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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XIV '마야 데렌' 감독론2017-04-07

 



마야 데렌 감독론

 

 김기만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편집위원



Review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XIV world cinema xiv



댄스 필름의 창시자

 

영화를 통해서, 나는 세계를 춤추게 만들 수 있다.” 마르티나 쿠드라섹의 다큐멘터리 <마야 데렌의 거울>(2002)에서 마야 데렌은 선언하듯 말한다. 흔히 마야 데렌을 댄스 필름의 창시자라 일컫지만 데렌이 춤을 촬영한 최초의 영화감독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영화의 관심, 그중에서도 춤추는 신체의 운동에 대한 관심은 영화사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에디슨 제작사에서 일하던 윌리엄 딕슨은 이동식 촬영 스튜디오 블랙 마리아에서 브로드웨이 댄서 애너벨 무어가 춤추는 모습을 담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짧은 영상은 개인 관람 장치인 키네토스코프를 통해 공개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현대 무용의 선구자 로이 풀러의 뱀 춤(serpentine dance)을 기록하였고, 풀러 자신도 무용을 영화로 담아내는 방법을 강구했다.

영화사 초기부터 춤추는 인간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들은 일련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카메라는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고정되었고, 그렇게 구성된 프레임은 무대의 실제 너비와 대체로 일치한다. 무용수의 동선은 한정된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으며, 의상에 덧댄 길고 넓은 천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무대 조명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의상을 표현하기 위해 필름에 직접 색을 칠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실제 공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별다른 편집 없이 춤추는 모습을 비추는 영화 속에서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고 공간은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영화도 이러한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위대한 무용가의 공연을 충실히 기록한 도구로서의 영화, 신체의 움직임에 매혹된 영화, 그리고 그만큼이나 활동하는 사진이라는 저 자신의 기술력에 도취된 영화. 이러한 영화들을 뭐라고 부르든 무용과 영화 중 어느 한쪽에만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마야 데렌은 이러한 영화들을 연극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데렌에게 영화는 무엇보다 이미지를 다루는 시각 매체라는 점이 중요했고, 그런 영화가 무용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화학작용을 통해, 문자의 순서를 뒤바꿔 새로운 단어와 문장을 만드는 애너그램처럼(1946년 데렌은 자신의 영화이론을 담은 저서 예술, 형식 그리고 영화 개념의 애너그램을 출간했다), 새로운 영화의 개념과 형식을 창조하기를 원했다. 존 마틴의 말처럼 데렌의 댄스 필름에 이르러서야 카메라와 무용이 하나의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협력하는 새로운 예술, 코레오시네마(choreocinema)'의 시작을 확인할 수 있다.

데렌의 댄스 필름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1946)는 카메라가 왼쪽으로 패닝하며 숲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카메라의 순환하는 움직임에 따라 느리게 춤을 추고 있는 탈리 비티의 모습이 점차 크게 보인다. 비티의 움직임에 따라 영화의 공간은 숲-집 안-박물관-숲으로 이동하고, 초당 8프레임에서 64프레임까지 시간을 인위적으로 변경하여 영화는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영화의 부제인 한 사람의 무용수와 한 대의 카메라를 위한 듀오 발레처럼 데렌은 무대에서 벗어난 카메라와 세계 전체를 무대로 얻은 무용수의 화학작용을 통해 새로운 영화적인 안무를 창조했다.

 


그물에서 벗어나려는 전방위 예술가

 


마야 데렌은 영화감독인 동시에 시인, 인류학자, 안무가,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이기도 했다. 1961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야 데렌은 짧은 생애 동안 전방위에서 활동한 예술가였다. 데렌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엘레노라 데렌스코프스키이다. 1922년 러시아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해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에 정착한 가족은 이때부터 데렌이라는 성을 사용한다. 마야라는 이름은 이후 영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지은 가명으로 환영, 어머니, 신의 전달자를 뜻하는 단어이다.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이후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데렌은 출판사에서 비서로 일하며 시 쓰기에 몰두한다. 데렌은 이 시절에 쓴 시에 대해 형편없다고 자평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말하는 이유다. 이미지를 통해 사유하는 데렌에게 시를 쓰는 것은 시각적 경험을 억지로 문자 언어에 집어넣으려 애쓰는 과정이었고,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땐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데렌의 예술적 관심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는데 캐서린 던햄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아이티에 대한 인류학 논문을 쓴 인류학자이자 미국 흑인 현대무용의 지위를 향상시킨 안무가였던 던햄의 비서로 일하면서 데렌은 춤과 인류학에 빠져든다. 던햄의 영향으로 아이티 원주민의 춤과 부두교에 대한 에세이 춤에 있어서의 종교적 몰입을 쓰기도 한 데렌은 부두교 의식의 춤과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1947년과 1949년 그리고 1954년 세 차례 아이티를 방문하여 2만 피트 분량의 푸티지 필름을 남긴다. 데렌은 이 여행을 바탕으로 초자연적인 의식에 대한 보고서 󰡔디바인 호스맨 : 아이티의 살아있는 신들󰡕(1953)을 출간했으며 이 책은 오늘날까지 부두교에 대한 중요한 인류학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데렌이 남긴 푸티지는 사후 16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지만 데렌이 애초에 기획했던 영화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푸티지는 데렌과 아이티 여행을 함께 했으며, <오후의 올가미>(1943) - 무성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이후에 따로 음악을 더했다 - <폭력에 관한 명상>(1949), <밤의 눈>(1958)의 음악 담당이자, 데렌의 세 번째 남편인 테이지 이토의 편집을 거쳐 완성되었다. 아이티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데렌이 남긴 6편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몽환적이고 신화적이며 원시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토대가 된다.

영화적 동지이자 두 번째 남편인 알렉산더 해미드와의 만남을 통해 데렌은 영화감독으로서 길을 걷게 된다. 데렌은 던햄을 따라간 LA에서 해미드를 만나고 두 사람은 얼마 후 기념비적인 데뷔작 <오후의 그물>을 만든다. <오후의 그물>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영화이다. 영화는 전쟁 중이던 세계의 불안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악몽의 파편들로 직조된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만들었다는 반어적 오프닝 타이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꿈의 공장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할리우드에서 립스틱을 사는 비용만으로 자신의 영화를 만든다며 공공연하게 할리우드를 비판해온 데렌은 제작, 연출, 배급 등 모든 분야에서 비타협적인 방식을 고수한다. 16mm 필름의 사용. 실험적인 슬로우 모션, 패닝, 핸드헬드로 구성된 몽환적인 리듬과 나선형의 반복 구조. 독자적인 배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뭍에서>(1946),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와 함께 세 편의 버림받은 영화들이라는 타이틀로 개최한 상영회 등 <오후의 그물>은 얼마 뒤 태동할 뉴아메리칸 시네마가 나아갈 방향을 선도적으로 제시했다. 마야 데렌이 직접 배우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무엇보다 데렌의 영화적 자화상이라 말할 수 있다. 일련의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꽃, , 열쇠, 계단 등 남성 중심의 프로이트적 상징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오후의 그물>에는 여성으로서 데렌이 느끼는 감정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데렌은 끊임없이 분열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성 중심의 그물망에 걸려 몸부림치는 여성의 욕망과 불안을 그린다. 데렌이 배우로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인 <뭍에서><변형시간의 의례>(1946)에서 자기반영적이고 여성주의적인 영화 만들기는 한층 강화된다.



영화적 프로메테우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이력만큼이나 데렌은 입체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데렌은 히피이자 관능주의자였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나르시시스트였고, 이국적 풍모를 지닌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데렌의 주위에는 마르셀 뒤샹, 존 케이지, 앙드레 브르통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성격 탓에 관계가 틀어진 사람들도 많았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데렌의 다채로운 이력과 캐릭터는 고정된 그물망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영화 속 인물과 닮았다. 데렌에게 아방가르드는 예술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삶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이었고 이러한 예술과 삶에 대한 태도는 뒤따르는 아방가르드 감독들에게 영감이 되었다. 빌 니콜스의 말처럼 마야 데렌은 할리우드라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달아난 영화적 프로메테우스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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