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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 <멀홀랜드 드라이브>2020-01-06
리뷰 오래된 극장 2019.12.26.(목)~2020.1.26.(일)

 

 

<멀홀랜드 드라이브> : 맞지 않는 퍼즐의 세계

 

김민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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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두고 흔히들 표현하는 것은 현실의 혼동이자 모호함의 경계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라는 단어로 영화를 쪼개기엔, 다분히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데이비드 린치가 몽환적인 자의식을 구축하기 위해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더 나아가 꿈이나 현실 따위의 구분조차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세계를 이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슷하지만 서로 아귀가 조금씩 안 맞는 다른 세계들을 배치하고 엮은 다음, 영화가 가능함을 린치는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맞지 않는 퍼즐의 세계이자,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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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앤(으로 추정되는)의 시체를 보고 놀라 달려 나오는 리타(로라 해링)와 베티(나오미 와츠). 둘은 마치 착시 현상처럼 둘은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다시 하나로 합친다. 잠깐 멈추던 영화도 다시 시작된다. 여기서 평행 우주의 탄생을 직감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는 전작인 <로스트 하이웨이>(1997)와 또 다른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는 오프닝부터 의미심장하다. 여러 커플이 그들의 그림자와 함께 츰을 추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다루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커플은 그림자 안에 실제 모습이 들어가 있기도 하고, 그림자와 실제가 반대로 춤을 추는 커플도 있다. A에서는 통했던 논리가 B의 세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뿌리는 같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평행세계의 논리이다. 뒤섞인 장르도 마찬가지다. 미스터리, 누아르, 코미디, 뮤지컬 등등 각자의 장르는 각자의 위치에서 기능을 다 한다. 어느 하나 주도적으로 이 영화를 점령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배우 이름들은 주연에 상관없이 영화에 나오는 순서대로 기록된다. 심지어 12역을 맡았던 배우들도 캐릭터와 분리되어서 기록된다. A의 주인공이었던 배우가 B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존재도 영화에서 주도적일 수 없다는 린치의 의지 같다.

 

평행세계에서는 일부분만 뒤바뀐다. 리타는 카밀라로, 베티는 다이앤으로 바뀌지만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다. 뭔가 느슨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평행 세계들은 아귀가 맞지 않다. 내러티브의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내러티브는 전혀 관계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결국 관객들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작품을 두고 각자의 해석이 이토록 다른 이유도, 제아무리 그럴듯한 해석과 주석을 달아놓아도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감독이 관객과 진실게임을 하는 미스터리 영화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애초에 미스터리도, 진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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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위력적인 지점은, 전혀 간섭할 수 없는 세계들이 공존을 가능케 하고, 엮여져 기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영화의 초반, 범죄 스릴러물에 흔히들 나오는 형사 듀오가 나온다. 그들은 식당 뒤로 가게 되고, 벽을 사이에 두고 옆 방향으로 나아가는 트래킹 숏의 끝에는 정체불명의 괴한이 점프 스케일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시퀀스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후에 자아내는 서스펜스는 과연 사운드와 조명의 힘으로만 가능했던 것일까? 식당 시퀀스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동일한 트래킹 숏과 유사한 장소의 재현으로 인해, 관객들은 마치 그 뒤에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을 지닌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이 상태는 영화가 끝나도록 지속한다.

 

서스펜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리타가 베티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되찾는 여정처럼 진행된다. 중간중간 배우 캐스팅으로 협박당하는 아담(저스틴 서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코믹한 킬러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 뒤에는 휠체어를 탄 남자로 대변되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는 것처럼 나온다. 마치 이 넷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연결될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역시 어떤 것도 연결된 바 없다. 미스터리가 불가능한 세계에 미스터리적 분위기는 잔존해있는 것이다.

 

립싱크로 부르는 음악들도 중요한 사례다. 영화 중반, 아담의 영화 오디션 씬에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캐롤(엘리자베스 랙키)의 노래가 실제로 부르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립싱크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극장 시퀀스와 대비된다. 심지어 극장의 남자는 이것이 립싱크임을 경고함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만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해왔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의 말을 들어도 우리는 립싱크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의심한다. 그런 우리를 두고, 린치는 자신의 세계에서 거짓(진실)은 없다고 선언한다. ‘거짓된 진실진실된 거짓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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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린치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세계의 존재들을 끌어들여 영화의 구조와 맥락을 만들어 나간다. 그 앞에서 관객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혹자는 이 영화가 원래 TV 시리즈의 짜깁기로 만들어졌음을 언급하며, 만듦새의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멀홀랜드 드라이브>야말로 장르의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영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독이 관객들을 손쉽게 조롱하지 않는다(유혹이 쉽게 들것 같음에도)는 점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미덕은 우리의 관습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에서 그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런 태도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맞지 않는 퍼즐들이 가능한 퍼즐 판을 만드는 것, 이와 동시에 스크린 안팎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린치는 이를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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