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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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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덕션 : 미지의 공간, 빈자리, 아직 오지 않은 시간.2021-06-10
인트로덕션 스틸 이미지

 

 

<인트로덕션> : 미지의 공간, 빈자리, 아직 오지 않은 시간.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아무 것도 되지 않으려고 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그러니 이를 하나의 언어로 치환하는 일은 애초부터 실패를 담보한다. 나는 링반데룽에 걸린 사람처럼 헤맨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영화가 포획하는 사람, 사물, 그리고 세상의 낯설음과 아름다움에 감응하게 되는 한, 그에 대해 보는 것과 말하는 걸 멈추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화의 도처에 흩어놓은 편린들을 주워들고 의미화라는 늪에 빠져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그로부터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혹은 아주 사소한 데에 불과한 인상에 붙들려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마음은 거기에만 서성이며 움직이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그렇게 기꺼이 어리석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주원의 어머니(서영화)는 그걸 충동이라고 불렀고, 그의 지인인 화가(김민희)는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너무 멀리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남아있는 건 흥취뿐이어서 한 마디 한 마디 단정하게 맺지 못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와 호응이 맞지 않게 겨우 뱉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걸 삼키는 것보다는 참지 않고 말해보고 싶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휘발되지 않는 어떤 것들, 그리고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 그에 대해 대답까지는 못 되더라도 시도 내지는 추측의 흔적쯤은 내볼 수는 있었으면.

 

 

인트로덕션 스틸

 

  

   영화가 무엇에 대한 시작, 소개, 도입, 서문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인물들의 상황은 이렇다. 주인공 영호(신석호)의 아버지(김영호)는 전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고 전날 밤에는 오랫동안 왕래가 없던 아들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걸었다. 주인공의 여자 친구 주원(박미소)은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러 이억만 리 먼 땅으로 향했다. 그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두 사람의 관계도 이제까지와는 국면을 달리할 것이다. 주인공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배우를 꿈꾸다가 마음을 접었는데, 어머니(조윤희)는 그게 영 아쉬워서 유명한 배우(기주봉)에게 조언을 청하며 자식이 마음을 돌렸으면 싶다. 주인공은 그 뜻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싫은 내색 없이 어머니가 마련한 자리에 간다. 친구(하성국)와 동행하면서, 영호는 그에게 따로 할 말도 있다고 한다. 삶이란 매 순간 선택과 실행의 연속인 걸 안다. 언제나 크든 작든 무슨 일인가를 앞두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랄 일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각각의 우주에 그 결정들이 적용될 때, 가깝거나 멀거나 우리에게 아직 오지 않은 시간, 그 결괏값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변수들일 수는 있을 것이다.

 

 

도망친 여자 스틸

 

도망친 여자 (2020) 스틸 이미지

 

 

   이 영화의 서사를 주인공이 누군가들을 만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언뜻 <도망친 여자>(2020)와 접점이 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지인들을 찾아가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들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는 것이 <도망친 여자>의 주요서사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진 <인트로덕션> 또한, 그처럼 간결하게 압축해서 정리할 수 있다. 감희(김민희)가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서 보던 바다는,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이제 인물들의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기도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엄밀하게는 <인트로덕션>의 만남이란 <도망친 여자>와는 좀 다르다. 먼저, 영호는 감희처럼 자기 의지에 따르기보다 그 주체가 부모님이든 충동에 따른 것이든 불려 다니는 쪽에 더 가깝다. 만남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감희는 화자이거나 청자이거나 언제나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영호는 미루어지는 만남을 기다려야 하거나, 늘어놓는 설교를 묵묵히 들으면서 곤혹을 치르는 아랫사람이다. 나이든 배우는 두 젊은이들에게 술을 많이 먹이면서도 취하지 말라고 하고, 어머니도 못마땅한 기색을 아들의 친구에게 숨기지 않아서 눈치를 보게 만든다. 기다리다 잠이 들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환자들에게 침을 놓고 방으로 올라가 책상 위에 엎드리지, 아들을 만나러 오지는 않았다. 결국 환자들마저도 침을 꽂은 채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부자(父子)의 만남이 이루어졌는지는 결국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그 용건 또한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게 어디 그것뿐이기만 할까. 아버지가 무얼 빌었는지, 또 둔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 어떤 근심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냥 피곤한 것뿐이었는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대신 영호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병원에서 일해 온 간호사(예지원)와 반갑게 만난다. 나 사랑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 지금도 사랑해? 그 정도만으로도 간호사는 영호가 사랑을 고백한 최초의 타인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또 그가 영호를 얼마나 귀여워했는지도 알 것 같다. 지금도 사랑하죠.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 이제 두 사람이 이야기하던 남자아이는 그 시절보다 능청이 늘었고 담배도 피우고 간호사가 한 팔에 푹 안길 만큼 훌쩍, 아니, 다 자랐다. 마음을 간질이는 은은한 온기가 흐르는 장면. 그건 홍상수의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 적 없는 사건과도 같은 순간이다. 영호의 착한 품성과 그를 다정한 청년으로 자라게 하는 데 몇 할쯤은 기여했을 간호사의 곰살가움, 그리고 추억으로 기억되는 그들의 지난 시간들은 영화가 애쓰지 않는데도 저절로 나타난다. 갑자기 눈이 오고 그러냐, 멀쩡하더니. 문득 눈에 들어온 날씨에 즉각적으로 새어나오는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간호사의 한 마디. 그건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영호가 친구의 팔 안에서 춥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발언이다. 그러니 눈이 내리거나 고양이가 나타나는 것처럼 영화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현실의 우연한 순간하고도 구분된다.

  

인트로덕션 스틸 이미지

 

 

   <인트로덕션>에 담긴 저해상도의 세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마다의 이미지들이 가진 경계들을 흐리게 만들고 어떤 이미지는 우글우글하게 보이며 빛이 있는 밝은 공간은 하얗게 지워진다. 어머니와 동행한 나이든 배우가 몸을 흔들며 화를 낼 때 이따금씩 그의 모습은 포커스가 나가는 것처럼 흐려지고는 한다. 이 영화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눈치 채지 않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중에서 프레임에 안착되지 못하고 하얗게 날아가 버린 배경에 대해 말하고 싶다. 간호사와 영호가 함께 서 있던 그들의 뒤에 하늘과 함께 있어야 할 건물들의 일부가 사라져 있다. 주원의 어머니와 화가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아파트의 창밖, 풍경이 있을 법한 자리도 백지처럼 아무 것도 없다. 영호의 어머니와 유명 배우가 마주 앉은 횟집, 그들의 곁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도 마찬가지다. 응당 거기에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하얗게 빛만이 차있는 미지의 공간들은 영화 또는 인물들의 시작, 도입, 서문, 소개가 형상화된 것처럼 보인다. 현재에는 불확실하지만 곧이어 거기에 기입될 것들을 위한 빈자리 말이다. 오지 않은 시간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불안하고 두렵고 고독한 실존들이 담겨있는 저해상도의 세상.

 

 

인트로덕션 스틸

 

 

   영호의 꿈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주원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인트로덕션>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거나 알려주지 않아서 안 보이는 것들, 보이더라도 선명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 유난히 뚜렷한 이미지가 하나 있다. 희뿌연 파도의 포말 사이에서 홀로 검고 짙은 영호의 실루엣이 그렇다. 한겨울 세찬 파도에 뛰어들 듯 세상으로, 사람살이의 천태만상으로, 감정의 격랑으로 온몸을 던져 용감하게 자기 앞의 생을 살겠다는 결심처럼 보이는 단호한 이미지 말이다. 삶에서 가장 확실한 건, 그렇게 직접 대면해 살아내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되어서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한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영호는 그처럼 지치고 피로하지도 가엾지도 않다. 홍상수의 사람들 식으로 말하면 잘됐다’. 한겨울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에게 가장 유용한 일은 얼른 닦고 옷을 입는 것일 텐데, 그 전에 친구는 웅크린 어깨나 겨우 감싸줄 수 있을 뿐인 두 팔로 그를 먼저 안아준다. 타인에게 전해오는 온기가 어떤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트로덕션>은 더없이 따뜻한 홍상수의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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