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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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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이 사랑한 영화들 <파리 1900>2018-12-18

 

<파리 1900>: 벨 에포크에서 세계대전으로 향하는 풍경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실험영화계에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파리 1900>의 작업방식이 파운드 푸티지와 동일한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흥미를 일으킨다. 카메라 없이, 다시 말해 직접 촬영을 하지 않고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오늘날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극적으로 논의되는 사안이다. 그런데 1947년에도 누군가들은 그와 같이 세련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 증거가 되어,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종종 잊는 오만한 현대인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테, 고몽, 영국영화협회 등으로부터 수집해온 갖가지 소스들, 그러니까 영화사 초기에 촬영된 영상 이미지들과 뉴스릴필름, 영화, 사진과 그림들만으로 이 영화는 프랑스의 좋았던 시절, 벨 에포크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물론 엄밀하게 말해서 실험영화의 기원은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에서 찾아야 마땅할 테고, 영화 안에 이루어지는 전유 또한 그에 비교할 수 없이 온건하다는 걸 안다. 그렇다 해도 이 요소는 여전히 매혹적인 다큐멘터리에 흠결이 되지 못한다.

 

 

    감독 니콜 베드레스는 1911년생이다. 영화가 조망하는 1900~1914년에 대한 본인의 경험치를 이용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영화에서 정치, 사회,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아니 그 하위분류 항목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집단기억을 탁월하게 망라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결코 단순한 쇼트들의 나열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농담을 섞어가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때로는 현상에 대한 분석을 가한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에 여성들의 달라지는 머리 모양에 이어 모자의 유행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는 핸드백을 모자처럼 쓸 수 있다는 설명을 슬쩍 덧붙인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서양복식사에서 들어본 적 없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가방을 머리에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여성의 모습에는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다. 그런가하면 장신구가 소유자의 섬세한 취향과 재력을 요구한다는 내레이션에 따라 한 여인이 허리띠, 팔찌 등등을 하나씩 펼쳐본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러면 보석의 일부에 이중인화로 들어가 있는 여인들이 이 옷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젓거나 괜찮다는 것처럼 끄덕거리고. 춤을 추는 이도 있다. 원본영화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장면 또한 익살스러워진다.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와 더불어 마르스 광장에 설치된 대관람차의 모습을 비추는 데서 시작한 영화는 거리마다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숙녀들을 바라보고, 풍성한 시장 풍경과 화려한 카니발 행렬, 활기찬 휴가지 안에 역동하는 당대 삶들의 생생한 정취를 담아낸다. 최신 기술과 과학이 적용된 에펠탑은 흉물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무색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이 철탑을 향한 관심을 표시하고 음악가들은 노래와 교향곡으로 찬미해마지 않으니, 에펠탑은 마침내 파리의 상징이 된다. 모든 분야의 지형이 달라지는데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또한 고정돼 있겠는가. 여성들에게는 자유와 평등의식이 싹트고, 이들의 사회진출과 참여도가 증가한다. 디자이너 폴 푸아레는 여성의 신체를 구속해온 코르셋을 버리지만 당시의 이국취향을 반영해 폭이 좁은 치마를 선보인다. 신축성이라고는 없고 연약한 레이스를 치맛단에 이어낸 디자인이 제안되기도 한다. 아아, 패션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아름다운 것)인가.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동양의 이국취향은 건축, 장식, 공예 전반에도 나타나 아르누보, 말 그대로 새로운 양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리셰의 정신질환 연구, 쿠에의 심리학, 자동차, 지하철, 비행기 기술의 발전도 이 시기를 즈음하여 일궈낸 성과다. 그러니 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시간의 흐름이 곧 발전이요 진보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루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도 벨 에포크의 문인이었다. 미술계에도 쟁쟁한 이름들이 포진해 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채 파리시를 내려다보며 살았던 로댕, 지금까지 사랑받는 일군의 인상파들-르누아르, 모네, 세잔, 그리고 피카소와 마티스의 파격적인 등장. 생상스, 드뷔시를 위시한 음악가들, 카루소 같은 가수들, 무용수들, 모리스 슈발리에, 폴 무네처럼 당대를 주름잡은 배우들,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절에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겼다.

 

    모든 쇼트들은 마치 처음부터 이 영화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처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작동한다. 방대한 자료를 능란한 편집으로 다루고, 내레이션과 음악을 비롯한 사운드를 이용한 덕분이다. 이를테면 파리의 새벽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의 초반, 창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웃는 여인들과 자루를 멘 행인이 (카메라가 있는 곳을 향해) 흘끔 돌아보는 뉴스릴필름에는 호루라기 소리를 더하는 것으로 재연 내지는 당대에 유행했던 경찰 추적물의 한 장면으로 기능토록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도둑들과 그 뒤를 쫓는 경찰들이 벌이는 소동이 이어진다. 인물들의 동선에 연속성을 확보한 편집을 통해서 그 장면들은 언뜻 하나의 영화 안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 자전거를 훔쳐서 달아나던 도둑 일행 중에 한명이 가로등 근처에 다다라서, 바짝 따라온 경찰을 하늘 높이 던져버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쇼트의 전환과 함께 화면 밝기와 장소의 변경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도둑이 입은 옷마저 달라져서 알아챌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지만 눈 밝은 관객이여, 그 정도는 넘어가도록 하자.

    또한 어떤 장면들에 흐르는 공기, 생생함과 활력, 거기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을 보면 그 자체로 벨 에포크이지 않은가 주장하고 싶어진다. 영화에는 지금껏 사람들이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위치와 속도, 높이에서 일상의 풍경들을 볼 수 있는 수단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파리에 지하철이 도입되었을 때, 플랫폼을 떠나는 지하철을 지켜본 다음 이어지는 일련의 뉴스릴필름에는 설렘과 생동감이 가득하다. 막 어둠을 벗어나 눈부신 지상을 달리는 지하철 안, 카메라는 힘차게 앞으로 뻗어있는 철로를 본다. 측면의 다리 너머로 에펠탑, 대관람차, 건물들, 세느강과 선착장, 시내의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지하철이 달리면서 바뀌는 전방의 풍경들은 프레임 내부로 전진 또 전진하는 지하철의 움직임을 상기시킨다, 거리에는 마차들이 서두를 것 없이 지나가고 그 곁에 세운 고가도로 위로 지하철은 다시 한 번 미끄러지듯 질주한다. 역에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은 모자란 프레임수로 인해 유난히 바빠진 것 같지만, 그 속도마저도 쇼트에 힘찬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 뉴스릴필름들은 삶에 대한 당대인들의 끝없는 긍정과 낙관적인 의지, 그리고 그들이 품은 장밋빛 전망의 일부를 표상하는 것 같다.

 

 

    일찍이 바쟁은 중령이 강등되고 폴 데룰레드가 담화할 때 내리는 비, 화질 저하로 인상파의 그림처럼 보이게 된 모네의 정원 풍경 장면과 같이 이 영화가 포획한 우연과 사실의 재능에 대해 지적했다. 먼 미래, 이국의 사람이라는 제약이 없다고 해도 범속한 나로서는 도무지 발견하지 못할 예리하고 멋진 시선에 수긍과 감탄만을 표할 뿐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는 비를 파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웠던 물난리와 연결 지을 수는 있을 것 같다. 한동안 도시를 베니스처럼 만든 지겨운 물은 곧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 때부터 전운을 예감하는 불길한 기운들이 영화 내부에 도사리기 시작한다. 그 절정에 재단사의 죽음이 있다. 그는 본인이 만든 낙하산을 착용하고 그것이 펴지지 않아 죽는다. 카메라는 에펠탑 위에 흡사 날다람쥐나 박쥐처럼 낙하산을 두르고 서서 주저하는 남자를 지켜본다. 그가 공중으로 몸을 날릴 때, 지상에 있던 카메라가 이 자유낙하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정확히 틸트다운 한다. 지면과 충돌한 그가 시신이 되는 순간을 그대로 목도하는 것이다. 몰려온 사람들은 냉혹하게도 이 불행한 자가 땅을 팬 흔적에 자를 꽂는다. 내레이션은 친절히 그게 6인치라고 일러준다. 이다지 황당하고 가치 없고 의미 없는 죽음이라니.

    그 후 전개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으로 영광을 누린 이 시대가 얼마나 연약한 지평 위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평화 유지에 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세는 뒤숭숭해진다. 국가 내부적으로도 이념이 충돌하고, 어둡고 혼란한 사회의 면면이 정체를 드러낸다. 벨 에포크의 세례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이어가는 힘겨운 삶, 노동조합의 항의시위, 파업, 폭동, 혁명, 그리고 결국에는 전쟁. 영화 초반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이 한 쇼트 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의 풍요와 번영이 식민이라는 폭력과 착취를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 반응이 과민한지 혹은 영화의 의도인지 우연에 불과할지 당신은 고민했을까? 그 장면을 어떻게 소화할지에 관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까? 나는 식민의 역사가 있는 우리 또는 나만이 그 장면이 마음에 걸리는지가 사뭇 궁금하다. 어쨌든 이에 대해 괘념치 않은 사람일지라도 남의 땅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 무기실험을 자행하고 이민족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영화 후반부의 군사훈련 장면에서만큼은 씁쓸한 뒷맛을 느낄 것을 확신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징병되는 군인들이 곧 출발할 기차를 타고 손을 흔드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플랫폼에 서서 마주 바라본다. 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죽음들의 얼굴, 그리고 저물어가는 벨 에포크라는 시절을 응시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안녕히, 청년들이여. 부디 몸조심하기를. 즐거웠어요, 좋았던 시절이여. 불안과 근심, 걱정을 안은 기차는 이제 4년간의 암흑 같은 세계대전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영화의 종료를 알리는 자막을 대면하는 순간, 거기에 있는 끝이라는 단어는 영화의 일부인 양 한 세계의 파탄과 종말을 선고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파리 1900>은 영민하고 충실한 서술자이자 쇼트의 기술자로서 니콜 베드레스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충분한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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