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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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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아커만 특별전 '샹탈 아커만 감독론'2018-08-21
Review 8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샹탈 아커만 특별전 CHANTAL AKERMAN RETROSPECTIVR 2018.8.21.(화) ~9.9.(일)

 

공간과 움직임의 경계에서

구형준 (영화평론가)

 

경계의 영화

 

    최소한으로 축소되었거나 아예 없는 서사, 단촐하지만 반복적인 형식적 구성들, 그리고 때때로 내뱉어지거나 울려지는 관념적인 대사들. 이외에도 주류영화의 울타리 바깥을 넘나드는 특징들이 샹탈 아커만의 영화에는 무수하다. 때문에 아커만의 영화는 종종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아왔고,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아커만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이나, 유대인이라는 출신 배경 등의 영화외적인, 정치적이고 지정학적인 영향을 경유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 말할 생각은 없다. 아커만 스스로도 가부장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시선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고, 전후 세대의 삶과 이주자의 삶과 같은 역사적, 디아스포라적 이미지는 아커만의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맥락에서만 아커만을 설명하는 것은 제한적이고 충분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비단 아커만 스스로가 자신을 이러한 정치적 맥락 속에 있는 작가로 이름 붙여지길 거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커만의 카메라가 패닝하거나 트래킹할 때,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 다른 공간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호출되고 중첩될 때, 어머니가 말을 하고 아커만이 말을 할 때, 아커만의 영화는 단순히 정치적 사명감 속에서 활동하는 움직임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것의 바깥을 상상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약동하는 몸짓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혹은 그 속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 자기반영적 질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아커만의 영화는 어떤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름 붙여지기보다, 그러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우연찮게 만나는 지점에 서있는 경계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커만의 영화를 보며 이들 경계가 허물어지고 융합되는 영화적 실천을 보는 것이다.

 

 

공간과 움직임에 대하여

 

    물론 경계의 영화라는 이름이 단순히 관념적이고 정치적 의제들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 아커만은 이러한 경계의 확장을 어떻게 영화적인 방식을 통해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가령 아커만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영화와 풍경의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경계에 대해 질문해왔다. <동쪽>(1993)에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트래킹 쇼트는 카메라를 마주보는 사람들, 못본 채 피하는 사람들, 카메라를 인지조차 않는 사람들을 훑으며 차갑고 광활한 대지와 도시의 풍경을 그들과 함께 담는다. 여기에는 별다른 내레이션이나 선형적이고 인과적인 설명도 없지만, 풍경과 인물들의 면면에서 그들이 지나온 공통의 체험과 역사가 강렬한 이미지가 되어 우리 앞에 현현한다. <동쪽>은 트래킹이라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영화의 표면에 놓고, 역사의 방관자도, 참여자도 아닌 위치에서 그 움직임을 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풍경 속에 내재된 역사를 성찰한다. <동쪽>은 명백히 이 풍경의 역사 속에 포함된 영화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사의 일원이기보다 한 발짝 떨어진 기록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커만은 영화를 역사적 사명과 예술적 시도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 존재로 간주한 것은 아닐까?

    또한 아커만은 영화의 공간을 한 없이 확장하며 이미지 속의 공간의 한계를 질문한다. <집에서 온 소식>(1977)는 어머니의 편지를 낭독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동하는 자동차, 지하철,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하게 바라보면서, 뉴욕이라는 공간과 아커만의 목소리, 딸을 향한 어머니의 염려를 콜라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콜라주가 벨기에에 있는 어머니의 마음과 뉴욕에 있는 도시와 사람들의 풍경,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아커만이라는 개인을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눈과 귀는 뉴욕에 있지만, 마음은 브뤼셀에 있으며, 또한 아커만이라는 육체는 카메라의 뒤에, 즉 영화의 바깥에 있다.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복합적인 중첩을 통해서 <집에서 온 편지>는 뉴욕과 브뤼셀을, 어머니와 아커만을 모두 담으며 공간을 사유하고, 공간 속의 개인들을 성찰하는 것이다.

   즉 아커만은 간단한 움직임과 응시, 소리들 속에 내재되어있는 다층적인 함의들(풍경 속의 역사와 공간과 개인의 관계들과 같은 것들)을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영화 속에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1972), <호텔 몬터레이>(1973)과 같은 초기의 작품들이 이러한 고민들이 어떻게 영화적인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동쪽>, <미국 이야기>(1989), <알마이에르가의 광기>(2011)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실천이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페미니즘과 디아스포라적인 인물과 사건과 같은)의제들과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고민한다. 말하자면 아커만에게 영화 만들기와 역사 기록, 산책, 대화, 편지, 공간, 움직임은 모두 서로가 상호적으로 공명하고 있는 활동인 것이다.

 

 

영화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민의 연장에 서서 아커만의 유작인 <노 홈 무비>(2015)를 보자. 이 영화에서 아커만이 이런 저런 영화적 형식들과 현실적인 의제들 사이에서 시도했던 실천들은,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집 안에서만 머물며 어머니와 대화를 하거나, 영상통화를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롱테이크 장면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강박적일 정도로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며, 고정된 앵글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속을 구성하는 내용이 집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노 홈 무비>에서 어머니와 아커만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런 저런 잡담을 하는 대화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적힌 편지를 읽어주던 <집에서 온 소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와 시차의 한계에 부딪혀 기다림이 수반되는 편지로만 대화할 수 있었던 <집에서 온 소식>의 대화와는 달리, <노 홈 무비>의 대화는 그것이 뉴욕이든 브뤼셀이든 언제 어디서나 동시적이고 상호적으로 이루어진다. <집에서 온 소식>이 뉴욕의 풍경과 아커만의 목소리, 어머니의 편지를 콜라주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와 도시 풍경 그리고 물리적 거리, 심리적 거리와 같은 것들을 영화적으로 주조해냈다면, <노 홈 무비> 그저 스카이프 영상통화를 촬영하는 것만으로, 집안의 풍경을 전혀 벗어나지 않고 어머니와 아커만 사이의 대화를 담아낸다. 이제 공간의 차이, 거리에서 비롯되는 시간적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노 홈 무비>는 더 이상 풍경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커만의 이전 영화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풍경 속에 내재된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포착하려 했던 시도는 <노 홈 무비>에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다만 밥을 먹고,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와 어딘가 휑한 집안의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보자. 만약 아커만이 야외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담았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더욱 깊숙이 풍경 속에 내재된 삶의 단면들에 천착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반대로 질문해보자. 뉴욕과 브뤼셀을 사이에 두고서도 실시간으로 영상통화가 가능한 시대에, 모든 곳에 영상이 있고, 모든 곳에 카메라가 있는 시대에, 집 밖에 나선 아커만의 카메라가 진정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아커만은 무엇을 찍을 수 있으며, 혹은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

    즉 <노 홈 무비>는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온 소식>의 시절에는 유의미한 실천이었으나 이제는 무의미해진 편지의 존재, 혹은 <동쪽>의 시절에는 집요한 관찰을 가능케 했으나 이제는 무수한 풍경들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인 풍경의 존재 속에서 영화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집이 어딘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 홈 무비>가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 비관인 것은 아니다. 산책과 편지, 대화와 역사쓰기와 카메라의 움직임이 하나의 유기적인 활동이던 시절이 끝나고, 변화하는 토대들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커만은 그것을 다시 자신의 집 속에서 영화로 실천해 나간 것은 아닐까. 어쩌면 <노 홈 무비>의 집이라는 공간은 거리의 풍경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역사쓰기이자 동시에 예술적 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혹은 내레이션과 도시의 풍경과 멀리서 온 편지가, 서로 다른 시간을 공유하게 해주는 영화적 실천이었던 것처럼 또한 경계를 확장하고 성찰을 가능케 해주는 통로인 것은 아닐까.

 

 

    아커만의 (영화적인 의미에서든 정치적인 의미에서든)경계의 확장에 대한 성찰은 아커만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성질이지만, 동시에 모든 영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는 차이점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영화의 형식을 고민해왔던 아커만에게 있어 영화는 어쩌면 여전히 무수한 질문과 가능성에 둘러싸인 것이었던 것 같다. 점점 더 영화가 모호해지는 시대에 아커만의 영화들이 남기고 간 질문들이 여전히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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