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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거장전 2018 <기사에게 경배를>2018-06-19
review 6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21세기 거장전 2018 cineastes in the 21st century 2018.6.19(화) ~7.11(수)

 

 

빛과 바람에 실린 경배

알베르 세라의 <기사에게 경배를>

 

한창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알베르 세라의 <기사에게 경배를>(2006)은 우리에게 익숙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여정을 다룬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변용될지 궁금해 하며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에 알베르 세라는 빛과 바람을 꺼내어 놓는다. 이 영화는 햇빛이 사라지고 여명만 남은 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물은 어슴푸레하게 보여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데, 카메라는 그 시간을 매우 느릿하게 잡는다. 그곳은 ‘저물어간다’라는 기운으로 가득하며, 이는 돈키호테가 처한 운명의 정서와 비슷하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 운명을 거부하려는 듯하다. 저물어가는 기운 속에서 산초에게 월계관을 찾아오게 하더니 그것을 머리에 쓴다. 그것은 기사에게 마지막 남은 욕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기력이 없다. 우리는 월계관으로부터 위대함이 아니라 쇠퇴를 읽어낼 뿐이다.

 

   쇠퇴해가는 흐름을 거슬러 위대해지려고 애쓸 때, 남는 것은 허망하고 낡은 기력이다. 가끔 카메라는 기사를 앙각으로 잡으며 마치 위대함을 포착할 수 있다는 듯 그를 응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우러러본들, 그의 신체는 카메라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정서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무기력해 보인다. 신체의 감각은 카메라보다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카메라는 마치 무기력해진 자신을 인지하듯 자신의 존재감을 서둘러 드러낸다. 기사가 이른 새벽 일어나 갑옷까지 갖춰 입고서는 산초가 깨어나길 기다릴 때, 카메라는 제 몸을 진동하듯 움직이며 연신 무기력하게 앉거나 선 기사를 잡는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몸부림을 통해 응시의 주체라는 것을 알리는 카메라와는 달리 돈키호테는 응시의 주체로 인식되지 못한다. 언젠가 그는 산초에게 떠오르는 해를 보라고 손짓한다. 산초는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쳐다본다. 돈키호테는 다시 갈 길을 가려다 잠깐 멈추어 해가 뜨는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쇼트가 전환되면 숲 끝에 걸린 해가 드러난다. 우리는 즉각 그 쇼트를 돈키호테의 주관적 시점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곧 산초와 돈키호테가 프레임 오른쪽 안으로 들어온다. 카메라는 돈키호테에게 응시자로서의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할 것 같은 돈키호테가 의지할 곳은 산초뿐이다. 그는 산초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지탱한다. 산초에게 하는 말은 곧장 그 자신에게 향한다. 그는 산초에게 지쳐 보인다며 하늘을 보면서 신이 부여할 힘을 믿으라 말한다. 하지만 산초만큼, 아니 산초보다 더 지쳐 보이는 쪽은 오히려 돈키호테 자신이다. 그는 산초에게 하는 말을 통해 생을 지탱한다. 우리는 물이 곧 신의 선물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가 세상으로부터 강제되는 피로를 씻어내고 기력을 되찾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사를 통해 전해지긴 하지만, 알베르 세라는 풍경과 사물을 통해 돈키호테의 내면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려 한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은 돈키호테가 벌판에서 어떤 갑옷 기사와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돈키호테는 그 기사를 향해 소리치지만, 칼을 부딪치며 직접 겨루지는 않는다. 산초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우리 입장에서 의문의 갑옷 기사는 꽤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데, 돈키호테가 어떤 사람인지 상기해본다면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돈키호테란 어떤 사람이던가? 풍차가 거인인 줄 알고 착각하여 그곳을 향해 사정없이 돌진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의 앞에 나타난 갑옷 기사는 그의 정신 착란의 형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알베르 세라는 그가 의문의 기사가 마주치기 전, 그를 바람 속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돈키호테는 마치 바람과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슬쩍 스쳐 지나가는 것. 흐름과 시간들. 그는 온몸으로 ‘흐름’과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과 맞서는 일이다.

 

   산초와 돈키호테의 관계는 이 흐름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지한다. 산초는 갑작스럽게 돈키호테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돈키호테는 그런 산초가 길을 잃었다며 훈계를 하더니 그에게 길을 보여 달라며 신을 향해 호소한다. 그리고 자기 죽음을 예견한다. 그가 죽기 전 산초에게 남기려 하는 것은 산초가 가야 하는 길 그 자체라기 보다는 ‘길을 찾는 행위의 지속’이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목적지가 말해지지 않은 것은 도달하려는 어떤 장소보다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돈키호테는 “이 길을 계속 가겠다고 약속해”라는 말을 남기며 산초를 떠난다. 알베르 세라는 그의 떠남을 지극히 돈키호테적인 방식대로 보여준다. 마치 그의 정신 착란 상태를 우리가 들여다 봐줄 것을 바라는 듯하다. 새벽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고 돈키호테는 그들의 말을 타고 따라간다. 그들은 산초를 데려가지 않고, 산초는 홀로 남아 말없이 칼로 풀을 베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돈키호테가 세상을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돈키호테가 낯선 이의 말을 타고 떠나기 전, 알베르 세라는 돈키호테와 산초가 함께 하는 밤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둘을 함께 잡으면서도 산초 앞에 십자가 형상의 물체를 놓아 그를 가린다. 이는 마치 산초가 묘비 앞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돈키호테의 임박한 죽음은 그렇게 말해진다. 이후 돈키호테는 어쩌면 죽음의 공간일 어떤 곳에서 두 팔을 벌려 하늘과 바람을 마주하고 선다. 그는 칼을 들고 있지 않다. 싸워야 할 대상이 이제 없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그저 온몸으로 다가온 운명을 맞이한다.

 

   <기사에게 경배를>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돈키호테가 낯선 자들과 함께 떠난 이후의 장면들일 것이다. 이는 우리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이상한 전개 역시 우리를 일종의 정신 착란적 상태로 데려간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돈키호테는 갑자기 다시 산초와 함께 길을 나선다. 그는 산초에게 자신이 곧 죽을 거니 자신의 길을 계속 가달라고 요청한다. 어쩌면 돈키호테는 이미 낯선 자들을 따라가 천국에 머물고 있으며, 산초는 그가 자신에게 남겼던 말들을 되새기며 그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초는 돈키호테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바람을 느낀다. 돈키호테는 바람 소리를 스쳐 보내며 산초에게 기사도와 진리에 관해 말한다. 돈키호테의 말은 유령처럼 남아 산초 곁을 머문다. 알베르 세라는 이를 통해 쇠퇴의 기운이 만연한 그 시간들 속에서도 길을 찾는 행위는 끊임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 세대가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후 세대가 이룰 수 있다는 전망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 세대의 많은 모험, 진리를 위한 모험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알베르 세라는 그들을 향한 경배를 빛과 바람에 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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