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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의 하루> : 경성과 서울, 일일과 하루 사이2021-12-20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소설가 구보의 하루> : 경성과 서울, 일일과 하루 사이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이 오랜만이어서

   자꾸만 연필을 고쳐 쥐게 된다.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다. 노트북이 망가졌고 마감일은 목전까지 와서 다급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생각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휘갈겨 쓴 종이뭉치를 그대로 원고라고 내밀만한 용기가 나에겐 없을 것이다. 아마도 퇴고를 끝내면 파일로 만들어서 보내게 되겠지. 그전에 이 어색함과 불편을 못 견디고 어떻게든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키보드를 두드릴 궁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빈 종이를 가능한 한 차곡차곡 채워나가 볼 생각이다. 또 한 번 연필을 고쳐 쥐어본다. 니체는 친구에게 자신의 저술, 다시 말해 사고(思考), 타자기를 사용하기 전후로 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글도 키보드로 써왔던 내 지난 글들하고 다를까? 어떻게 다를까? 우선 하나는 알겠다. 비유가 너무 거창하다는 것이다...

산책자, 배회자, 방랑자들

   종종 우리는 머무르지 않거나 머무를 수 없는 행위, 혹은 그 행위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런 이유로 여행문학이라든가 로드무비 같은 장르가 분화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를테면 이만희도 온전히 섞이지 않고 부유하는 자들에게 매혹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특히 1960년대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 속에서 도시를 누빈 인물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제각각 고독하고 우울한 산책자들이었다. <검은 머리>(1964), <귀로>(1967), <휴일>(1968)은 시대의 그늘과 겹쳐져 짙고 깊은 정취를 자아냈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소설가 구보의 하루>라는 영화의 제목을 대하면 즉각 유사한 제목을 가진 소설이 떠오른다. 그렇다. 영화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원작으로 했다. 1930년대의 구보와 2021년의 구보는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우선 그들은 벌이가 신통치 않은 소설가이고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았다. 좀 고독하고 번민도 있고 자기 자신을 비롯해 현상과 세태에 관하여 그 비율은 달리할지언정 일정 부분 회의적이고 권태롭고 무기력하다. 그리고 경성의 구보와 서울의 구보는 모두 도시산책자들이다.

다만 경성의 구보는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매일매일 어딜 그렇게 가는 건가 싶도록 쏘다니지만, 서울의 구보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내리 글만 써오다가 오래간만에 외출을 나선 모양이다. 영화의 영문 제목이 시지프스의 휴일(Sisyphus's vacation)’인 데서나, 그걸 놓쳤더라도 주인댁이 그에게 가볍게 건네는 한 두 마디를 들어보면 알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성의 구보와 서울의 구보를 확실히 구분 짓게 하는 지점은, 경성의 구보는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텔리이자 모던보이라는 것이다. 가루삐스는 입맛에 맞지 않고, 끽다점에서 커피나 홍차를 즐기며, 상대방의 메뉴에서 성격, 교양, 취미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스키파의 아이 아이 아이를 사랑하고, 조예가 깊지는 않아도 골동품에 관심을 가진, 경성의 구보는 한 마디로 고급 취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조선에서 가장 근대화된 장소인 경성에서 구보는 역, 백화점, 호텔처럼 당대 최신의 명소들을 스쳐 가며 끊임없이 생각에 잠기고 눈에 띄는 군중들을 관찰하고 여러 가지를 평하고 그 와중에 지인들과 마주치거나 만난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서울의 구보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는 익명의 군중들, 내지는 고현학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 속에서 그 행태라는 것이 아예 드러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충동적으로 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막상 연락이 닿으니 주춤거린다. 전 애인은 기혼자가 되었는데도 스스럼없이 보고 싶다며 구보를 만나러오고 영향력 있는 출판업자와 관계자들을 소개해주려고 그를 불러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오래전 잠시 옆방에 살았던 남자와 뜻밖의 조우도 있다. 구보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결국 청첩장을 내밀고 사라진다. 구차하고 뻔뻔하고 속된 삶이여.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하지만 구보는 말수가 적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성격도 아니다. 영화는 대체로 고요한 인물을 좇아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인물과 영화 모두 그의 마음, 견해, 상태에 대한 묘사에 관해서는 인색한 편이다. 다시 말해 전 애인은 무슨 생각으로 구보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지, 선배는 정말로 구보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이제는 남들이 좋아하는 글을 써보라는 조언이나 대필 작가를 권하는 것이 정말로 염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건지 잘 모르겠다. 그것들이 명료해져도 크게 달라질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서울의 구보는 이런 사람이다. 첨단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는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길 고집하고 있다. 순수문학이 외면 받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구보는 그 길이야말로 자기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6월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95%가 스마트폰 사용자인데 그는 나머지 5%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사진도 줄곧 필름카메라로 찍어왔다. 오늘 출판의 기대를 안고 완성한 원고를 선배에게 보이러 가는 길에 카메라를 처분한 참이다. 그렇지만 그의 전 애인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가진 신념과 가치와 취향들이 나에겐 그다지 구닥다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디지털 시대지만 우리가 아날로그와 단절하고 그것을 폐기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아날로그 감성이 유행하고 있는 시점이므로 내 이해의 폭이 특별히 넓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근대화의 물결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문명 앞에서, 그대로인 것도 있어야 한다는 구보의 설명만은 어딘지 부족하고 덜 매력적으로 들리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팔뚝시계란 소녀의 취향이라며 우아한 회중시계를 갖고 싶다 말하는 경성의 구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에 비친 서울이라는 도시 또한, 구보의 설명에 부합 하는 장소로 충실히 기능한다. 복잡하고 세련된 도시, 인파로 가득한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에 대한 활기, 모든 분야를 선도하는 중심지로서 갖는 서울의 모습이 이 영화 안에서는 부재한다. 대신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차가운 계절의 냄새, 고즈넉한 유적지인 서울, 얼마든지 쉬어가도 좋은 빈 의자들,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 그에 어울리는 한적함, 다른 말로 서정이라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길거리 공연의 낭만, 소박한 술집들과 식당들, 라이브 클럽이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다시, 삶 속으로

   이상한 일이다, 삶이란. 경성의 구보는 구인광고를 읽어달라고 청한 여인과 어린 여급들을 보다가 문득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제 그만 집필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울의 구보에게도 오늘은 긴 하루였을 것이다. 그의 각성은 단순하다.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고 어떤 구절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구보는 정신이 반짝 들고 위로받는다. 역시 서울의 구보 쪽이 덜 흥미롭다. 하지만 그렇게 규정한 채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침잠하거나 목표를 버리는 일 없이 용기를 내어 새 작품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슴 깊이 솟아나 삶의 태도와 방향을 재설정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순간이다. 이런 장면을 목격하면 영화 바깥의 내가 매여 있는 현재와 상념들로부터 탈출한 듯한 착각 내지는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어보게 된다. 영화관 밖으로 나가면 햇빛과 함께 증발되는 덧없는 일일지라도. 그게 나쁜가? 어지러운 글은 비속하게 맺는 게 좋겠다. 이상한 일이다, 가끔, 영화를 본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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