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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맥커리 특별전 작품론2018-11-07

오즈는 갈 수 없는 길

내일을 위한 길

 

이상경(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오즈 야스지로의 시나리오 작가인 노다 고고는 어느 날 오즈가 본 적이 없는 영화 한 편을 각색하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103일간의 공동 작업 끝에 <동경 이야기>(1953)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그 원작이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1937)이다. 두 작품은 스토리 면에서 많은 점을 공유한다. 노년의 부부가 장성한 자식들의 집을 떠돌고 자식들은 부모를 부담스러워하며 둘 중 한 명은 병을 얻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는 골격은 같다. 노년의 삶이 갖는 비애감과 자식 세대의 비정함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있으나 두 영화 모두 노골적으로 증언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맥커리는 같은 해에 발표된 또 다른 작품 <이혼 소동>(1937)에 수여된 아카데미 감독상이 고맙지만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정도로 <내일을 위한 길>을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았다. 스크루볼 코미디에 재능을 보여 왔던 감독의 이력을 고려할 때 <내일을 위한 길>은 예외적인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맥커리는 역시 맥커리였다. 대공황기의 고통에 대한 위무가 되는 동시에 부르주아적 불안을 신경증적으로 드러내곤 했던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가는 이 작품에서도 시대적 소재와 정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장기를 변주한다.

 

4년간의 실직으로 채무를 갚지 못한 바크(빅터 무어)가 은행에 집을 넘겨주게 되는 사정을 자식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영화의 시작이다. 자식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이 순간에도 바크, 혹은 맥커리는 자신이 그간 잘해 온 일을 잊지 않는다. 바크는 자신의 연적이었던 은행가가 자신을 만났을 때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한다. 아내 루시(뷸랴 본디)는 기모노가 아니라 잠옷이었다고 굳이 수정한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격렬한 입씨름은 온건한 기억의 차이로 대치되지만, 커플 간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노년의 기억 착오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자주 반복된다. 이들 커플의 경우에는 기억 착오가 놀이처럼 기능하지만, 오즈의 부부들에게서 드러나는 기억 착오는 다가오는 불안의 징조처럼 묘사된다는 차이가 있다.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보이는 커플 사이의 언쟁은 이 영화에서 세대 간 언쟁으로 변주되고 격렬하진 않지만 신경질적이고 아슬아슬한 대화의 교환도 여전하다. 자식들의 부담감과 떠넘김으로 노인 부부는 각각 다른 자녀의 집에서 살게 되는데, 장남 조지 부부가 자기들끼리 외출할 때 집에 혼자 남은 루시에게 괜찮겠냐고 물으니, 루시는 (너의 집에서) 혼자 있는 게 처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도발한다. 며느리가 어머니는 양탄자 손질 때문에 바쁘지 않겠냐고 재차 무마하려고 해도, 루시는 머리가 아파서 양탄자 손질은 그만하기로 했고 그나마 라디오도 고장 났다며 외출하려는 부부의 마음을 긁어댄다. 루시가 한술 더 떠서 소화불량이라며 소화제를 찾으니 조지는 안 나가는 것이 낫겠고 산책이라도 같이 하시려냐고 물어본다. 루시는 발 때문에 못 나간다며 기어이 그냥 다녀오라고 한다. 속이 안 좋다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그 느낌이 어떤지 안다고 할 때, 시어머니에게 거북함은 소화불량의 불편한 신체적 느낌과 뒤틀린 심사,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동경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갖는 힘 가운데 하나는, 시골에서 모처럼 자식들을 방문한 부모 내외를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밀쳐 내면서 부담스러워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드러내는 핍진성이다. 각자의 삶에 견실한 생활인으로 보이는 자녀들의 사정 역시 노인 부부에 대한 공감적 연민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자녀들에 대한 이해와 노부모에 대한 연민이라는 정서의 긴장과 균형은 드라마를 성립시키는 주요 장치이다. 오즈는 각색을 하면서 균형추 양쪽의 무게들을 더 덜어내었다. 오즈의 노부부는 선계에서 내려온 사람들 같고 자식들도 효자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라도 자신들의 경우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길>에서 묘사하는 부모 부부와 자식들 부부는 더 격렬한 인파이터들이다.

오즈의 부부가 방문이라는 목적 때문인지 자식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데 비해 맥커리의 부부는 서로 따로 떨어져서도 자식들의 삶에 끼어들고 때로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방문과 부양이라는, 서사적으로 동거의 목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태도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두 감독의 스타일 차이가 동거의 목적을 다르게 설정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맥커리의 부모, 자식들은 오즈의 세대 간보다 거칠게 부딪힐 뿐 아니라 사소한 순간에도 공수를 교환한다. 영화의 첫 신에서 조지가 오랜만에 부모의 집으로 들어서며 자기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 안다면서 아버지가 왜 불러 모았느냐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직접 들으라고 대답한다. 이럴 때의 대화는 일상적 정보제공 보다 공방이 계속될 영화의 대사 리듬을 예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대 간에는 거친 설전이 오가지만 바크 부부는 오늘날 표현으로 닭살 커플이다. 자식들의 거부로 떨어져 살게 된 그들은 전화로, 편지로 안부를 묻고 다시 만나서도 뜨거운 사랑의 고백들을 쏟아낸다. 아들 부부 내외와 주고받은 공방의 주인공 루시 뿐 아니라 바크의 경우에도 노구라고 하기엔 드센 모습을 보인다. 딸 집에 머무는 바크에게 젊은 의사가 왕진을 온다. 바크는 젊은 의사의 진찰에 바보 같은 짓이라며 협조하지 않고 열이 얼마나 더 올라야 저 젊은 의사의 아버지(그는 더 진료를 오래 한 경험 많은 의사이다)가 오냐고 고집을 부리고 급기야 그 의사를 물어버린다. 부부는 서로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고 진지할 뿐 아니라 손녀에게 이해심 많으며 자식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앞의 의사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예의 바르고 유쾌하다. 여기서 두 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캐릭터에 혼란이 생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식들과만 반목하는 존재들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자식들에게서 연유한 것인가?

 

영화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긴 자막을 참조한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어느 정도 그렇다이다. 그 자막은 세대 간의 이해가 어려움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해법으로 십계명의 하나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게 당시 감독의 신조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매카시즘에 봉사한 훗날의 경력을 비추어볼 때 완전히 빈말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였다면 노인들의 강한 캐릭터 대신 오즈의 경우처럼 좀 더 온순하고 덜 괴팍해야 한다.

전형적인 스크루볼 코미디 <이혼소동>을 고려한다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경과민까지 일으킬 날카로운 대사로 몰아치거나 경쾌한 유머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코미디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가 <내일을 위한 길>이다. 같은 감독이 같은 시기에 만든 영화는 같은 기후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내일을 위한 길>에서도 사랑의 언어로만 신사협정이 맺어진 노부부 사이 외엔 대부분의 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공격성을 내포하면서 상대를 꿰뚫어 보는 혜안의 대사로 가득 차 있다. 노인이라는 생물학적 제한으로 그 속도가 다소 느리고 그 양이 다소 적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영화를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부를 수 없다. 할리우드 장르는 스타일의 특징 외에도 주제, 플롯과 같이 공유해야 할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노래와 춤이 대사에 비해 많다고 해서 뮤지컬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이 노래와 춤으로 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존재하듯, 공격성을 감춘 위트로 일합을 겨루고, 말이 오가면서 벌어지는 승부의 연쇄작용으로 존재하는 삶을 믿게 만드는 맥커리의 영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맥커리의 인물들은 캐릭터를 갖는 존재라기보다는 뮤지컬 넘버처럼 영화를 운행하는 매체가 된다. 오즈는 갈 수 없는 길이다. 1950년대 어느 날 오즈와 노다 고고가 <동경이야기>의 각색을 결심했을 때, 그들은 원작의 아류작이 될 거라는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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