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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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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예외적 영화들 <바다의 침묵><몽상가의 나흘 밤>2019-08-19
Review 8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거장의 예외적 영화들 Their Unexpected Films 2019.8.16(금) - 9.1(일)

 

 

멜빌과 브레송: 우연 혹은 필연적인 공명

 

이상경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멜빌의 <바다의 침묵>(1947)과 브레송의 <몽상가의 나흘 밤>(1971)거장의 예외적 영화들이라는 영화의 전당 상영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두 영화들은 허문영 프로그램 디렉터의 설명처럼 거장의 작품 목록 안에 있는, “특유의 영화적 인장이 없거나 때로 상반된 요소들이 담긴 이례적 영화들에 속할 것이다. 12()의 작가(작품)들 가운데 이 작가(작품)들을 또다시 예외적으로 동시에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들이 이례적이므로 두 작품이 갖는 공통점으로 두 작가의 유사성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궤적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만난 접점이라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운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멜빌의 첫 번째 장편영화 <바다의 침묵>은 마치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시기는 브레송이 아직 완전히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기 전이다. 마치 멜빌이 브레송을 예견이라도 하듯 브레송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떠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멜빌의 첫 장편 이전에 브레송이 오히려 두 편의 장편들, <죄악의 천사들>(1943), <볼로뉴 숲의 여인들>(1945)을 먼저 발표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성일 평론가는 <바다의 침묵>이 이상할 정도로 <죄악의 천사들>을 닮아있다고 말하기도 했다(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2010). 거칠게 말하면 멜빌이 브레송 이전의 브레송을 통해 미래의 브레송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미래의 브레송은 또 다른 브레송이 되었던 것일까. 너무 거친 단언일 것이다.

여기서 하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진정으로 자극하는 것은 한 감독의 예외적 영화들이 단순히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다르다는 평면적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예외성이 종종 그 감독의 고유한 영화 세계를 우회 혹은 아이러니의 길을 경유해 되짚어 더 깊이 부각시킨다는 점일 것입니다.”고 한 허문영의 기획의도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예외적이라 생각되는 영화들이 그 감독의 세계를 깊이 부각시킬 수 있다면 브레송의 작품 세계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되는 세 번째 장편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이전의 두 작품들을 참조한(참조했다고 추측되는) 멜빌의 영화가 브레송의 세계를 선취하는 것이 이상한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정성일은, 브레송의 <불로뉴 숲의 여인들>의 시나리오를 쓴 장 콕토에 의해, 멜빌이 브레송을 알게 되고 그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짐작한다. 장 콕토는 멜빌의 현장에서 영화 작업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멜빌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여 그가 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였을 거라는 짐작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가질 것 같다.

 

 

    동시대 프랑스 감독인 그들의 우연이거나 필연적인 공명에 우리들이 이렇게 호기심을 가지고 추측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궤적이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이다. 멜빌은 미국의 스릴러 영화를 보며 자랐고 프렌치 느와르를 개척한 인물이며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에서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나 후기엔 거대 스튜디오와 작업하며 상업적 마인드를 견지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반하여 브레송은 비타협적인 작업 태도와 가톨릭적인 주제의식을 견지하였고 프랑스 현대 영화의 방법론을 제시하여 누벨바그 세대들의 지지를 끌어낸 인물이다. <바다의 침묵>은 초기 멜빌이 일시적으로 브레송과 근접하면서도 후기의 작품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를 예시한다. <몽상가의 나흘 밤>은 브레송이 줄곧 견지해온 절망의 모티프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시청각적 아름다움을 전경화 하였으며 당대에는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후대에 와서 재평가 되고 있다.

 

    <바다의 침묵> 초기 프롤로그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베르코르(본명 장 브륄레)의 원작인 동명소설을 서류 가방을 통하여 두 남자가 은밀하게 주고받는다. 레지스탕스였던 원작자가 저술한 그 책은 구미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으나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선 타이프라이트나 수기로 베껴서 돌려 읽으며 프랑스인의 저항의식을 고취하였다.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인 멜빌의 입장에서 이 프롤로그는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국과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선연한 기억의 재생이다. 동시에 그가 어릴 때부터 몰두했던 미국 범죄영화의 긴장도 배어 있다. 영화의 본 내용과 이 프롤로그의 리듬은 사뭇 다르다. 브레송의 <죄악의 천사들> 초반에도 이러한 느와르 장르의 긴박함이 등장하나 멜빌의 경우 전체 구성과의 이완은 더 심해 보인다. 멜빌의 첫 영화에서 느와르적 유희는 이전 브레송의 경우보다 결코 더 나아간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 용도는 기억과 다짐의 부속물이었다.

<바다의 침묵>은 초로의 프랑스 신사와 그 질녀가 사는 집에 나치 독일 주둔군 장교가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화이다. 침묵의 주체는 신사와 질녀이며 그에 반해 예의 바른 전직 음악가인 장교는 자신과 자신의 교양, 자신의 프랑스에 대한 존중에 대해 일방적 진술(대화라고 할 수 없다!)을 한다. 신사가 장교를 존경해 마지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침묵에 대해 장교가 더 이상의 강압적 대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화면에서 압박해 오는 장교의 목소리와 굳게 입을 다문 신사와 질녀의 얼굴 클로즈업(특히 옆얼굴)은 같은 프레임 내에서 소리와 이미지가 벌이는 대결을 보여준다.

 

 

베르코르의 고향 마을에서 로케이션 촬영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부분적 야외 촬영을 제외하곤 대부분 신사의 집 안에서 실내극 형식을 띠고 있다. 장작불이나 최소의 조명으로만 촬영되어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때론 장교의 심리를 묘사하는 그림자 등을 통해서 표현주의적 기법이 드러나기도 한다. 멜빌이나 브레송의 교집합이라 할 미니멀리즘적 간명성은 촬영 당시의 제작환경과도 무관하진 않았을 것이다. 브레송의 전매특허라 할 신체 부분, 특히 손 클로즈업은 멜빌의 이 영화에서 너무나 두드러진다. 신사가 장작불에 피아노 연주하듯 자신의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그의 손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의 과잉은 브레송 인장의 원천적 소유권을 의심케 한다. 군복을 입은 장교의 어색한 손, 뜨개질하는 질녀의 침묵을 대변하는 손도 중요한 클로즈업 리스트에 속한다. 더구나 신사의 내레이션으로 손 클로즈업에 대해 얼굴보다 더 표현적이라는 논평을 할 때는 브레송이 몇십 년 뒤에 쓴 그의 영화론 시네마토그래피에 대한 단상(1975)을 떠올리게 한다. 이에 반하여 브레송의 초기 두 장편은 뚜렷한 신체 클로즈업은 별로 없고 <죄악의 천사들>의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형사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수갑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수녀의 손 클로즈업은 그렇게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장교는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연인처럼, 운명처럼, 미녀와 야수처럼 비유하며 눈앞의 두 프랑스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침묵 앞에 선 그의 발화는 실패한다. 장교의 양심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과 고귀함 그리고 이성적 매력은 질녀의 손끝을 떨리게 하지만 그녀의 입을 여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장교가 다른 독일 장교들로부터 야수적이고 반문명적인 독일의 야심을 듣고 폴란드에서의 학살을 알게 되고 돌아온 순간, 두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고 자살이나 다름없는 전선에 자원했음을 알리는 순간, 처절한 패배를 자인하는 순간, 장교는 질녀의 입을 연다. “아듀(안녕).” 장교의 최초(그리고 마지막) 성공은 그의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바다의 침묵> 이전 브레송의 두 영화도 비슷하다. <죄악의 천사들>에서도 순수하고 자기 확신에 찬 수녀 안느 마리는 살인죄를 짓고 수도원에 들어온 테레즈를 교화하려 애쓰지만 결국 그녀는 수도원에서 쫓겨나고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른다. 안느 마리가 죽기 직전 테레즈 앞에서 테레즈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안느 마리의 침묵이었음을 인정할 때 테레즈는 마음을 연다. <불로뉴 숲의 여인들>의 경우에도 매춘부였지만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가 결혼 직후 진실을 알고 도망갔던 신랑의 신실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 순간은, 그녀의 삶의 불길이 가늘게 흔들릴 때였다. 주체의 소멸이 목적처럼 보이는 성공담, 다른 말로 존재와 세계의 합일 불가능성의 실패담을 이 영화들은 보여주고 있다. 브레송의 영화들은 이렇듯 절망의 에너지를 영화적 운동의 연료로 삼아왔다.

 

    브레송의 예외적 영화로 인정되는 <몽상가의 나흘 밤>은 어떠할까? 화가인 자크가, 애인의 변심으로 강에 뛰어들려는 여자 마르트의 자살시도를 말리고, 다음날 그녀를 만난다. 마르트로부터 자신이 올 줄 알았느냐, 우리는 영리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자크는 자신은 그럴 만큼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마르트가 자기 얘기를 해 달라고 할 때도 자크는, 나는 아무도 안 만나고 말도 안 해서 스토리도 없다고 한다. 자크는 길에서 만난 매력적인 여인들을 따라 다니다 그녀들을 (당연하게도) 놓치면 녹음기에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몽환적 내용을 녹음시키고 그림을 그린다. 이런 자크에게 마르트가 행복하지 않은 날도 있냐고 물을 때 자신이 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느껴 후회할 것이 없다, 잃은 것은 완전한 무라고 대답한다. 그는 애초에 소멸될 수 없는, 생성되지 않은 주체 같다.

마르트와 함께 마르트의 애인을 기다리며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던 자크가 표변하여 마르트를 떠나려는 사태가 발생한다. 애인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순간, 그간 자크와 애인 사이에 양다리 노선을 견지하던 마르트가 급격하게 자크에게 기우는 순간이었다. 욕망하는 주체로 생성되려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마르트를 밀어낸 원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르트의 끈질긴 구애는 성공하여 자크의 손과 마르트의 다리는 브레송의 클로즈업으로 연결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애인이 나타나고 마르트는 애인과 떠나며 다시 자크는 자신의 안전한 껍질 안으로 후퇴하여 몽환으로 대치된, 소멸되지 않는 주체로 돌아간다.

 

센 강에 뜬 유람선과 집시와 히피들의 포르투갈어, 영어로 된 노래들이 넘실거리는 파리의 아름다운 밤 풍경은 두 번째 컬러 영화를 만든 브레송의 시각적, 청각적 과소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없는, 욕망하지 않아 생성되지도 않은 주체, 절망할 수도 없는 존재의 배경이 되는 이 세계는 주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현실이며 이 이상하고 슬픈 아름다움은 브레송이 마침내 도착한 아수라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어떤 실패담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당대 유럽의 좌절감을 통해, 허문영의 표현처럼 브레송의 고유한 영화 세계를 더 깊이 부각시키는영화가 된다. 자신에게 공명한 멜빌에 공명한 브레송은 이렇게 자신에게 공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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