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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일본 영화의 재조명 <언러브드>2018-12-03
21세기 일본 영화의 재조명 리뷰

 

<언러브드> - 신세기의 사랑은 미련을 자기욕망으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김영광(부산영화평론가협회)

 

    <언러브드>(2001)의 제목은 과잉정보이다. 이 영화는 각자의 생활양식을 고수한 연인들을 그려낸다. 결국 사랑하지 않는’ ‘사랑받지 않는이야기가 주제인 셈이다. 사랑이 타자를 통해 자아동일성이 깨지는 경험이며 생활양식을 바꾸는 계기라면 말이다.

 

    <언러브드>는 가게야마 미츠코와 그녀의 연인들 가츠노 에이지, 시모카와 히로시가 주역이다. 언급한 것처럼 연애 중인 세 사람의 관심사는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 사람 다 나빴네, 자기밖에 몰랐네도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어쨌든 <언러브드>는 생활양식의 차이로 결별한 미츠코와 히로시가 재결합하며 끝이 난다. 관람자는 일찍이 기대를 접은 결정적인 순간, 일치를 이룬 듯한 격정적인 클라이맥스를 연출하며 말이다. 결별한 사이 사건도 없었고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며 관계를 끝낸 히로시가 돌아오는 게 전부인데도 그렇다. 이 클라이맥스는 제목에 충실했던 이 영화의 주제를 어렴풋하게 만들고 순순히 주제를 따라가던 관람자를 황망하게 만든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새드엔딩의 지연인가,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한단 말인가, 여태까지 무엇을 보아내지 못했던 것인가. 여전히 복잡한 마음, 겸연쩍게도 그것이 이 글의 주제라면 주제다. 주제넘은 해석을 했단 마음이다. 그래도 인물들에게 주목하고 싶었다. 이 영화 주역들에게 시대적 상징성이 감지되어서 말이다.

 

    미츠코는 시청 직원이다. 그녀는 승진할 능력이 있지만 말단 직위를 고집한다. 애용하는 자전거나 바퀴처럼 절제와 순환이 준칙인 것이다. 미츠코란 독특한 캐릭터는 무욕과 자족이 삶의 에너지인 사토리세대’, 일명 득도세대의 생활양식을 상기시킨다. 정식명칭이 등장한 건 영화보다 10년 후의 일이지만 그 세대를 예고하는 상징성 정돈 있는 셈이다. 미츠코는 그 독특한 세대의 부정성도 공유한다. 책임이 동반되는 일을 회피하려는 경향이다. 그녀는 앞서 말한 승진은 물론, 히로시가 더 좋은 직장을 찾으려는 일마저 거북해한다. 그런 미츠코에게 모멸감을 느낀 히로시가 결별의 으름장을 놓아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미츠코는 털썩 주저앉자 울먹이긴 하지만 연인을 붙들 사과의 말도, 사랑의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난 이런 식으로밖엔 안 돼. 설령 혼자가 된다 해도 너를 계속 생각할 거야”). 어찌 보면 미츠코와 두 연인의 결별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대개 연인들은 물질적으로 더 나은 생활양식을 제안하거나 상대와 함께 추구하길 바라니까.

    에이지는 부유하고 유능한 기업인이다. 그는 미츠코의 잠재력에 반해 유혹했으며 그녀를 지원할 의사를 거듭 밝혀왔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미츠코를 보며 일단은 안락한 생활 안에서 함께 삶을 꾸리자고 물러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단락된 요구조차 미츠코에겐 위화감이 되었고 나름의 타협점은 연애의 마침표가 되어 돌아왔다. 미츠코와 결별한 에이지는 자신의 생활양식에 더욱 집중한다. 그는 상류층임에도 더 상승하려는 직선의 존재이자 상대에게도 사회적 층위의 욕망을 요구하는 직언의 존재로 볼 수 있다. <언러브드>가 일본의 잃어버린 10중에 제작된 걸 고려하면 시대착오적인 상징성을 가진 셈이다. 사토리세대의 탄생은 잃어버린 10년의 결과다. 미츠코는 그를 다른 세계사람이라고 불렀다.

    히로시는 일머리도 실력도 없는 아마추어 뮤지션이다. 그는 자기주장을 잘 못하는 답답한 유형, 자기욕망을 잘 모르는 요즘 젊은 세대의 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사회적 층위의 욕망을 욕망하는 에이지나 무욕을 욕망한다고 공언하는 미츠코와 달리, 상대를 깔보거나 상대가 위화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보통 사람이기도 하다. 히로시는 타인(프로뮤지션인 친구와 가츠노)의 욕망을 수더분한 선에서 욕망하는 곡선의 존재, 상대에게도 그런 수줍은 자세를 기대하는 곡언의 존재로 볼 수 있다. 일본의 문화적 환경으로 보나 불안한 시대적 배경으로 보나 가장 평범한 상징성을 띠는 셈이다.

 

    물론, 세 사람의 시대적 상징성 또한 ‘UNLOVED’라는 주제의 한 축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관람자가 이 영화에서 감각하는 사랑불가분위기는 생활양식의 차이만으로 공감이 가능하다. 생각해볼만 한 건 사랑을 가로막는 생활양식은 현실이 세운 벽이지만, <언러브드>에서 감지되는 시대적 상징성은 그 현실에 대한 과잉표현이라는 점이다. 즉 이 영화의 시대적 상징성은 생활양식이란 벽을 고수한 연애의 주역들을 평범한 단역으로 끌어내리는 요주의 효과이다. 이때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 ‘사랑받지 않는주체가 아니라 단지 사랑했던’ ‘사랑받았던경험이 억압된 현상으로 표현된 객체에 불과하다(영화상에 등장하는 제목이 ‘UN’은 푸른색 ‘LOVED'는 빨강색으로 구분된 건 Un’~아니다같은 부정형 대신 억압이란 현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프로이트의 맥락일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의 연애과정에서 보아야하는 것은 사랑보다 생활양식을 추구한 현실 주체들의 욕망이 아닐 것이다. 현실의 객체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지난 사랑의 경험으로 추동하는 내면의 욕구일 것이다. 그건 인정하는 순간 현실 주체도, 사랑의 주체도 못 된다는 생각에 두 번 부정한 자기감정, 지난 사랑(LOVED)에서 스스로 억압(UN)한 자기욕망 미련(UNLOVED)‘인 것이다.

    <언러브드>의 클라이맥스는 이 영화의 연애과정에서 억압되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가시화한 형식일 것이다. 표면적 주제를 끌어내리고 주제넘은 주제 미련을 표제화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람자가 황망해지는 건 이미 표면적 주체를 주제로 파악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결별을 선언한 히로시가 지난 사랑 미츠코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너무 평범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무릎을 꿇고 포옹을 하며 억압된 자기감정을 분출하는 격정적인 결과는 너무 평범하게 일어난다. 사실 죽일 듯이 싸우고 얼마 되지 않아 폭풍화해를 하는 현실 연인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관람자가 황망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두 연인이 생활양식이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자기 주제 파악, 그리고 그 주제 파악에 소요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사랑의 경험, 결국 그 사랑의 경험에서 자신이 억압했던 미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러브드>의 클라이맥스는 관람자가 미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형식, 미련을 자기욕망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사실적인 형식인 것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우리가 연인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련이 자기욕망으로 느껴지지 않아서니까.

 

    <언러브드>는 결별이 예감되는 순간들로 자욱한 영화다. 특유의 확정적인 블루톤, 한 번도 마주보며 웃지 않는 얼굴들, 무엇보다 사랑 대신 사과가 요구되는 생활양식들. 그치만 이 영화 끝에 남은 두 사람을 연인으로 결정짓는 건 미련이란 사랑의 평범성이다. 연인들에게서 미련 없이 현실에 맞서는 정치성,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주체성을 보려하는 사랑의 보편성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것들이 연인을 결정짓는다면 신세기의 사랑은 실현 불가능한 경험으로 남는다. 신세기의 첫해에 만들어진 <언러브드>는 미련을 자기욕망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역설한다. 아직 사랑이란 경험과 결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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