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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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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 2020 - 젊은 윌리엄 와일러 : <편지>2021-01-06
Review 시네마테크 기획전 오래된 극장 2020 2020.12.29.(화)~2021.1.21.(목)

 

 

<편지>: 윌리엄 와일러를 통한 고전주의적 통찰

 

 

장지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어느 미국인의 집에서 총성이 울린다. 한 남자가 비틀대며 현관문을 나서고 뒤따르는 여인은 망설임 없이 총을 쏜다. 총을 쏜 여인은 레슬리(베티 데이비스)로 사업가인 로버트 크로스비의 아내이다. 살해된 남자는 하몬드다. 영화 <편지 The Letter>는 시작부터 살인사건을 드러내며 사건 이면의 이야기로 파고드는 작품이다.

 

   <편지>는 거칠게 축약하자면 레슬리의 살해 동기를 밝히는 여정이다. 그녀는 살인 직후 진술에서 집을 찾아온 하몬드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시도를 한 방어기재로 총을 쐈다는 말하지만 이후 그녀의 진술은 몇 차례 번복된다. 그러다 결정적인 증거로 등장한 편지를 통해 레슬리와 하몬드가 내연관계임이 밝혀지고 레슬리는 거금을 들여 편지를 은닉한다. 베티 데이비스는 영화 전면에 나서 다층적인 심리를 표현하고 사건 진행의 변곡점마다 극의 긴장을 훌륭하게 조율한다. 별다른 스펙터클한 행동 없이도 이 영화가 누아르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그녀의 연기 덕분이다. 베티 데이비스가 이 영화에서 선보인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꼽으라면 변호사인 하워드가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진실을 덮도록 설득하는 장면일 것이다. 혼절했다 깨어난 레슬리는 병실에 누워 하워드와 대화를 나눈다. 하워드가 카메라의 정면에서 그녀의 침상을 내려다보고 있고 레슬리의 머리만 나오는 프레임에서 우리는 그녀의 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편지의 행방을 물을 때 그녀의 손은 병실 벽면을 타고 오른다. 누가 편지를 가지고 있는지, 돈을 주고 그 편지를 살 수 있는지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는 동안 계속되는 베티 데이비스의 손동작은 숨겨보려 하지만 끝내 숨겨지지 않는 레슬리의 노골적인 욕망을 형상화한다.

 

   윌리엄 와일러가 베티 데이비스라는 페르소나를 내세워 주제로 다가가는 내러티브의 여정을 선사했다면, 그의 카메라는 자신이 설계한 공간을 어루만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윌리엄 와일러의 공간과 그의 영화적 세계를 탐미하게 한다. 공간에 대한 그의 섬세한 시선은 영화 시작부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고무나무의 진액이 뚝뚝 떨어지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구조물 안에서 싱가포르 원주민들은 잠을 청하는 중이다. 동남아의 이국적인 배경을 지나 레슬리가 사는 집을 비추면 이내 총소리가 들린다. 카메라는 이 과정을 수평 이동하며 한 쇼트에 담아낸다. 오프닝에 묘사된 레슬리의 집과 주변 배경은 그저 심미적인 장치로서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시작해 마주하는 첫 쇼트에서 관객은 (시간을 포함한) 공간과 사건을 마주한다. 윌리엄 와일러의 공간을 감상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가 만들어놓은 공간의 시작과 끝을 그가 이끄는 순서대로 따라가 보는 것이다. 레슬리의 집으로 남편인 로버트와 변호사 하워드 등이 모여 하몬드의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이들을 안내하던 원주민 집사는 갑자기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원주민 집사가 도망치는 동선은 오프닝에서 집 밖에서 시작해 현관까지 다가선 카메라의 동선과 반대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오프닝에서 시작했을 법한 집 외부 어디 즈음으로 집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의 시퀀스가 막을 내린다. 마치 소설의 한 단락이 마무리 되듯이. <편지>는 원작인 서머싯 몸의 단편 소설과 견주어 보더라도 영화가 그려낼 수 있는 고유한 효과를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의 쇼트로 구현한 이 영화의 오프닝은 마치 한 문단의 서사를 하나의 쇼트로 축약한 듯 보인다. 앞서 언급한 베티 데이비스의 손동작이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나 얄팍한 거래 제안이 오가는 주차장에서 옹치생의 얄팍함과 신분 차이를 주차된 차를 통해 재치 있게 그려내는 유머 등 여러 장면에서 윌리엄 와일러는 원작과 구분된, 영화적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미지를 고집한다. 그는 <편지>를 비롯해 같은 시기에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1939)과 릴리언 헬먼의 희곡 <작은 여우들>(1941) 등 소설이나 희곡 원작의 작품을 꾸준히 영화화했다. 당시는 영화의 물리적 시간을 표준화하고 그 방법으로서 내러티브를 적극 활용하던 할리우드 시스템이 완성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윌리엄 와일러는 이러한 할리우드 시스템 속에서 영화적 방식을 표현하고자 했던 작가적 고민을 투영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대응한 셈이다.

 

   <편지>가 개봉한 즈음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무렵이기도 했다. <폭풍의 언덕><편지>, <작은 여우들>까지 원작을 각색한 영화를 만들어 온 그는 독일군 비행기 조종사가 영국 가정으로 숨어드는 이야기를 그린 <미니버 부인>(1942)을 완성하고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자 스스로 입대를 결심했다. 그래서일까 전운의 영향 아래 윌리엄 와일러가 내놓은 당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비련과 비정과 비극의 정서를 이어간다. <편지>의 레슬리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레슬리는 재판에서 무죄를 받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는 로버트의 제안은 거절하는데, "내가 죽인 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그녀의 일성은 영화 <편지>가 가고자 하는 향방을 가늠하게 한다. 윌리엄 와일러는 살인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가 보다 무엇 때문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죄를 은닉하고자 하는 인물이 법정에서 죄를 받는 대신 스스로 파멸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에 주목한다. 다른 나라로 떠나자는 로버트의 제안을 받고 연회를 여는 날, 창문을 연 레슬리는 언젠가 편지를 구하기 위해 찾아간 상점에서 본 나이프를 바닥에서 발견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창문을 열었을 때 나이프는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직감한 표정으로 레슬리는 정원을 지나 대문으로 향한다. 그녀가 최후를 맞이하는 곳은 대문 앞이며 그곳은 다른 집이긴 하지만 이 영화가 출발한 지점이기도 하다.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페르소나의 최후를 그려냄으로써 누아르적 외피 안에서 속죄에 대한 단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특유의 섬세함과 집요함으로 설계된 그의 공간은 죄와 시작이자 속죄의 맺음이 되는 완전한 세계로 귀결된다.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이러한 통찰은 그를 고전주의 할리우드의 정점에서 선 감독 중 하나로 소환하게 한다.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도 고전주의를 형용하는 우아함의 실체에 대해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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