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와 인문학

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우연과 상상> - ‘구키 슈조’ 주제에 의한 ‘데리다’적 변주2022-06-30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5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우연과 상상> : ‘구키 슈조’ 주제에 의한 ‘데리다’적 변주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2021)은 우연에 관련된 세 가지 상상을 그렸다. 영화에서 ‘우연’은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나타난다. 다만 그 만남이란 것이 「예기치 못한 만남」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A와 만남. 또는 X를 만날 걸로 예상했는데 Y를 만남. 이처럼 영화는 「예기치 못한 만남」을 대하는 세 가지 모습을 그렸다. 

  이때 영화가 말하는 ‘상상’은 이 우연한 만남에서 일어나는 「재회에 관한 생각」을 통해 전개된다. 그 만남을 재회로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재회를 없던 것으로 만드는 모습 (1화),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모습 (2화), 그리고 재회를 배우처럼 연기하는 모습 (3화). 


  이렇듯 <우연과 상상>은 「조우 (첫 만남)와 재회」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한 웹진 인터뷰에서 철학자 ‘구키 슈조’ (九鬼周造 1888~1941)의 저서 『우연성의 문제』 (1935)를 읽고, 영화의 모티브인 ‘우연’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감독은 사람들이 이 우연에 맞닥뜨렸을 때 일어나는 ‘상상’을 덧붙였다고 밝혔다 (<조시 스파> 2021/12/17).   

  필자는 이 내용을 자크 데리다의 「우편」이라는 은유를 통해 생각해보려 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데리다의 우편은 「오배」, 곧 ‘잘못된 배송’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 ‘구키 슈조 주제에 의한 데리다적 변주’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다.  


  (※ 하지만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은 영화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 이 영화를 데리다의 관점으로 본 평론은 없고, 감독 또한 자신과 데리다의 연관성을 말한 적이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필자의 관점이고, 필자가 이 영화를 해석하는 관점이다. 

  다만 필자는 이처럼 구키 슈조의 우연이라는 주제와 데리다의 오배 개념을 함께 놓고 보면, 영화가 좀 더 분명하게, 또 흥미롭게 이해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구키 슈조를 넘어 데리다 철학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사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출처: 네이버 뉴스)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서사 구조와 인물 설정을 짚어보자. 앞서 <우연과 상상>은 ‘조우 / 재회’의 영화라고 했다. 이때 우연한 만남은 ‘어이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상상은 인물의 ‘인식과 결단’을 포함한다. 여기서 안톤 체호프의 연극을 떠올릴 수 있다. 

  앞선 영화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체호프 연극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지만, 감독과 체호프의 연관성은 좀 더 심층적인 듯하다. 일본 극작가,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 (平田オリザ)는 감독을 ‘현대의 체호프’로 평가했다. 이 평가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체호프의 연극


  체호프 연극은 「일상 속 개인의 진실 (진심)」을 그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일상적인 성격이고, 극 전개에 전환점을 제공하는 ‘사건’도 이 일상적인 인물들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체호프 작품이 21세기 현재에도 공감을 자아내고, 관객들에게 ‘이것은 나의 이야기’라는 공감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연과 상상> 또한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을 그린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개성을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결함’으로 여기고, 자신의 개성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바꾸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강하게 살아가는 약자들」인 것이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세가와 교수: 존재만으로도 미움을 살 때도 있죠.

  다만 그렇다 해도 전 자신을 바꿀 수 없어요.


  체호프 연극의 사건이 ‘자기 고백’을 통해 삶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때, 주목할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 특정한 ‘집 (방)’이라는 점. 또 하나는 그 사건의 전개에 ‘언어’가 ‘행위’보다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연과 상상>에는 사무실 (1화), 연구실 (2화), 집 (3화)에서 중요한 사건 (=자기 고백)이 일어난다. 3화 ‘아야’ 집 장면에서 거실 유리문 양쪽으로 커튼이 달린 모습은 그야말로 연극 무대 같고, 그 너머로 보이는 마당은 무대 배경처럼 보인다. 이 유리문 앞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선다.

  

  또 영화가 대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가 감정을 누르고 ‘폭발’을 잠재한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체호프 연극과 닮았다 (<아사코>에는 체호프 연극 공연의 배우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이런 감정 절제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묘사하는 ‘이탈리아식 낭독 방법’, 말하자면 대사에 감정을 넣지 않고 낭독하는 연습을 반복하고, 그 뒤에 배우 자신의 내면이 배어나게 하는 연기론에도 조응할 것이다). 


  그리고 체호프 연극에는 「우울한 희극」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것이 우울한 까닭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이 희극인 까닭은 극중 인물이 삶의 인식과 결단을 통해 새 출발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하마구치 영화에도 비슷한 성격이 엿보인다.

  일반적으로 체호프 연극은 4막 구조로 이뤄진다. 1막은 인물 소개, 특정한 ‘공간=집’으로 도착, 2막은 인물간의 관계 맺기, 고백, 3막은 삶의 인식과 결단, 4막은 떠남, 또는 새 출발로 구성된다. 이 관점에서 <우연과 상상>의 우연 (=조우) 부분은 1막과 2막, 또 상상 부분은 3막과 4막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하마구치 감독 자신이 밝힌 것처럼 감독의 영화에는 에리크 로메르로부터 영감을 받은 요소가 있다. <우연과 상상> 또한 로메르 영화에 자주 나타나는 우연성 요소를 핵심 모티브로 삼았다. 특히 <파리의 랑데부> (1995)는 하마구치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 <우연과 상상>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영화 <파리의 랑데부> 포스터 이미지

에리크 로메르 감독의 영화 <파리의 랑데부> (출처: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


  실제 영화 구성이 세 개의 독립적인 단편이고, 우연성이 중심 모티브가 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측면 (구성, 모티브)보다 인물 성격에 주목한다. 그것은 <파리의 랑데부>에서 인물 성격이 「내재계 / 초월계」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이때 내재계는 ‘사회 (시스템)에 닫힌’ 인물로, 또 초월계는 ‘사회의 외부로 열린’ 인물로 정의해보자. 내재계는 사회에서(즉, 사회 시스템이 갖춰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초월계는 그렇지 않다. 언제나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꾼다. <파리의 랑데부> 2화가 대표적이다. 남자는 내재계, 여자는 초월계다. 여자는 늘 ‘다른 곳’을 바라본다. 


  <우연과 상상>에는 이 대비가 훨씬 더 깊고, 정교하게, 또 다채롭게 나타난다. 초월계 인물은 “객관적으로 보면 아주 행복한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지닌 인물이다. 1화에서 내재계는 츠쿠미와 카즈아키이고, 초월계는 메이코다. 2화에서 내재계는 사사키이고, 초월계는 나오와 세가와 교수다. 그리고 3화에서 두 인물은 내재계에 닫혀 있었지만 (상상을 통해, 대화를 통해) 초월계로 함께 열린다. 


• ‘내재계 / 초월계’의 언어


  두 계열은 언어 사용도 대조적이다. 1화는 두 계열의 의사소통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을 그린다. 초월계 메이코는 ‘사랑하는 사람’과 소통하지 못한다. “난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만 줘.” 그런 반면 (메이코와 소통하지 못하는) 카즈아키는 츠쿠미와 의사소통이 잘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메이코는 말한다. “둘이 잘 어울린다.… 닮았어.”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2화 세가와 교수는 나오를 가리켜 「언어화할 수 없는* 미결정 영역에 머무른다」고 했다 (*자막은 ‘형언할 수 없는’으로 옮겼지만 실제 대사는 ‘언어화할 수 없는’이다. 감독은 분명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했다). 이 미결정 영역은 「‘사회 =시스템 =언어’의 외부」라고 볼 수 있다. 1화 메이코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라고 부른 것에 조응한다.


  3화의 두 인물은 언어를 통해, 언어를 초월한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외부’로 열린다. 시스템의 외부는 시스템 (언어, 질서, 규칙…)의 필터를 제거한 세계다. 필연 (=결정)이 아닌 우연 (=미결정)의 영역이다. 이 「시스템의 외부에 대한 사고」가 「상상」과 닿아 있다. 

  영화는 이처럼 우연의 문제를 ‘우연한 만남’으로 구체화하고, 이 만남을 ‘시스템의 외부에 대한 사고’, 즉 상상과 연결한다. 이런 발상은 구키 슈조의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 구키와 하마구치


  몇몇 철학자들이 우연 개념을 꺼내 드는 것은 필연에 맞서기 위해서다. 이때 필연은 세상을 옭아매는 ‘틀’이나 ‘족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필연은 “반드시 그러한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실이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지고,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어떤 철학자들은 필연에서 벗어나는 「변화 가능성」의 계기로 우연을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가 구키 슈조다.


  우연이 과연 필연에 맞서 버티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구키의 저서는 이 물음에 답을 찾는 논저다. 책이 제안하는 실천적 결론은 이것이다. “우연성 중에 극미한 가능성을 파악하고, 미래적인 가능성을 육성하는 것” (『우연성의 문제』, 결론, 2). 요컨대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우연이 필연이 된다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우연은 필연의 세계에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볼 수 있다. 구키는 이 결론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지난한 논증을 펼친다. 다만 이 논증에서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우연의 현실화 (=필연화)에 필요한 동력이다. 모든 우연이 다 필연이 되진 않는다. 우연이 그야말로 우연으로 스쳐 지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에서만 우연성이 의식되고, 우리를 각성시킨다. 이때 우연은 우리의 소명이 되고, 운명이 된다, 필연이 되는 것이다. 


  구키는 이 과정을 「우연성의 내면화」로 생각했다. 우연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구키는 이 내면화의 동력으로 「결의, 결단」을 이야기한다. 분명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인생에 느닷없이 나타난 우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우연성이 이끄는 쪽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실존주의적 뉘앙스가 있다.  

  그럼, 하마구치 감독은 어떨까. 앞서 <우연과 상상>에서 ‘상상’은 우연한 만남에서 일어나는 ‘재회에 관한 생각’이라고 했다. 하마구치의 상상은 구키의 결단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체호프 연극이 담은 「삶의 인식과 결단」, 「떠남, 또는 새 출발」과 호응한다. 이 관점에서 하마구치, 구키, 체호프는 서로 일치하게 대응하는 점이 있는 듯하다. 


• 상상과 결단


  그럼에도 상상과 결단의 뉘앙스는 다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마구치의 상상이 더 능동적이다. 물론 상상의 현실화에는 능동과 수동의 양면성이 있다. 하마구치에 따르면 상상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에 대한 상상이고, 이것을 현실로 만들려면 스스로 그 대상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 (능동성). 한편 그 뛰어 들어갈 대상은 우연에 의해 주어진다 (수동성).  

  이런 상황을 「울고 싶자 때린다」는 속담에 비유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하고 싶으나 마땅한 구실이 없어 못하다가 때마침 좋은 핑계가 생기는 상황 말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루틴으로 구성된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는, 사실은 이쪽의 인생에 열려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우연에 잘 올라탈 수 있느냐, 자신을 던질 수 있느냐는 것” (TOKION, 2021/12/17).  


  이처럼 <우연과 상상>에서 조우와 재회의 관계는 ‘사실은 이쪽의 인생에 열려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욕망 (=상상)의 능동성과 그 우연을 받아들이는 수동성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결합의 강도는 1화, 2화, 3화로 진행할수록 더 강해진다. 


  ‘현실 (=존재) / 비현실 (=무)’의 관점으로 보면 이때 ‘상상=비현실’은 ‘우연=현실’의 수용을 통해 현실화되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게 된다. 

  반면 구키에게 우연의 현실화는 우연을 수용하는 수동성과 결단의 능동성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여기에는 우연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욕망=상상의 능동성은 없는 듯하다. 


  구키는 자신이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성의 문제』, 3장, 8절). 또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자신에게 찾아온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그 운명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결단이란 ‘이’ 우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 같은 우연의 수용은 욕망의 능동성이 없이 수용(결단)된다는 점에서 하마구치와 다르다. 달리 말해 하마구치는 욕망의 능동성을 생각하고, 상상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20세기 초 일본인과 21세기 초 일본인의 차이일까. 


  하지만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구키와 하마구치가 모두 필연에서 벗어나는 「변화 가능성」의 계기로 우연을 생각했다는 점은 같다. 두 사람에게 우연은 ‘같은 것이 반복되는 세계’ (=‘루틴’), ‘같은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세계’에 불쑥 나타나는 ‘이질적’인 존재이고, ‘다른’ 존재다. 동일성에 대한 「타자」다. 이때 우연을 수용하는 것은 타자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곧 타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의미한다.


  우연의 내면화 (=수용)가 ‘근원적 사회성’을 구성한다는 구키의 말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연=타자의 수용이 사회의 토대라는 말이다. 하마구치는 이것을 사랑 관계로 표현한다. <우연과 상상>은 우연=타자의 수용을 통해 인간관계가 성립하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특히 3화는 타자의 환대가 자신과 상대의 변화를 함께 이끌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생성시키는 모습을 그렸다. 


• 우연의 존재론과 ‘오배’


  1화 메이코는 카즈아키의 사무실에서 도망치듯 달려 나와 보행 데크를 내려다본다. 시옷(ㅅ)자 길을 따라, 타인들이 교차하고 흩어진다. 구키는 우연의 성격을 세 종류로 나눴다. 정언적, 가설적, 이접적 (離接 disjunctive). 보행 데크의 모습은 가설적 우연의 가시화라고 봐도 좋을 법하다. 그것은 「독립적인 두 근원 (二元)의 해후」를 말한다 (같은 책, 2장, 15절. 구키는 가설적 우연의 의미 구조가 “일반적으로 우연 그 자체의 특성”이라고 했다). 


  이처럼 각자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 즉 「서로 다른 인과 계열들」이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엇갈리거나, 스쳐 지나가는 것이 세상의 본 모습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렇듯 ‘독립적인 이원의 해후’에 지나지 않은 세상에 집착하지 말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구키는 이 공교로운 만남에 경이를 느끼고, 그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것이 앞서 말한 결단, 즉 우연의 수용으로 이어지고 필연 세계의 변화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적인 이원의 해후’가 우연의 일반적 특성이라면, 우연은 단지 무지나 오해의 산물이 아닐까. 서로 다른 인과 계열의 흐름을 모두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우연은 없고, 필연만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일만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없다. 더구나 인간이 언어 매체를 사용하는 한, 세계 이해는 불완전하다. 말하자면 인간은 언어 매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세계를 파악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인간의 세계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자크 데리다는 이처럼 ‘불가피하고도 불완전한 매개’에서 비롯되는 세계 인식과 소통의 한계를 ‘우편’이라는 은유로 생각했다 (데리다는 초기 저술부터 ‘우편’ 은유를 사용했고, 1980년의 『우편엽서』를 필두로 우편을 주제로 한 저술을 많이 발표했다). 

  이때 우편은 잘 배달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외려 ‘행방불명된 우편물’, ‘잘못 배송된 우편물’, 곧 「오배」를 가리킨다. 오배는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함축한 상태다. 이 개념이 <우연과 상상>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오배는 네트워크의 불완전성을 지칭한다. 또 여기서 빚어지는 상호 인식과 의사소통의 「본질적인 어려움」을 말한다. 언어가 화자의 의도를 배반하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상황 말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데리다는 “비-커뮤니케이션과 오해는 문화와 언어의 지평 자체”라고 말했다 (『기하학의 기원, 서설』, 1962) 

  에크리튀르는 발신자의 통제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항상 메시지를 왜곡시킬 수 있다. 언제나 오해, 불통과 같은 우연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배는 세상의 본 모습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구키의 ‘우연의 존재론’과 조응한다.

 

  앞서 이 글은 ‘시스템의 외부’를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시스템의 외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데리다의 표현처럼 ‘잘못 배송된 우편물’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 즉 시스템의 외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때 오배는 시스템의 관점에서 ‘노이즈’로서 시스템의 외부를 가리키는 은유가 된다 

  (<우연과 상상> 1화 결말부, 카페 장면에서 들리는 공사 소음은 그야말로 대화, 소통 시스템의 노이즈이며, 시스템의 외부를 청각적으로 드러낸다).


  또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 (東浩紀)의 말처럼, 오배는 우리의 사고에 「~일지도 모른다」를 도입한다. 편지는 배송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는 잘못된 수취인에게 배송될지도 모른다. 또는.… 이로써 오배는 ‘우연과 상상’에 접속된다. 

  구키는 필연이 “반드시 그러한 것이 있음”을 의미하고, 우연은 그야말로 “우연히 그러한 것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같은 책, 서설). 이 관점에서 필연성은 「만약 …면, 반드시 ...다」 (If… Then)라는 형식에 가깝다. 반면 우연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우연은 매우 아슬아슬하게 있다. 


  이처럼 우연은 「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의미 구조와 밀접하다. 우연은 데리다의 오배와 가깝고, 상상과 닿아있다. 상상이란 현재 ‘없는 것’ (또는 ‘아닌 것’)에 대한 「~일지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사고 작용이니까. 이때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의 말처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토키온>과 인터뷰, 같은 곳). 


• 세 가지 오배


  ‘아즈마’는 데리다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편지는 반드시 항상 수취인에게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편지의 구조에 속하는 이상, 그것이 진정으로 수취인에게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고, 또 도달할 때도 ‘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편지를 어떤 내적인 표류로 힘들게 하고 있다...” (『존재론적, 우편적』, 제2장, 2-a)


  데리다의 논의에서 세 가지 유형의 오배를 예로 들어보자. 첫째 「도달할 때도, 도달하지 않는 편지」. 이것은 상호 인식과 의사소통의 본질적인 불가능성을 가리킨다. <우연과 상상> 1화의 불통, 또 2화 ‘나오’가 대학생 친구들과 겪는 오해와 불통은 이 상황을 보여준다. “다들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대.” 


  1화의 불통을 자세히 보면, 이름의 분열과 함께 표현된다. ‘츠쿠미’가 ‘츠/구미’로 분열되고, ‘카즈아키’가 ‘카’와 ‘카즈’로 분리되어, 따로 소통한다 (카즈아키와 츠쿠미는 서로를 ‘츠’와 ‘카’로 부른다. 메이코는 츠쿠미를 ‘구미’로 부르고, 카즈아키를 ‘카즈’로 부른다). 

  츠쿠미의 한쪽인 ‘츠’는 ‘카’와 잘 소통하고, 그녀의 또 다른 쪽인 ‘구미’는 메이코와 잘 소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츠/구미’의 분열 (/)은 곧 소통의 벽이다. “나[츠쿠미]도 지금까지 남한테 해본 적 없는 말들, 너[메이코]한테도 안 한 얘기까지 했고.” 카즈아키 또한 ‘카즈’로서 메이코에게 하지 않은 말을 ‘카’로서는 ‘츠’에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잘못 배송된 편지」. 전편에 모두 나타난다. 1화 츠쿠미는 카즈아키와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하필이면, 우연하게도 카즈아키의 전 여친 메이코에게 말한다. 

  2화 ‘나오’는 ‘세가와’에게 보내야 할 편지를 ‘사가와’에게 잘못 보낸다. 오배가 직설적으로, 또 핵심적인 모티브로 등장한다 (특히 ‘사가와’가 택배 회사 이름이라는 점에서 명백하게 오배의 문제를 담았다). 


  3화 인터넷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세계 네트워크가 마비되어 우편과 전신 시대로 회귀한 상황. 이것은 데리다의 우편 은유, 곧 오배의 무대다. 아야 남편이 옛 여친과 주고받은 메일이 우연하게도 아야에게 잘못 배송된다. 또 나츠코와 아야는 서로를 옛 지인으로 착각해 대화를 주고받는다. 


  셋째 「행방불명된 편지」. 데리다의 논의에서 ‘행방불명된 우편물’은 ‘유령’과 나란히 「무의식적 기억」을 나타내는 은유다. 1화 결말부 메이코는 상상 속에서 메시지를 보내지만 현실에서 발송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메이코 마음속에 저장돼 있을 것이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 데드레터, 유령


  미국인은 행방불명 (=배달 불능)된 편지를 ‘데드레터’로 부른다. 데드레터는 언젠가 발송될지도 모른다는 면에서 진짜 죽은 것은 아니다. 살아있다. 그럼에도 배송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죽어있다. 이처럼 ‘산 / 죽은’ 존재를 「유령」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배달 불능’ (반송) 우편물이 쌓이는 공간 (Dead Letters Office), 즉 일탈한 것이 유보되는 공간은 그 메시지, 데드레터, 유령의 「회귀」를 가능하게 한다. 이때 유령은 ‘재래하는 것’이다. 뭔가 해야 할 이야기 (메시지)가 있어 ‘재귀하는 것’이다. 이 유령에는 ‘돌아온 자’를 뜻하는 ‘레버넌트’ (revenant)가 적절하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회귀하는 영’을 <해안가로의 여행> (구로사와 키요시, 2015)에서 본다. 또 <우연과 상상> 3화에서 볼 수 있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나츠코: 지금 난 너에게 뭘 원해서 온 게 아니야 

  단지 그때 그 말을 못 했다고 전하고 싶었어… 

  그걸 말하려고 왔어 


  데리다의 ‘레버넌트’ (=‘회귀하는 영’)는 구키의 우연과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하게 존재한다. ‘현실 (유) / 비현실 (무)’ 사이에 있다. 레버넌트는 또한 오배의 연장선에 있다. 말하자면 배송 (=현실화) 되지 않은 메시지, 욕망, 기억이다. 

  레버넌트는 우연과 비슷하게 ‘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미 구조이면서도,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과 연관해 ‘이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구조를 띤다. 


아야: 가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를 때가 있어

  뭐든지 될 수 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버렸어


  레버넌트는 가능성과 욕망을 이야기한다. 3화는 이처럼 구현, 가시화되지 않은 유령들을 그린다. 나츠코는 20년 간 묻어둔 편지를 보내려 한다. 하지만 수취인이 다르다. 받아야 할 사람이 받을 수 없다.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은 (않을) 편지」로서 ‘행방불명’, ‘배달 불능’ 우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우편이 결국에는 「잘 오배된 편지」로 귀결하는 것을 보게 된다. 


• 능동적 오배


  3화를 더 살펴보기 전에 2화로 잠시 우회한다. 2화에서 오배는 직설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오배 개념을 넓게 보면, 교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보내진’ 사람이 외려 교수에게 호감을 느끼고, 기만행위를 중단한 것은 분명 ‘배송 실패’다. 또 기만행위를 중단했음에도, 본의 아니게 교수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것 또한 오배로 볼 수 있다. 행위 주체의 원래 의도를 배반하고, 다른 것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능동적 오배」*가 나타난다 (*이 용어는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했다). 데리다의 논의에서 오배는 인간이 매체를 사용하는 한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말하자면 오배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2화 엔딩 ‘나오’는 버스에서 우연하게 재회한 사사키에게 뜬금없이 키스를 하고, 하차한다. 이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녀는 세가와 교수와 재회를 꿈꾸며, 사사키에게 ‘미인계’를 쓴 듯하다. 5년 전 그녀가 사사키의 압박으로 세가와 교수에게 미인계를 시도한 것처럼.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래로 ‘자신을 던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능동적으로 오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앞서 오배는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함축한 상태라고 했다. 따라서 아즈마의 말처럼 오배를 의도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오배와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실천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4장). 

  능동적 오배는 우연에 열려 있다. 2화 ‘나오’는 오배에서 거듭났고, 오배를 통해 다시 연결을 시도한다. 나오가 세가와의 진면목을 발견한 것, 또 세가와가 나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오배’ (=‘원래 의도에 어긋난 만남’)의 산물이었다. 이제 그녀는 세가와를 다시 만나려고 (그 가능성을 높이려고) ‘어쩌다 만난’ 사사키에게 오배를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문은 열어둔 채로」라는 2화 제목에는 「우연에 열려 있다」는 울림이 있다. 사실 두 인물은 본래부터 오배, 우연에 열려 있는 성격으로 보인다. 세가와는 나오가 “언어화할 수 없는 미결정 영역에 속한 재능”이 있고,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성격은 세가와도 공유하는 듯하다. 두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 기준”, “세상의 잣대”, 말하자면 사회의 관습,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건」의 조우를 기다리는 초월계 인물이다. “유혹에 자주 넘어가요.” (나오) “누가 유혹했다면 [나는] 바로 넘어갔겠죠.” (세가와) 두 사람의 만남은 바로 그런 ‘사건’의 조우 체험이었을 것이다. 

(※ 예술론 측면에서 세가와 교수는 불문학자이자 소설가인 하스미 시게히코 蓮實重彦를 떠올리게 하나, 지면 관계상 다음을 기약한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이 또 한 번의 재회로 이어지려면 특별한 요인이 필요하다. 이른바 우연이 필연으로 연결되는 요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가와의 말이 인상적이다. “평생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누군가 그걸 안 하면 그건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나오의 ‘능동적 오배’는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감독의 표현처럼 우연에 올라타고, 자신을 던진다는 것. 이 같은 능동적 오배는 3화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 누구의 유령인지 


“그것[우편]이 도달하기 위한 조건은 그것이 결국은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애당초 처음부터 도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우편엽서』, 「송부」, 「1977년 6월 9일」) 


  3화에서 오배는 유령의 은유와 나란히 전개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령은 오배의 연장선에 있다. 그것은 배송 (=현실화) 되지 않은 메시지, 욕망, 기억이다. 이 점에서 나츠코는 20년 간 묻어둔 말을 하려고 재귀한 유령, 레버넌트다. 

  그런데 이야기 전개에 따라, 상황이 복잡해진다. 누구의 유령이 누구에게 「빙의」했나. 이런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 아야와 나츠코가 (실제로는 첫 조우임에도, 마치 동창생을 만난 것처럼) 재회를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야의 제안으로 시작된다. “혹시 괜찮다면 내가 미카 씨를 할까?”


  이렇게 해서 (미카를 대신하는) 아야와 나츠코가 대화한다. 이때 놀라운 변화는 아야 쪽에서 일어난다. ‘미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며, 미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게 된 아야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나츠코의 말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듣고, 아야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공명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변화는 아야 자신의 동창생 X에 대한 기억, 즉 자신이 망각하고 (무의식에서 억압하고) 있던 존재로 다가간다. 이는 곧 아야가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관한 기억에 다가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아야가 흔들린다. 변성의식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 과정을 그림으로 정리해봤다. [그림] 「유령 빙의도」라고 할까. 나츠코, 아야의 만남이 미카, X (노조미)의 관계로 복잡화 된다 (*아야의 옛 친구-연인 ’노조미‘라는 이름은 엔딩에서야 상기된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2, 4 화살표 (→)는 빙의를 의미하고, 양방향 화살표 (↔)는 만남 (소통)을 뜻한다. 


1. 나츠코와 아야가 만남 2. 아야가 미카 역할을 맡음. 아야의 변성이 일어남 3. 나츠코,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찾음 (자기 고백) 4. 이제 나츠코가 아야의 옛 친구-연인 X 역할을 맡음 5. 아야,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찾음


1. 나츠코와 아야가 만남

2. 아야가 미카 역할을 맡음. 아야의 변성이 일어남

3. 나츠코,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찾음 (자기 고백) 

4. 이제 나츠코가 아야의 옛 친구-연인 X 역할을 맡음

5. 아야,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찾음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사람의 역할을 맡는 과정, 즉 ‘빙의’는 「능동적 오배」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변화, 각성시키고, 치유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은 언어를 통해, 언어를 초월한다. 내재계에 닫혀 있었으나 상상을 통해, 대화를 통해 초월계로 함께 열리는 것이다. 

  아야가 되찾은 이름 ‘노조미’는 ‘소망, 희망’ (望み)을 의미한다. 실제 그 사람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노조미가 아야의 ‘되찾은 시간’이란 것. 또 어쩌면 새롭게 거듭난 두 사람의 미래를 암시하는 이름일 수 있다는 것.   


• 떠다니는 편지


  3화는 이처럼 능동적 오배송이 「잘 오배된 편지」를 생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두 사람은 실제 오배된 남편의 편지를 능동적 오배로 발전시킨다. 


“네가 해 준 말이 지금도 나에게 용기를 줘. 네 존재가 지금도 날 깊은 곳에서 지탱해 줘. 널 만난 건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멋진 일 중 하나야.” 


  아야 남편이 옛 여자 친구에게 보낸 메일이다. 이 내용을 (노조미로 빙의한) 나츠코가 전용(轉用)해 아야에게 되돌려준다. “네 존재가 나에게 힘을 줬어… 넌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능력이 있어.” 전용은 또한 능동적 오배다. 

  또 (미카로 빙의한) 아야는 남편의 메일에서 논란(?)이 된 표현, “가장 멋진 일 중 하나”에서 ‘단수/복수’ 요소를 전치(轉致)한다. “모두가 동경했단 말은 안 했어. 내가 널 동경했어.” 전치 또한 능동적 오배다. 이처럼 남편의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바뀌며, 부유한다. 이로써 오배된 편지는 ‘잘 오배된 편지’로 거듭난다. 결말부 나츠코-노조미, 아야-미카는 한 목소리로 말한다. “만나서 다행이야.”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이 일련의 능동적 오배는 두 사람의 깨달음에 조응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것」. 나츠코는 대화를 통해 자신과 같은 노조미를 알게 됐고, 아야는 또한 자신과 같은 미카를 알게 됐다. 자신처럼 사랑을 하며, 고통을 겪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알고, 느끼게 된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똑같이 느낀다고 신뢰하는 감각을 「공통감각」으로 부른다면, 공통감각은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감각이다. 인물들이 능동적 오배를 하고, 오배된 편지를 공유하며,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 것은 이렇듯 우연히 만난 타자들에서 느낀 공통감각일 것이다. ‘다르지만 같음’이라는 감각 말이다. 


  영화는 우연=타자의 만남을 받아들일 때 사회가 성립한다는 구키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그런 한편 영화는 타자의 환대가 오배=빙의에 따른 ‘고유명의 해체’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 (나츠코 →노조미, 아야 →미카). 또 고유명의 해체는 고유명의 확산 (=공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유명의 확산은 사회, 연대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 고유명의 해체, 확산 


  나츠코는 분명 대화 상대가 아야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야를 미카로 믿고 대화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이 대화는 끝내 미카에게 도달하지 않을 것이고, 처음부터 도달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츠코와 아야의 상처를 치유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었다. 대화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잘 도착한 것이다.  


  ‘다름의 인식 / 같음의 믿음’이 교차하는 복합성이 사회, 연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고유명이라는 사고의 해체와 함께한다. 나츠코와 아야의 대화는 ‘바로 이것’, ‘이것임’ (this-ness) 자체가 해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츠코는 미카를 사랑했다. 그 미카는 지금은 부재한 ‘그’ 미카뿐이다. 미카를 잃은 상처가 아물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영화는 이 상처가 아무는 순간을 그린다. 아야가 아야이면서도 미카일 수 있다는 것. 나츠코는 그런 사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영화가 「상상」이라고 부르는 이 깨달음은 구키의 철학에 조응한다.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우연이다. 3화는 여자의 이름이 결혼 전후로 바뀌고, 아버지의 선택에 따라 정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구키의 말처럼 인간이 태어나는 것 자체가 우연이다. 나츠코가 나츠코였다는 것, 미카가 미카였다는 것 자체가 우연이다. 달리 말해 미카처럼 좋은 사람이 또 나타나, 나츠코와 만나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츠코는 미카가 부재한 뒤에도, 다시 ‘미카적 존재’와 조우하기를 꿈꿀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이 나’, ‘그 미카’라는 고유명 (=이것임)의 사고에서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새로운 관계도 생성되지 않는다. 인생도, 연대도, 사회도 형성되기 어렵다.   


  영화는 이처럼 우연한 존재로 나타난 타자들과 함께 ‘조우를 재회로’ 만들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가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글은 앞서 구키 철학의 문제의식을 요약하며, 「우연이 과연 필연에 맞서 버티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에 대해 영화는 데리다적 오배의 모험으로 사고를 몰아가며, 「인간을 고독 속에 가두는 필연의 틀에서 벗어나 우연 즉 타자와의 조우에 마음의 문을 열어라」고 답하는 것이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이미지

다음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자기만의 방’
이전글 <벨파스트> - 일상이라는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