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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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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스페셜 2018 '막스 랭데 감독론'2018-07-24
Review 7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서머 스페셜 2018 Dureraum summer special 2018.7.18.(수) ~ 8.19.(일)

 

막스 랭데 : 실크 모자를 쓴 남자1)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몸에 잘 맞는 정장, 손질한 콧수염, 광택이 흐르는 실크 모자는 막스의 트레이드마크와 같다. 프록코트와 모닝코트를 구분하기 힘들지라도 행커치프가 꽂혀있는 윗주머니, 격식을 갖춘 베스트와 넥타이, 날카로운 각이 살아있는 바지주름과 에나멜구두에서 그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멋쟁이라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외양만 그럴까. 이 젊고 잘 생긴 사내가 사람들을 대할 때, 거기에는 부르주아의 세련된 태도가 배어있다. 찰리 채플린과 만난 짧은 영상을 보고나니, 그건 막스 랭데가 아니라 가브리엘 루빌(Gabriel Leuvielle, 그의 본명)의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여인에게 미소를 짓거나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예의를 표할 때에도, 그 동작에는 매순간 신사 막스(Gentleman Max, 그의 별명이다)’의 품위에 베어든 당당함이 있다.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의 행동에는 종종 과장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걸음걸이, 모자와 지팡이를 다루는 품새, 장갑의 손가락을 하나씩 당겨가며 벗는 사소한 움직임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즈음의 그림에서 나온 듯이 아름답다. 이렇게 멋진 신사가 스크린에서 좌충우돌하며 엉뚱한 기지를 발휘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때, 거기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막스의 영화에서 스펙터클은 단연 서사를 압도하는 것이다. 연작 단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서사는 대부분 우연과 타이밍의 연속으로, 오로지 스펙터클을 위해 존재한다. 뒤마의 소설 원작이 있고 더글라스 페어뱅크스가 주연한 <삼총사>(프랭크 니블로, 1921)를 패러디한 <삼총사>(1922)도 예외가 아니다. ‘다트 인 어게인(Dart-in-again)’이 집에서 나와 말을 타고 떠나기까지도 아버지와의 야단스런 작별인사-소와 말이 나누는 눈물의 이별-얼마 안 가 말이 주저앉아버려 주인공이 꾀어내야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어처구니없이 승리하는 171의 싸움, 시대와 맞지 않는 전화기, 타자기, 자동차의 등장, 서부극을 떠올리는 활극 장면, 다트 인 어게인이 유일하게 멋있어 보이는 후반부의 말을 달리는 긴 슬로모션까지 모두가 스펙터클 아닌 것이 없다. <삼총사>가 시대극이므로 이를 차치하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막스의 영화에서 스펙터클이란 <7년간의 불운>(1921)에서 보는 것처럼 거나하게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고, 다음 날 아침까지 숙취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일상적인 사건에서부터, 여행길이 삽시간에 추격으로 전환되는 특별한 소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멜리에스로부터 싹튼 눈속임 기법들이나 있었을까, 특수효과가 소박하던 시대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고, 막스가 여러 극장을 거쳐 온 배우라는 이력 또한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그는 보드빌을 영화에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의 액션에는 한결같이 사람의 숨결로 가득하다. 그의 연작 단편 가운데 <사랑을 위해 저글링 하는 막스>(1912)에는 저글링을 다양하게 변용한 장면들이 있고, 이는 종종 다른 단편에서도 목격된다. <7년간의 불운>에서만 해도 막스가 (사실은 비어있는)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와 요리사가 콤비로 긴 시간을 들여 훈련해야만 수행 가능할 만큼 난이도가 높다. 오로지 그들의 감()과 몸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 실제적이고 정직한 액션에는 오늘날 정교한 특수효과와 장대한 스케일이 주는 것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구성과 감흥이 생겨난다.   

    세계는 언제나 모험의 공간이다. <삼총사>는 아예 모험담이기도 하고, <비 마이 와이프>(1921)는 그를 반기지 않는 이모에게 점수도 따고 사랑의 경쟁자인 아치를 물리치기 위해 커튼 뒤에서 12역으로 한바탕 난투극을 벌인다. <7년간의 불운> 역시 극 중반, 막스가 역에서 짐을 잃어버린 뒤 무임승차를 하려고 끈질기게 도전하고, 사명감으로 무장한 직원들이 그를 쫓아 역-열차-다음 역-동물원-감옥-법정 순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있으므로 이 역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막스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뒤에 숨어서 그림자처럼 움직이거나, 달음질쳐 아슬아슬하게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것은 예사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주어진 상황을 야무지게 이용해, 그야말로 나이와 인종을 초월하는 변장술로 기가 막히게 위기에서 벗어난다. 사랑의 방해꾼들을 피해 막스와 메리 연인은 몰래 정원에서 만난다. 이 때 그는 허수아비로 위장하는데 바지며 구두가 다 보인다. 다음날에 음악선생님인 척으로 변장한 그가 메리의 집을 방문할 땐, 배짱이 두둑한 건지 수염 하나 달고서 문을 두드린다! 허술한 변장술은 사소하고 작은 세부의 변화 때문에 관객들을 웃음에 빠지게 한다.

이 유쾌한 슬랩스틱의 세계에는 언제나 지치지 않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킬 때를 포함하여, 그 끝에 줄행랑을 치더라도 막스는 조용히 퇴장하는 법이 없다. 그의 엉덩이엔 개가 달랑달랑 매달려 물고 늘어진다. 혼쭐이 나고도 연인과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는 담 너머로 쏙쏙 고개를 내민다. 그러면 이모는 사정없이 작대기를 휘저으며 몽둥이세례로 쫓아내려 한다. 그는 여러 번 도망치지만 한 번도 똑같은 방법을 쓰지는 않는다. 날렵하게 창문을 통과해 정원에 이르면 개를 따돌리려고 약간의 여유를 부린다. 아뿔싸, 개에게 들켰네. 그는 전속력으로 달려 급한 와중에도 챙긴 막대기를 이용해 장대높이뛰기로 담을 넘는다. 그렇게 각자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여러 움직임의 궤적들은 이 장면에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할 때가 있다.

 

    현재 영화의 전당 상영작들은 키노클래식과 랍스터 필름에서 출시한 DVD “막스 랭데 컬렉션”(2014)과 유사할 거라 짐작한다. 나는 러닝타임이 그보다 더 짧은 이전 판본들 중 하나를 본 것 같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극장과 제작사가 임의로 영화를 편집할 수 있어서 한 작품이 여러 판본을 갖는 시네마 오브 어트랙션(cinema of attraction) 시대의 관객을 상상케 하고, 당대 미국과 유럽에서 각각 다른 판본을 보았던 막스 랭데의 관객이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2)  물론 나는 이 글을 맺은 후 새로운 판본을 확인하러 갈 시대착오적인 관객이다. 하지만 내가 못 본 부분에서도 실크 모자를 쓴 남자는 사랑과 모험을 찾아 세계를 헤매는 중이고, 온갖 난관에 봉착해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해결하여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삶과 세계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거기에 긍정을 보내며, 영화는 그들을 바라보는 순수한 코미디의 즐거움을 준다.

   


 

 

 

1) 제목은 막스 랭데의 딸 모드 랭데(Maud Linder)의 다큐멘터리 (1983)에서 가져왔음.

2) 더 정확히 말해 막스 랭데가 미국에서 제작한 이들 영화 세 편은 각각 릴 5개로, 유럽에서는 요약본이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미처 몰랐던 막스 랭데의 유언집행자는 영화에 대한 미국의 권리가 만료되는 1933년 미국판 네거티브 필름을 없애게 했다. 훗날 모드 랭데가 이들 영화에 대한 권리를 사들이고 각국에 흩어진 필름들을 모아 남아있는 기록을 근거로 영화를 복원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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