은 살아남은 자들의 악몽 속 환영으로 나타나 몽롱한 의식을 옭아매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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