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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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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2020 -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욕망>2020-05-18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2020 2020.5.19.화~6.10.수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와 떠나는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욕망>

구형준(부산영화평론가협회)

 

  발 하나도 더 못 넣게 미어터지도록 사람을 태운 자동차 하나가 비틀거리며 거리를 지나간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요란한 복장과 화장을 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딱히 목적지가 없는 듯, 혹은 배회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 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지른다. 장면이 바뀌면 공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노동자들이 문을 나선다. 앞선 젊은이들과 대조적으로 하나같이 표정이 어둡다. 노동자들은 대화하는 이 하나 없으며 묵묵하고 또 조금은 암울한 얼굴로 문을 차례로 나서기만 한다. 그리고 두 그룹이 교차하며 보이는 와중에 금발의 젊은 남자 한 명이 오픈카를 타고 도로를 가로지른다. <욕망>(1966)의 오프닝이다.

 

  교차로 보인 오프닝 속 두 그룹은 마치 다른 영화의 장면 조합처럼 대조적이고 이질적이다. 자동차를 탄 젊은 그룹은 복장부터 행동거지와 표정까지 모두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꿈 속 이미지거나 혹은 최대한 좋게 봐 줘도 마약에 잔뜩 취한 히피들처럼 보인다. 반대로 노동자들의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보는 사람이 쓸쓸할 지경이다. 피로에 절어 대화 한마디 없이 집으로 가기 바쁜 그들의 칙칙한 뒷모습은 마치 노동자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멜리에스와 뤼미에르의 기이한 동거처럼 보이는 이 오프닝은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상상과 영화가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안토니오니의 짧은 논평을 수행한다. 거리 위에 수놓아진 환상적 광대의 이미지와 칙칙하고 쓸쓸한 현실의 노동자 이미지 사이에서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하며, 또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에서 내린 젊은 청년들에게 돈을 쥐어 주며 나타난 주인공 토마스가 있다. 사진작가인 토마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사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는 모든 풍경과 사람을 피사체로 대하며, 오로지 사진만이 유일한 진실을 담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란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 진실이다.

 

  일상의 권태에 빠진 토마스는 우연찮게 들른 공원에서 살인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흥분한 토마스는 사진을 끊임없이 인화하며 사진 속에서 살인의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사진을 살피고 확대하면 할수록 사체의 형상은 모호해지고 희미해진다. 토마스의 사진은 진실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온전치 못하며, 사진을 확대할수록 이미지는 오히려 화가 친구의 추상화와 닮아 간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결국 토마스는 사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몸을 던져 밤거리와 공연장,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공원을 오가며 내막을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현실의 공간들도 사진과 마찬가지로 진실의 흔적과 진실의 일부만 가지고 있을 뿐 온전한 진실을 가지지 못한다. 이미지도 현실도, 모두 어떤 결여를 가진 채, 중심에 다가서려 할수록 혼란만을 드러낸다.

 

  토마스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가 뭔가를 보긴 한 것일까? 토마스 본인도, 관객도 이런 생각에 빠질 즈음 오프닝에 등장했던 자동차의 젊은이들이 다시 등장한다. 역시나 요란한 복장의 젊은이들은 갑작스레 내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공도, 라켓도 없이 맨손으로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들이 테니스를 친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카메라는 허공을 패닝하며 가상의 테니스공을 따라간다. 테니스공은 없지만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낸다.

 

  안토니오니는 추리 스릴러의 뼈대 위에 진실의 존재라는 인신론적 의제를 매끈하게 덧입힌다. 도입부에 토마스는 이미지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진실과 거짓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영화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무엇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 같다. 가상의 테니스공을 아무리 확대해도 거기엔 허공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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