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비평  > 시네 크리틱

시네 크리틱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평론글은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글을 통해 들여다본 새로운 영화세상으로 떠나보세요!

<좋은 사람> : 마주치지 않았던 두 사람2021-09-17
좋은 사람 스틸이미지

 

 

<좋은 사람> : 마주치지 않았던 두 사람

 

한창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영화 <좋은 사람>(2021)이 하려는 말은 분명해 보인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던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지,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타인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욕망을 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은 때로 우리의 이기적 욕망 및 욕구와 충돌하거나 그것들 자체에 기반하고, 우리는 그러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허우적댄다. 정욱 감독의 <좋은 사람>은 그 허우적거림을 포착하는 작품이다.

그러한 허우적거림 와중에 나의 시선을 유별나게 건드리는 순간이 있었다. 이 영화는 CCTV 화면으로부터 시작한다. CCTV는 현대 사회의 삶에 중요한 일부분으로서, ‘감시 사회’, ‘파놉티콘이란 말을 지겹게 소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우리는 CCTV를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휴대전화 카메라와 블랙박스 카메라로 특정한 상황을 대변하려고 한다. 그 영상들은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도록 돕는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것은 문자도 아니고, 음성도 아니고, 음성과 함께 기록된 영상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 세계를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우리가 그렇게 믿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기록이 진실까지 보증할 수 있을까?

 

좋은 사람 스틸

 

 

고등학교 교사인 경석(김태훈)CCTV에서 본 것은 자기 반 학생 세익(이효제)이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있지 않고 교실 밖을 어슬렁대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 장면 뒤로 경석의 반에서 도난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익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경석의 모습을 보게 된다. 경석이 세익을 처음부터 의심해왔을지 모른다는 것을 감지하도록 이 영화가 우리를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석에게나, 우리에게나, 세익을 범인으로 단정 지을 근거는 없(). CCTV가 제공하는 정보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한정적이다. 하지만 한정적이기 때문에 경석이나 우리나 세익에 대한 의심을 거두기도 힘들다. 확정하지도, 철회하지도 못하는 곳에 가로막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한정된 정보와 거듭 마주한다. 먼저 경석의 딸 윤희(박채은)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체 윤희는 왜 그렇게 자신의 아빠를 싫어하는가? 경석이 윤희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듯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아이를 대하려고 하는데, 윤희는 왜 그런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는가? 윤희는 대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아빠와 함께 있기 싫다며 떼쓰는가? 나의 이런 질문에 누군가는 그것도 모르나하는 물음이 들 법도 하다. 물론 당연히 우리는 유추할 수 있고, 유추하게 된다. 전처 지현(김현정)이 경석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 말에서, 우리는 그에게 음주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경석이 전처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고 계속 대답을 주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와 엄마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윤희가 엄마에게 더 마음을 주게 되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유추, , 미루어 짐작하는 것일 뿐 확정적 증거에 기반한 추론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취하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그 흐름은 때로 현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소음으로 자리한다.

 

 

좋은 사람 스틸이미지

 

 

우리는 한정된 정보가 주어질 때 판단을 유예하기보다 ‘~일지도 몰라’, ‘~일 것이야하는 유추로 나아가기 쉬운 상태에 놓인다. 의미가 불완전한 곳에 어떻게든 의미를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석이 세익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탐지된다. 세익이 CCTV에 찍힌 것은 비단 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 세익이 윤희를 만나 아이를 어디론가로 데려갈 때도 CCTV 카메라가 세익을 붙잡는다. 하지만 카메라의 영상은 너무도 파편적인 정보만을 전한다. 공교롭게도 윤희가 사고를 당한 현장에는 CCTV가 없다. 그곳에 CCTV가 없다는 설정은 그 현실적 장소에서 비롯하기보다 감독에 의해 구성되었을 테다. 다시 말해, 정욱 감독은 이렇게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한정된 정보가 제공하는 불안을 인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확증을 찾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 CCTV 영상이 파편적 정보의 주요 출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파편적 정보는 인물과 인물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성급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정보를 적나라하게 전한다는 영상의 아이러니한 측면, 영화 <좋은 사람>은 바로 그 측면을 건드리며 서사를 진행한다.

정보는 영화 외부적으로는 감독의 결정에 따라, 영화 내부적으로는 인물의 결정에 따라 노출된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 지연 전략과 무의식적 회피, 망각 때문에 온전한 모습을 상실한다. 경석은 전처 지현에게 제대로 된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파편적으로 말을 전한다. 그러한 파편이 제 의지에 반해 탄로날 때(전처가 블랙박스 영상을 발견했을 때), 어쩔 수 없이 파국적 사태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세익은 왜 사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중에서야 트럭 운전수 노인이 뺑소니하려 했다는 것을 고백했을까? 물론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익이 경황없는 와중에 떠올리지 못한 일을 시간이 지난 뒤 상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추도 세익의 말을 사실로 가정했을 때 그럴듯해진다. 우리는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는 트럭 운전사 노인의 얼굴을 보면서, 세익의 말이 사실인지 확정하기 힘들어진다.

정보는 감정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을 지닌다. 세익이 윤희를 밀었다는 트럭 운전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차라리 어떠한 착각이 그러한 인식을 불러왔을 여지가 크다. 거짓 진술과 착각에 의한 진술은 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의식적인 의도가 개입했는지에 따라 서로 완전히 달라진다. 정욱 감독은 트럭 운전사가 진술할 때 플래시백을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는 건널목 옆에 놓인 검은 물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 것은 거짓 진술의 재현인가, 아니면 오인된 판단의 재현인가. 그건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트럭 운전사의 말이 어떤 이유로든 현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트럭 운전사가 한 말의 진의를 가리고 있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파편적 정보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든 그것을 해석하고 확증하려 한다는 점이다. 거기서 우리의 의식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럴 법한 것’, ‘으레 그럴 만한 것을 향해 기울어진다. 따라서 나는 뺑소니를 폭로한 세익의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왜 그걸 모르는가?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영화가 정말 그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가? 플래시백으로 영상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다 믿을만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트럭 운전사의 경우처럼 영상 또한 의식의 왜곡 그 자체를 재현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좋은 사람 스틸 이미지

 

 

윤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들려주지 못한다. 바로 거기에 영화 <좋은 사람>과 우리의 관계가 놓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인가? 맞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현상의 파편들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고 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이제 우리는 사실 확정이나 해석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작동에 관해 말해야 한다. 세익이 묻는다. 경석이 분명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어준다고 했기에 애써 말을 했는데 왜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가.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이 질문의 자리에 윤리가 놓인다. 사실을 확정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그 사실과 관련된 대상과의 윤리적 관계, 윤리적 거리감을 설정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에 대한 담론의 자리도 바로 그곳인 것 같다. 그 장소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말하기 힘들 것이다.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은 너무나도 적나라하기에 우리에게 확정적 진술로서 다가오지만, 결국 파편적 정보에 불과하기에 그 공백을 메우려고 저항하는 해석 지향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그것이 메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니 윤리는 그 메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자리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좋은 사람>의 후반부 장면에서 세익과 경석이 걸어간다. 세익은 학교를 향해, 경석은 학교 바깥을 향하는 듯하다. 서로 교차하는 두 사람은 곧 마주칠 것만 같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익힌 영화 문법이 그런 마주침을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감독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한 파편적 정보로부터 두 사람의 마주침을 믿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는다. 그것이 영화를 보는, 영화 속 대상을 염려하는 우리의 윤리일 것이고, 그것이 좋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음글 <종착역> : 인물이 된 카메라
이전글 <영화의 거리> : 김민근의 이행과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