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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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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2020 -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역사 수업>2020-05-18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2020 2020.5.19.화~6.10.수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와 떠나는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역사 수업>

한창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장 마리 스트라웁과 다니엘 위예의 <역사 수업>(1972)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역사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 씨의 사업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현대에 사는 한 남자가 은행가와 이름 없는 농부, 법률가와 작가, 모두 네 명의 과거 사람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남자의 대화 상대들은 카이사르가 부패한 관리와 맞서고 해적들에게 잡힌 뒤 노예 밀수를 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한 자신만의 버전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대사는 길게 이어진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 수업처럼 들린다. 법률가는 상업 행위에 수반되는 폭력성을 옹호하고, 작가는 휴양지와 같은 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가난한 자들의 절망을 말한다. 은행가는 민주주의를 무시하며 농노들에 대한 착취와 학살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로부터 이 영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를 지시하려고 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역사 수업>을 말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스트라웁과 위예의 영화에는 액션이 없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액션이란, 인간이나 사물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 내는 동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미클로슈 얀초의 영화가 물처럼 흘러가는 액션들을 통해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한다면, 스트라웁과 위예는 액션 없는 행위를 반복하며 영화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액션 없는 영화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액션은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남자가 인터뷰 상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남자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카메라는 그것을 긴 시간 동안 응시한다. 남자의 그러한 이동은 임의적 연결을 수행한다. 남자의 이동 과정은 재현되지만, 도착하고 출발하는 순간은 생략된다. 도착과 출발의 순간은 서로 다른 지점들을 연결하는 연결점이 될 수 있을 텐데, 이 영화는 그 연결점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남자의 이동 과정은 각 인물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저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각 인물들 간의 연결선을 상상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상상적 행위로부터 네 사람이 임의적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지형학적 선들은 거리와 거리를 잇고, 현재와 과거를 임의적으로 잇는다. 남자의 이동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얼굴이다. 그가 운전하는 차의 선루프는 항상 열려 있다. 그것이 열린 이유는 룸미러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에 있는 듯하다. 이 영화는 그의 빛을 받은 얼굴로부터 그가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남자의 이동과 대화는 그가 마주하는 것들의 연결이다.

 

  ‘연결마주함의 형태는 각 인물과 대화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이 영화는 좀체 숏-역숏으로 대화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데, 때때로 어떤 특정한 순간에 숏-역숏 방식을 사용하여 이 남자가, 혹은 이 영화가 과거를 말하는 인물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드러낸다. 남자가 이름 없는 농부와 대화할 때는 숏-역숏을 사용하여 남자와 농부라는 개인들을 잇고자 하며, 은행가가 카이사르의 노예 밀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은행가가 보고 있는 화분과 그 너머의 풍경을 보여 주어 그것이 역숏으로 기능하게끔 한다. 은행가는 마치 딴청 피우고 회피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역숏 중에서도, 은행가가 학살을 정당화할 때 남자의 분노에 찬 듯한 표정이 가장 강렬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노로밖에 상상할 수 없게 한다. 스트라웁과 위예는 대화(혹은 담화) 장면만을 극단적으로 반복해서 보여 준 뒤 우리에게 분노라는 역동적 행위를 상상하게 한다.

 

  <역사 수업>은 입에서 물을 쏟아 내는 조각상을 보여 주면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물은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마치 카이사르 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 사회까지, 권력을 가진 자의 착취와 오만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으며,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의 태도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진실마저도 확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버전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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