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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 스페셜 2018 <투 레이트 블루스>2018-07-19
Review 7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서머 스페셜 2018 Dureraum summer special 2018.7.18.(수) ~ 8.19.(일)

 

 

존 카사베츠의 <투 레이트 블루스>

: 블루스에 술 한 잔, 카사베츠의 씁쓸한 위로주

 

장지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고스트 웨이크필드는 무명 밴드의 리더이다. 음악에 있어 이상주의자인 그는 어느날 제스 폴란스키라는 무명 가수와 사랑에 빠진다. 존 카사베츠의 <투 레이트 블루스>(1961)는 고스트와 제스의 만남을 기점으로 사랑과 반목의 과정을 따라가고 음악이라는 매개를 요소요소 마다 배치해 영화 전반을 감싼다. 영화 내용은 단순하다. 음악가와 사랑, 갈등과 화해. 단순한 구도와 결말, 정형화된 스튜디오 방식을 답습한, 그래서 존 카사베츠의 명성에 비추었을 때 다소 의아한, 그래서 카사베츠의 필모그래피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그 와중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을 그저 쉽게 따르기보다는 나름의 디테일을 채워놓아 조금 더 풍성해진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시종 흐르는 음악과 인물들이 머무르는 술집(또는 술)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우선 고스트와 제스의 관계를 전개하는 매개가 된다. 어느 파티장에서 즉흥 공연을 하는 제스를 처음 본 고스트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깊어가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고스트와 그의 밴드, 그리고 제스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한 것을 기점으로 갈등을 맞이한다. 봉합되지 못한 갈등의 결과로 고스트는 밴드를 떠나 재즈바에서 연주를 시작하고 제스는 음악을 포기한다. 두 사람이 음악을 매개로 꿈을 그리던 시간은 사랑의 시작이고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자라난 갈등의 징조는 두 사람에 있어 불안정한 사랑의 조짐이다. 이렇게 고스트와 제스의 관계에서 음악과 사랑은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하고 원심과 구심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화해의 순간까지도 두 사람과 궤를 같이하며 공전하는 동력은 음악, 즉 블루스다. 반면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은 따로 있는데 바로 고스트와 그의 일행이 다니는 몇몇 술집에서다. 음악이 영화 속에서 관계를 매개하고 이야기를 추진하는 메신저라면 술집(또는 술)은 그것을 담아내고 서사의 외연을 확장한다. <투 레이트 블루스>의 주인공과 주변 인물 다수는 주정뱅이거나 술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다. 경직되어 있던 제스가 긴장을 풀고 말문을 트는 장면은 폭탄주에 가까운 요상한 칵테일을 나눠 마시고 춤을 추는 고스트의 단골 바에서 시작된다. 고스트와 이별하는 곳도, 다시 만나는 곳도, 역시 술집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을 받아내는 공간, <투 레이트 블루스>의 술집은 어쩌면 정처 없는 혼잣말을 담아내는 거대한 술잔이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곳에다 자신의 이유를 쏟아낸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술집에서 술을 꺼내 마시고 넉살 좋게 외상을 다는 멤버들의 궤변, 칵테일을 들이키며 나누는 건배사, 술에 취한 남자들의 그렇고 그런 주먹다짐, 그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인 술집 주인, 다혈질의 남자(또 다른 술집 주인 리노), 색안경을 쓰고 음악인을 대하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저 흘러가도 그만일 사람과 사건이 쌓여가면서 고스트와 제스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하던 관객은 어느새 꽤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대면한다. 고스트와 제스를 거쳐 넓혀지는 저마다의 중얼거림과 솟구치는 감정들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이 영화 전반에 깔린 어떤 불안을 마주한다.

 

    우리는 우선 고스트의 결핍을 목격한다. 고스트는 영화에서 두 번 정도 무능하게 보인다. 공원에서 야구를 하다 삼진을 당하는 장면과 술집에서 싸움이 벌어져 아일랜드 남자에게 맞고 바닥에 쓰러질 때가 그렇다. 전자의 상황은 제스를 타석에 불러들임으로서 사랑을 진행시키는 촉매가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신을 자괴하는 듯 하지만 이 상황은 이전에 발생한 스튜디오 녹음 과정에서의 갈등과 술집에서 에이전트에게 제스를 제외한 밴드 활동을 제안 받는 상황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이 과정의 끝에서 고스트는 밴드를 해체하고 제스와 헤어지며 성공의 길을 선택하는데 이는 결핍으로부터 표출된 욕망이다. 하지만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대기실에는 그의 후원자인 귀부인과 곳곳에 놓인 거울이 기다리고 있다. 프레임 안의 거울은 귀부인을 대하는 고스트의 분노와 삐뚤어진 욕망을 마치 가두어 두듯 비춰댄다. 명분 없이 내지르는 신경질을 지나 고스트 스스로가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욕망의 다른 이름인 불안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그런데 불안은 제스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무명 가수인 그녀는 노래하고 싶지만 그저 읊조릴 뿐이다. 그녀는 노래하지만 그녀의 노래에는 노랫말이 없다. 이는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을 모른다던 그녀의 고백과 닮았다. 노래하고 싶은데 노랫말이 없고,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을 모르는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앞세울 뿐이다. 고스트가 그녀를 찾아 돌아왔을 때, 더는 공주(프린세스)가 아니라며 슬퍼하던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자살을 기도한다. 카메라는 깨어진 거울에 투영된 그녀의 얼굴만으로는 모자라 세면대까지, 제스의 파괴적으로 표출된 불안을 집요하게 쫓는다. 고스트와 제스의 만남-이별-재회라는 표피는 결핍-욕망-불안의 연쇄적인 내면화와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것이 카사베츠가 이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어떤 인간상의 단면이다 

 

    <투 레이트 블루스> 속 인물들은 모두가 주정뱅이이며, 욕망에 취한 불안증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불안의 방아쇠를 당긴 이는 고스트의 에이전트였다. 그가 당긴 방아쇠 역시 자신 안의 욕망과 불안의 격발이었다. 밴드의 멤버들과 아일랜드 노동자, 그리스 술집 사장과 소리 지르는 리노. 이들은 내재된 욕망과 불안을 술집이라는 공간에서 행위와 폭력으로 표출한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빠져나가고 이들이 만나고 마시며 벌이는 소동극의 공간은 마치 서부 영화 속 역마차나 어느 간이역을 1960년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역마차가 정의나 대의의 혼잣말을 받아내며 낭만을 쫓았다면, 지금 이곳은 시대에 드리워진 불안의 단면처럼 저마다의 욕망이 얽히고설켜 폭발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달라진 시대에 따라 달라진 인간상, 황금을 쫓던 서부의 시대와 달리 미국의 어느 술집으로 모여든 이상주의자와 예술가, 장사꾼과 노동자, 미국인과 국외자들은 무엇을 쫓아 여기 모였는가.

존 카사베츠가 연주하고자 한 블루스는 어느 시절을 관망하거나 살아내며 느낀 불안증을 연주한다. 그래서일까. 결말에서 그리는 화해의 제스처가 온전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다시 모인 그들이 무대를 비워두고 구석쯤에서 하는 연주, 여전히 제스는 노랫말 없이 음을 읊조리고 고스트는 피아노를 치는 대신 다시 모인 어제의 불안을 바라본다. 연주하는 이들 너머 고스트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지, 술집이 문을 닫는 시각까지 여전히 남아 음악에 몸을 맡기는 저들은 또 어떠한 불안을 품은 이들인지알 수 없다. 다만 다시 모인 이들은 조금은 성장했거나 달라졌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어느 술집으로 모여들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인 이들의 재회와 너무 늦지 않아 들을 수 있었던 블루스, 여기에 곁들이는 술 한 잔이 충분한 위로 같으면서도 여전히 서글퍼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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