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평론글은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글을 통해 들여다본 새로운 영화세상으로 떠나보세요!

사샤 기트리 특별전 감독론2019-03-06
Review 3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retrospective sacha guitry 사샤 기트리 특별전 2019.3.1(금) - 3.17.(일)

 

공던지기 놀이의 무대 : 사샤 기트리 감독록

 

한창욱(부산영화평론가협회)

 

    기트리의 영화는 장광설의 무대다. 이야기는 부족하기보다 흘러넘치고, 이는 영화에 활력을 부여한다. 장광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메인 플롯 안에서 주인공이 장광설을 펼치는 경우다. <욕망>(1937)에서는 데지레가 오데트에게, <포이즌>(1951)에서는 블랑딘이 판사와 배심원단 앞에서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만 말해도 될 법한데도 하고픈 말을 모두 하겠다는 심보다. 장광설의 두 번째 방식은 서사를 설명하는 해설자가 등장하는 경우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진주 왕관>(1937), <나폴레옹>(1955)과 같이 그 해설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긴 시간 동안 펼쳐 낸다. 간략하게 줄일 의사는 없어 보인다. <진주 왕관>에서 해설자는 누가 누구와 결혼을 하고,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모두 설명한다. 대체 그 이야기를 어디서 다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지만, 그는 그 긴 이야기와 많은 사람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필연적이라고 여기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기트리 영화의 이런 장광설은 공 던지기 놀이와 같다. <진주 왕관>에서 프랑스 왕이 왕비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을 때, 한 남자 관리가 그에게 다가와 보고한다. 그런데 프랑스 왕은 갑작스럽게 그 남자 관리에게 공을 던진다. 남자 관리 그 공을 받고서 옆에 있는 왕비에게 공을 전달하고, 그렇게 2인의 놀이가 3인의 놀이로 전환된다. 그 관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왕과 왕비의 공 던지기 놀이에 참여하고 연루된다. ‘참여연루는 기트리의 영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의도치 않든 의도하든 간에 사람들은 우연한 순간에 어떤 사건과 이야기에 참여하거나 연루된다. 기트리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야말로 펼쳐지며사람들을 그 속에 담는다.’ <욕망>에서 스태프들이 요리 목록처럼 펼쳐져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책과 같은 것이 펼쳐지거나(<진주 왕관>), 종이 위에 글을 써나가거나(<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의 포문을 열거나 하는 방식(<나폴레옹>)으로 내러티브가 시작되는 것이다. 혹은 창문을 열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포이즌>) 시작된다. 이렇게 펼쳐진 장광설에 사람들은 그저 듣기보다 참여한다. 이야기에 끼어들거나, 궁금한 것을 묻거나, 다른 말을 첨언하면서 이야기를 함께 풀어간다. <진주 왕관>에서 장 마르탱이 아내 프랑수와즈에게 7개의 진주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는데, 아내는 그의 말을 흥미롭게 들으면서 여러 질문을 쏟아낸다. 프랑수와즈는 그렇게 이야기에 끼어들면서 실종된 진주를 찾는데 기어코 연루되고, 그 연루는 강요나 타의가 아니라 자발적 참여에 통해 이루어진다.

    기트리에게는 함께 이야기 만들기가 무척 중요해 보인다. 그는 <포이즌>이나 <욕망>,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등에서 그만의 특유한 오프닝 크레딧을 만들어 낸다. 스태프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담는 것이다. 기트리는 이를 위해 일부러그들에게 카메라를 돌린다. 스태프들은 마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듯 자세를 취하거나 자기 일에 몰두한다. 그들은 단지 기트리의 조력자일 뿐만 아니라 함께 영화와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각자의 영역을 보유한 예술적 주체로 소개된다. 이는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일이자, 그들을 존중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기트리의 이러한 태도는 일련의 트랙-아웃 쇼트와 공명한다. 인물들이 원형 테이블이나 의자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카메라는 처음에는 그들을 가까이서 잡아내다가 점차 그들의 대화가 무르익으면 어느 순간 트랙-아웃하여 인물들을 모두 하나의 쇼트에 담는다. 트래킹 아웃 하는 순간 인물들은 각자 따로 행위하면서도 무언가에 함께 엮여 있다. 카메라는 마치 인물보다는 참여와 연루의 에너지가 스며 나오는 그 순간을 포착하려는 듯이 인물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기트리의 영화 속에서 참여와 연루가 언제나 올바른일에만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부도덕하거나 불운한 일에도 엮이고 만다. <포이즌>에서 마을 사람들과 신부, 변호사, 약사는 폴의 거짓말과 블랑딘의 음모에 의도치 않게 일조한다. 그것은 방관이자 회피이며, 불운한 선택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유명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폴의 범죄를 용인하면서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그것은 자기충족적 희망으로부터 현실을 채우려는 욕구로 보인다. 그들은 폴의 말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다. 신부의 경우에는 폴의 고백, 그러니까 고해성사와도 같은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흘러들어 버렸고, 변호사는 자신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범죄에 가담한 공범의 처지가 된다. 약사는 친절했지만 상황 판단을 잘못하여 죽어 버린다. 이렇게 인물들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범죄에 연이어 참여하고 연루된다. 그것은 나중에 얘기할 도덕적 행위를 향한 물음과도 연관된다.

    기트리는 한 사람을 뒤따르며 내러티브를 전개하기보다 내러티브를 다중 초점화한다. <진주 왕관>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이렇게 세 국가를 가로지른다. 그중 누구도 주인공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없다. 화자로 설정된 장 마르탱도 마찬가지다. 그가 들려주는 진주의 여정은 사실상 그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체 그는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까? 아무리 역사학자라도 역사적으로 유명인이 아닌 사람들의 행적을 모조리 좇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장 마르탱이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 안의 내용물은 화자에 의한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자리한 것처럼 보인다. 샤사 기트리 작품의 활기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독자적 운동에 자리한다.

    배우의 신체는 내러티브 초첨이 다중화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에서는 두 배우가 나폴레옹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한 배우는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 또 다른 배우는 조금 나이가 든 나폴레옹을 맡는다. 그런데 두 배우는 매우 이질적인 외모를 보여준다. 보통 많은 영화에서 한 인물의 젊은 역할과 나이든 역할이 각각 필요할 때 닮은 배우를 쓰는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두 배우가 연기하는 나폴레옹의 나이 차이보다 외모가 드러내는 차이가 현격이 커 보인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는 두 명의 다른 나폴레옹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쪽 나폴레옹은 훤칠한 체격의 준수한 외모지만, 또 다른 나폴레옹은 작고 살찐, 너무나도 빠르게 나이가 든 인물이다. 이러한 비약은 즉각적으로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나폴레옹이 무언가를 잃어왔고, 앞으로도 잃어 갈 것이란 정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물들의 우연한 참여와 연루, 그리고 서사의 독자적 운동은 세계의 우연성과 인간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기트리의 영화에서 도박과 대화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도박은 인간 군상이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상황을 자기의 것으로 활용하려는(take advantage of) 의지들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드러낸다. 이는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욕망>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여자의 상황을 자기의 것으로 활용하듯, 도박과 대화는 상황 의존적 선택으로 이끌리는 인간 군상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반증이다. 상황을 이용한다고 해도 언제나 그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 데지레와 오데트가 자신들의 꿈을 통제할 수 없듯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무력함과 마주해야 한다.

    <나폴레옹>의 나폴레옹은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쓴다. 왜 속임수를 쓰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자신은 우연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메인 플롯과 밀접한 관계없이 삽입된 이 장면은 기트리가 나폴레옹을 어떠한 태도로 보려 하는지, 왜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는지 이해하게 한다. 삶의 우연성을 거부하며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 동안 일에 몸을 바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통제하려던 삶. 기트리는 이 삶에 대한 존경과 연민을 함께 드러낸다. 우리는 190분 동안 통제하려 애쓰지만 통제하지 못하는 한 인물을 보게 된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서 남자는 딜러로 일하며 도박판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나중에 그는 도박의 우연성이야말로 도박의 묘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우연성에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기트리의 인물들은 때때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다. <욕망>에서 데지레가 오데트에게 장관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장관이 정부를 가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포이즌>에서 살인자 폴은 결국 무죄로 석방된다. 기트리의 영화 속 인물들은 도박과 배신, 음모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부도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트리는 그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인물의 부도덕성은 그의 비상한 능력으로 마무리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거꾸로 한정 짓는 효과를 발휘한다. 인물들의 둔감해진 도덕률은 매번 그들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거나, 무엇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로 이끄는 것이다.

     기트리의 인물들은 원하던 바를 이루지도,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 <포이즌>에서 폴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법과 도덕의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진주 왕관>에서 진주를 찾으려던 사람들은 결국 진주를 소유하지 못한다. 처음에 진주를 훔쳤던 도둑들도 배신과 도박으로 인해 진주를 잃는다. <나폴레옹>의 나폴레옹도 자신이 가지려던 것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욕망>에서 데지레와 오데트도 욕망의 대상을 손에 넣지 못한다. 데지레가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통제하기 위해) 결국 오데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해야 했듯이, 그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기트리가 인물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남자가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도리어 또 다른 기쁨을 얻듯이, 기트리는 오히려 그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욕망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그 삶마저도 긍정하려는 듯이 보인다.

    기트리의 이런 긍정성은 삶의 상실과 만날 때 더 깊은 의미를 더한다. 기트리는 영속성이 상실되는 이야기, 혹은 무언가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어떤 이야기를 추적한다. <진주 왕관>에서 아무도 진주를 가지지 못했지만, 진주는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 그대로 살아나간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바라던 것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신화로서 영속한다. 상실한 것 같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그 흔적이 오래도록 살아 있는 것이다. 기트리의 영화가 그토록 장황한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은, 혹은 인물들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영속성과 상실성 모두를 그 이야기와 말 속에 담으려 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기트리의 영화 속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초상화는 주체의 그러한 상실감과 그것에 대한 저항을 환기시킨다. 인물들은 자신을 영속시키기 위해 초상화를 그린다. <나폴레옹>의 나폴레옹, <진주 왕관>의 왕들은 자신들과 자손의 초상화를 통해 영속성에 대한 희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트리의 장황한 이야기는 그 긴 시간 속에 잠재해 있는 영속성에 대한 희망과 스러져가는 영속성을 동시에 대조시킨다. 그렇게 초상화는 시간에 대항하는 인간의 무력한 의지를 대변하는 동시에 주인공으로서 중심화된 인물의 자리를 뒤흔든다. <진주 왕관>에서 카메라는 장 마르탱의 아내 프랑수와즈의 초상화와 함께 잡아낸다. 전경에 놓인 그녀의 초상화는 듣고 참여하는 힘으로 자리하며 장 마르탱의 이야기하는 힘을 상쇄시킨다. <나폴레옹>에서 뒤샤뗄이 초상화와 나폴레옹이 닮아서 놀랐다고 말하는 순간은 나폴레옹이 그 초상화에 박아 놓았던 권력의 영속성을 뒤집어엎는다. 복제물이 실재를 닮은 것이 아니라 실재가 복제물을 닮았다는 그 말은 실재는 결코 초상화에 새겨진 영속적 아우라를 넘어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초상화가 실재 삶의 덧없음을 은폐하려는 복제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기트리는 이 덧없어 보이는 인간 삶을 오히려 노출함으로써 삶의 활기를 탐색하려 한다.

 

 

    기트리의 영화에서 인간들이 빗어내는 이야기는 일방적 화자를 통해 전해지기보다는 다중의 참여와 연루, 다중의 초점을 통해 전해진다. 한 인간이 보유한 능력이란 언제나 한계가 뚜렷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주 상황 의존적 상태로 놓이면서 상황을 통제하거나 이용하려 하고, 그 의지는 때때로 실패로 귀결되거나 예상치 못한 길로 접어든다. 공을 받아서 던질 것인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그 놀이에 연루되는 순간들이 기트리의 영화 곳곳에 나타난다. 고정된 구심점을 좇기보다 오히려 다기한 참여와 연루, 초첨화가 만들어내는 원심력들을 지켜보려 한다. <욕망>에서 극부감으로 제시된 식사 장면은 바로 그러한 원심력을 형상화한다. 기트리는 인간 삶의 이러한 측면을 영화적 활기로 녹여내면서 복잡하게 얽힌 삶을 심드렁한 자세가 아니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려 한다.

다음글 월드시네마 XVI <타부>
이전글 사샤 기트리 특별전 <세 개가 한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