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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어나더 라운드> - 불안한 날엔 키르케고르2022-01-22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이미지

 

1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어나더 라운드> : 불안한 날엔 키르케고르

 

<어나더 라운드> (토마스 빈터버그, 2020)는 생활세계가 무너진 덴마크의 현실에서 삶을 재건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와 공통된 모티브를 보여준다. 남자 주인공이 감정의 저하상태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 나선다는 모티브다(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내의 외도는 주인공의 감정 침체가 빚어낸 결과이며, 주인공의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다). 또 주인공의 동료들은 이 상황에 맞서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 된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 이미지

▲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출처: 네이버)

 

반면 <어나더 라운드>는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 (1813~1855)와 알코올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더구나 두 요소가 영화 전편을 통해 융합되어, 일관된 모티브를 이룬다. 그런데 오늘날 키르케고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키르케고르 사상은 19세기 산업화 시대에 나타났다. 산업혁명에 따른 사회의 급변, 인간소외와 허무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덴마크 산업혁명은 18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시기에 저술 활동을 했다).

 

감독은 산업혁명 시기의 아노미 상황과 오늘날 생활세계의 붕괴 상황을 나란히 놓고 본다. 감독이 키르케고르를 다시 불러낸 이유일 것이다. 영화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마르틴의 강의를 보여준다.

 

마르틴 : 세계의 역사에서 산업 시대

서구 사회들이 기술적 진보를 기반으로

현대 세계의 기반을 닦기 시작한 시기지.

 

모든 것은 산업 시대에서 시작한다. ‘현대 세계의 기반을 닦은 것도, 현대 세계의 근본 문제가 설정된 것도 이 시기다. 정치의 관점에서 19세기 당시 덴마크 정부는 이미 17, 18세기에 정치 이념을 확립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에 비해 정치 철학이 정비되지 않았다. 또 종교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세속화 (=정치화)한 덴마크 국교회는 시민들의 가치 혼란과 공동체 붕괴를 다잡아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사회학의 용어로 <재귀성> (reflexivity)의 위기를 낳는다. 재귀성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영하고)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성질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재귀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근대사회다. 근대 이전에는 전통, 습관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 됐다. 반면 앤서니 기든스의 말처럼 근대사회는 재귀성에서 이뤄진다. 과거에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선택의 전제가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재귀성

 

이처럼 재귀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사회’ (=‘재귀적 근대’)는 확고한 선택의 주체를 요청한다. 기존의 전통, 관습이나 맹목적인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의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서양사회의 경우는 기독교적 개인성이 큰 역할을 했다.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말처럼 기독교 사회는 도덕의 표준을 정해놓고 이를 따를지는 개인 양심에 의존한다. 구제나 속죄 또한 개인 단위로 생각된다. 이때 인간은 개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묻고 답하며, 사회규범을 따를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 관점에서 기독교적 개인성은 근대사회에서 재귀성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개인 단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선택의 주체를 세운다(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20), 또 미국 민주주의의 바탕은 이 관점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근대국가 철학 (자유, 시민, 국제적 연대, 민주주의, 이성, 자유로운 합의, 법치)도 부족하고, 기독교적 개인성도 부재한 나라는 재귀성의 기반을 <생활세계>에 놓기 마련이다.

 

덴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얀테의 법칙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덴마크인의 생활세계 의존성을 말해준다. 생활세계는 개인과 국가의 중간영역으로 가족, 학교, 작은 공동체, 작은 지역 같은 것이다. 이 영역은 시스템의 외부로서 우리라는 의식이 귀속된다. 생활세계 / 시스템으로 대비된다. 생활세계는 스스로의 편익을 위해 도시화를 받아들이고 사회의 시스템화를 수용했다. 하지만 시스템화가 사회를 석권하는 가운데 생활세계가 공동화(空洞化)된다.

 

이것은 곧 재귀성의 위기를 말한다. 재귀성의 근거인 생활세계가 무너지며 재귀성은 무한소급에 빠지고, 재귀성이 끝나지 않는다. 사회의 기초에 싱크 홀이 생긴다. 이때 개인들은 저마다 뿌리가 뽑힌 채 방황하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일이 19세기 산업 시대에 발생했다. 또 토마스 감독의 관점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또는 다시금) 이런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감독의 앞선 영화 <더 헌트>(Jagten, 2012)는 이처럼 생활세계의 상실 속에서 개인의 운명을 묻고 있다. <코뮨>(Kollektivet, 2016)1970년대의 생활세계에 대한 향수를 담았다. 감독 자신이 체험한 셰어 하우스문화를 그렸다. 그리고 <어나더 라운드>에서 키르케고르를 불러낸 것 또한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영화 <더 헌트> 포스터 이미지


<더 헌트>The Hunt (2012)


영화 <사랑의 시대> 포스터 이미지
<사랑의 시대> The Commune (2016)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나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물었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19세기 내내 이 물음은 인기가 없었다. 그 시대는 다른 물음으로 지배됐다.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항상 사회를 제외한 인간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으로 이어졌다. “개인은 없고 시민만 있다는 이야기다(피터 드러커, 인기 없는 키르케고르, The Ecological Vision: Reflections on the American Conditions, 1993).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삶에서 두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인간의 존재는 오직 두 차원의 긴장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이때 긴장은 동시성, 동시적인 삶이다. 그 긴장을 시민 / 개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회의 차원에서 인간은 가족, 이웃, 시민으로서, 사회적 존재로서만 존재한다.

반면 내밀한 정신, 실존의 차원에서, 키르케고르가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신 앞에서인간은 개인으로만 존재한다. 이때 각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는 홀로 그 세계에 직면한다(‘죽음의 순간이 직관적인 사례다. 누구도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다).

 

요컨대 사회시민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각자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정신 영역이 있고, 꿈이 있고, 개인성이 있다. 후자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이처럼 키르케고르는 개인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는 독일 철학, 특히 헤겔이 이 점을 사고에서 배제함으로써 추상적인 사고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그 추상적인 사고가 남용된 결과로 다음 세기에 전체주의’(히틀러, 스탈린)라는 괴물이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또 오늘날 선진국에서 시스템화의 부작용으로 개인들의 감정 저하가 일어나는 현상도 목격한다. <어나더 라운드>의 인물들처럼.

 

시민 차원과 대조되는 개인 차원은 생활세계와 같은 차원에 있다. 생활세계는 <홈베이스>(home base). 사람들에게 각자의 홈베이스가 있으면 시민 (=사회, 시스템) 영역의 삶을 견딜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홈베이스의 존재는 중요하다. 이 점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신과 관계를 맺는 자신의 내면에서 홈베이스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산업 시대와 시스템화에 대비되는 홈베이스의 중요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홈베이스는 무엇이든 좋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것도 좋다. 가족, 연인, 가까운 친구, 취미, 동아리도 좋을 것이다. 유동적인 현실 사회와 대조적으로 거기에서의 관계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홈베이스이고, 생활세계다. 그것을 신뢰할 수 있다면, 사람은 가혹한 상황을 견딜 수 있다.

 

이 관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확장해보자. ‘시민 / 개인’, ‘시스템 / 생활세계’, ‘유동성 높은 영역 / 낮은 영역’, ‘대체 가능한 영역 / 불가능한 영역’, ‘본캐 (본 캐릭터) / 부캐 (부 캐릭터)’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선 왼쪽 항을 넘어 오른쪽 항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자신을 찾고, ‘완전한 행복을 찾는 것이다. 왼쪽 항은 현실계이고, 오른쪽은 이상계. 현실에 갇혀 있는 우리가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과 만나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또 결단에는 열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정을 점화시켜 주는 것은 불안이다. 영화 도입부는 마르틴이 불안을 느끼는 모습에서 출발한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이미지

 

현명함의 등급

 

마르틴은 수업 진행에 대한 지적을 받고, 불안을 느낀다. “아니카, 내가 지루해졌어? 내가 지루한 사람이야?” 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불안이 없는 사람은 자아를 잃은 사람이고, 이상과 만나려는 열정을 잃은 사람이다. 바로 현시대의 모습이다.

마르틴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 대부분은 감정 저하를 겪고 있다. 생활세계가 무너진 결과다(마르틴은 가족들과 대화가 거의 없다. 톰뮈는 아내와 이혼하고 홀로 산다. 페테르는 연인을 찾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어 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니콜라이는 풍족한 생활을 하지만 아늑한 보금자리를 누리지 못한다). 마르틴의 문제는 수업만이 아니라, 인생의 태도에 있다.

 

니콜라이: 난 그거 말고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봐

넌 자신감이 부족해.

즐거움도, 그게 문제지

 

마르틴은 지난 10년 가까이 일상에 갇혀 있었다. 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의 문제점은 현실적이고 싶다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산다는 점이다. 현실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다(“자아가 사라진 것은 무한한 곳으로 사라져서가 아니라 유한한 곳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자아는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숫자, 평범한 인간, 쳇바퀴처럼 반복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1849).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가 있다. 열정이 있어야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과 만날 수 있고, 그때에야 이상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이상의 시선에서 현실을 볼 때 우리는 현실에 벌어지는 일들을 놓고 가치의 순위를 재조정할 수 있다. 이것은 현실을 다르게 보게 하고, 현실의 과부하를 축소시킴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이 관점에서는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겠다.’거나 현실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현실을 넘어 완전한 행복이라는 이상을 만나려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더 현명하다. 이처럼 현명함(sensible)에는 등급이 있다. 영화는 니콜라이 생일파티에서 마르틴이 술을 한 잔도 안 마시는 모습을 비추며, 진짜 현명함이 뭔지를 묻는다.

 

페테르: (=마르틴) 현명한 게 문제야

니콜라이: 문제는 현명함이란 게 뭐냐는 거지

 

이 장면은 키르케고르의 현시대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현시대는 본질적으로 분별 있는(sensible, 현명한) 시대이고, 반성(reflection)의 시대다, 열정이 없다. 어쩌다가 피상적으로 잠시 감격이 불타올라도, 곧 신중하게 나태함 속으로 잦아들어 버리고 만다.” (현시대, 1846)

 

영화는 열정의 모티브로 알코올을 도입한다. 니콜라이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술을 마시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 키르케고르의 저서 인생길의 여러 단계(1845) 첫째 장의 제목이다. 영화에서 열정, 사랑, 알코올은 같은 말이다. 또 이것을 점화시키는 것은 불안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이미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긍정적인 계기다. 비유컨대 이상계에서 현실계로 발신하는 시그널이다. 그 시그널을 잘 따라가면 이상계로 다가갈 수 있다. 불안은 언제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심리학자 롤로 메이의 말처럼 어떤 가능성도 없을 때는 불안도 없다. 불안은 항상 어떤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고, 가능성의 선택과 포기에 관련된다. 우리의 선택이 현실에 안주한 우리 자신을 바꾸고 재규정한다면,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키르케고르가 불안을 두고 자유의 자각에서 오는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한 이유다.

 

영화는 니콜라이의 수업 시간에 키르케고르의 말을 느슨하게 인용한다. “도전이란 자신의 토대를 일시적으로 잃는 것이고, 도전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1849).

불안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단지 불안을 대하는 태도에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나쁜 선택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페테르가 의대 지망생인 세바스티안을 격려하는 모습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세바스티안은 마침내 불안 개념을 실패 가능성과 연결해 이해한다. 불안을 실패를 무릅쓰는 모험과 연관 짓고, 불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은 창조적 잠재성을 지닌다(기존의 관습을 파괴한다는 면에서는 파괴적 잠재성을 띤다). 하지만 주의하자. 키르케고르도, 영화도 자기계발서 담론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불안은 무한함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불안은 현실사회에 안주하는 데서 오는 행복을 넘어 완전한 행복의 이상을 꿈꾸라고 속삭인다. 불안은 끝없이 열정을 촉발한다.

불안이 이끄는 열정은 자기계발서가 목표로 하는 행복과 거리가 있다. 심하게 말하면, 열정은 행복에 관심이 없다. 사실 행복의 입장에서 열정은 걸림돌이 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열정을 자제하라고 충고한다. 뭔가 절대적인 것을 갈망할 때 우리는 열정적이 된다. 남들이 보기엔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교사들이 알코올 실험에 도전하는 이유일 것이다.

 

약속의 의미

 

영화는 열정, 사랑, 알코올을 같은 의미 계열로 놓는다. 이 관점에서는 사랑 또한 절대적인 것의 갈망과 연결된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나 대중문화에서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영원히’, ‘끝없이’, ‘절대로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랑의 감정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해 사용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에게도 사랑은 종교적 열정의 사례이자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는 열정을 품는 능력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같은 것으로 봤다. 사랑은 열정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모른다(인정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것을 갈망하는 열정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행복보다 황홀함을 갈망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무한함을 갈망한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대부분의 연애소설이 잘못됐다고 했다. “연애소설은 시작점에서 엔딩을 맞이하므로 해롭고 위험하다(이것이냐, 저것이냐, 1843).

 

이 관점에서 마르틴과 아니카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언제나 비일상계의 사랑으로 시작한다. ‘지금, 여기’ (=일상계)에서 일어나지만 여기가 아닌 어딘가’ (=비일상계)로 나아가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한쪽이 그 사랑을 일상계 사랑으로 안정화시키려 하는 반면, 다른 한쪽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비일상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긴다.

영화는 이 점을 묘사했다. 마르틴은 일상계 사랑에 정착하려 했고, 아니카는 비일상계를 지향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카는 사랑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마르틴: 아니카는 애들 엄마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병수발도 해 줬고

우린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늙어 가기로 했었지

 

마르틴은 분명 아내에게 성실하다. 하지만 사랑에는 그런 성실함이나 의무감이 전부가 아니다. 마르틴은 사랑의 약속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약속은 <윤리>의 범주에 속한다. 이때 윤리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지 않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는 약속 개념에서 두 가지 계기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자유로운 선택이다. 강요되거나 의무로 맺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시간과 연관된다. 약속은 지속적인 노력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지나가는 시간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이고, “시간에 의해 변화가 일어나도 그 모습 그대로 있겠다는 노력이다(Vivire passionnément avec Kierkegaard, 2015).

 

키르케고르는 지속적인 노력반복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흐르는 시간을 영원불멸처럼 생각하겠다는 마음이다. 이것이 윤리적인 것이다. 이 기준은 매우 높다(아마도 키르케고르가 스스로 약혼을 파혼한 이유가 아닐까). 그럼에도 이 윤리 개념을 사랑에 적용할 때 유의미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사랑의 약속은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약속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노력은 또한 꾸준한 자기 변화를 포함한다. 그것은 특정한 날의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히 열정을 유지하는 일상을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일상화>를 말한다. 이 점에서 사랑의 윤리는 0.05% 알코올 (=사랑, 열정) 혈중농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이때 알코올 농도 유지는 오프닝 장면의 음주 축제와 비교할 때 <축제의 일상화>(이 모티브는 또한 <바쿠라우>미열의 거리와 마르쿠제의 에로스 개념을 연상하게 한다).

 

증강현실의 발상

 

키에르케고르의 이상계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계에 작용한다. 우리가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이상을 추구하게 하며,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도록 노력하게 해주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두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의 현실 / 이데아처럼 기존의 형이상학이나 종교에서 자주 나오는 도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삶이 두 차원의 긴장, 동시성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이 동시성을 종합’ (Synthesis)이라고 불렀다. 이 종합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현실계 / 이상계로 말하자면, 키르케고르의 이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회피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키르케고르는 체념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체념은 더 나은 세상’ (=이상계)이 있다는 생각을 핑계로 현재의 삶을 저버리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현실을 견디며, 이상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상계는 우리가 현실에 욕심으로 가득한 짐을 얹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불필요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현실적이고 싶다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때 종합은 이상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가령 사회의 규범이 사회의 외부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확실히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프로이트가 비엔나의 과도한 도덕규범 때문에 스스로를 옥죄어 신경증에 걸린 부인들을 치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해 종합은 이상의 시선으로 현실을 응시할 때 발생한다. 헤겔 변증법처럼 정립 / 반정립이 서로 용해되어 제3자를 만들어내는 종합이 아니라, 반정립의 관점에서 정립을 보는 것이다. 정립과 반정립, 또 양자의 대립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럼에도 정립의 의미를 다르게 보게 하고, 축소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키르케고르 철학은 가상현실 (VR)이 아닌 증강현실 (AR, XR)의 발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경우는 가상현실의 발상처럼 일상계 / 비일상계를 분리하고, ‘비일상계로 가버린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일상계 / 비일상계를 종합한다. 그것은 비일상계의 눈으로 일상계를 <겹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로써 일상계를 증강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술의 내재화

 

이 관점에서 혈중 알코올 농도의 유지라는 모티브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핵심은 술의 자제가 아니다. 술의 내재화 (내면화, 일체화)에 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을 마신 것처럼 현실계를 보는 것이다.

 

마르틴: 뭔가 일어나고 있어

취해 있지 않을 때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아

좀 더 차원 높은 뭔가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다(“지금 뭔가가 일어났어.” 소냐와 엘레나의 연기에 대한 가후쿠의 말). <어나더 라운드>는 그것을 열정과 초월계’ (=비일상계)의 각도로 보여준다. 여기서 마르틴은 증강현실의 시선으로 현실을 보는 느낌을 이야기한다. 이때 알코올은 키르케고르의 열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알코올 실험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사회생활을 돕는 음주라는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선을 넘어선다. 열정이 우리를 현실 너머로 이끄는 것처럼 음주는 등장인물들이 사회생활 너머에 있는 초월계로 진입하게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르틴에게 일어난 변화다. 마르틴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뒤에 현실로 돌아온다. 떠난 곳과 돌아온 곳은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변화하고, 성장했다. 마르틴은 열정(적인 삶)을 회복했다. 이제 술에 취한 시선 (정동, 세계관)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르틴의 귀환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아내와 진정으로 화해하는 것이다.

 

마르틴 부부의 측면에서 결말부에는 이륙 혼융 착륙의 통과의례 도식이 있다. 이륙은 만취한 마르틴과 아내의 다툼이다. 착륙은 아내의 선물이다(아내가 휴대폰으로 보내온 사랑의 메시지다). 이륙 지점은 마르틴이 오랫동안의 침묵 (감정 저하)을 깨뜨리고 열정을 찾기 위해 알코올의 강도를 높여 가던 상황이었다. 그럼, 착륙 지점은 어디인가. 이곳에서 감독은 키르케고르 방식의 문제해결을 보여준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이미지 

 

결정적 순간’ =영원함

 

그 문제 해결은 <재귀화>. 마르틴이 만취한 날, 서로의 거짓이 쌓이고 쌓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랫동안 마르틴은 아니카에게 무감각, 무관심했다. 또 아내는 직장 동료와 사귀고 있었다. 가족을 이루는 두 사람의 약속은 폐기되었다. 이로써 가족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내가 돌아왔다. 또 한 번 약속이 맺어지고, 굳게 재결합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톰뮈의 죽음이 있었다. 톰뮈는 오랜 세월 동안 마르틴 커플의 사랑을 따뜻하게 지켜본 목격자다.

 

톰뮈 : 난 널 응원해, 마르틴

그리고 아니카도, 알지?

마르틴과 아니카

둘은 오랫동안 함께였잖아

 

말하자면 톰뮈는 마르틴 부부가 서로 거짓말을 쌓아가면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또 아쉬워하며, 오랫동안 삶을 함께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인물이다. 즉 마르틴 커플의 공통 기억을 상징한다. 이 공통된 삶의 이력이 두 사람의 재결합에 새로운 <공통 전제>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약 톰뮈가 죽지 않았다면, 이 커플은 자신들의 공통된 이력을 그토록 절실하게 상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키르케고르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할 위험에 빠진 사람들에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라며, 그렇게 생각해야 우리 삶이 소급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시간의 가치를 상품의 희소성에 비유한다.

상품에는 합당한 가격이 있다. …… 희귀성이 있을 때 상인은 이득을 얻는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성실한 사람은 희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결과로 그의 삶에서 하루하루가 무한한 가치를 갖게 된다.” (묘지에서, 상상한 이야기에 나타나는 세 담론, 1845)

 

앞서 이상계 (=비일상계)의 시선으로 현실계 (=일상계)를 볼 경우, 일상에서 가치의 순위를 재조정한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가장 직관적인 사례를 제공할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한다. 중요한 것이 사소해지고, 사소한 것이 중요한 삶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달리 말해 죽음을 자각해야만 타인과의 친밀함을 되찾을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르틴 부부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끝없는 재귀성끝이 나는 재귀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두 사람이 (결합을 위한) 공통 전제의 유지에 참여하는 이유는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상기시켜준 과거 삶의 기억과 남은 삶의 소중함에서 우러난 것이다.

 

고든 마리노는 키르케고르가 죽음으로부터 끌어낸 지혜를 이렇게 정리했다. “당신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심하지 말라. 논쟁하지 말고, 미결인 상태로 내버려두라.”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죽음이 명확해지면, 순간이 영원처럼 지속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엔딩 장면 마르틴의 춤을 이해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영원은 현재에 존재하고, 순간이 곧 영원이라고 했다(불안의 개념, 3). 마르틴의 춤은 이처럼 영원의 눈으로 현실을 볼 때 발생하는 기쁨의 세리머니다.

 

되찾은 생활세계

 

마르틴에게 자신(Self)을 되찾는다는 것은 아니카(와의 관계)를 되찾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틴이 찾고자 한 자신은 바로 홈베이스 =생활세계였다고 볼 수 있다. 마르틴은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영화는 우리 대부분이, 현대 사회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전통사회에서 홈베이스 =생활세계는 지역사회가 담당했다. 이때 생활세계는 일상계 성격이 짙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 시대 이후의 생활세계는 비일상계로 바뀌었다. 재건해야 할 이상 세계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키르케고르, 또는 영화는 생활세계의 재건에 합리적인 이성 너머의 뭔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화는 마르틴이 생활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열정이었다. 감독은 <인터뷰 매거진>의 대담에서 덴마크 사회에 열정이 없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덴마크엔 순결 (chastity) 감각이 크게 성장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순결, 공포, 과잉-이성적 행동이라고 부르겠다.…… [영화는] 이 나라의 평범함과 지루함에 대한 반발이다.” (Interview Magazine. 05/03/2021)

 

이때 과잉 이성적이란 말은 키르케고르의 현명함’ (sensible, 분별 있는)과 같은 말일 것이다. 감독은 여기에 통제할 수 없는 것‘ (uncontrollable)의 중요함을 덧붙인다. “통제 불가능한 것이 매우 필요하지만, 현재 이를 위한 공간이 거의 없다.” 영화는 바로 통제 불가능에 대한 것이고, 통제를 내려놓는 것의 즐거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곳)

여기서 통제 불가능한 것은 키르케고르의 열정과 같은 말일 것이다. 이 점에서 감독은 생활세계가 해체된 사회에서 시스템화 이전의 열정을 회복해, 생활세계의 부활을 꿈꾼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그 열정을 사랑과 알코올과 함께 병치했다. 필자는 이런 설정이 키르케고르 철학을 세속적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본다.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랑의 약속과 같으며, 지속적이고 꾸준한 노력=열정과 같다. 또 엔딩 장면, 마르틴의 춤은 순간에서 영원을 느끼는 법열에 해당하는 것이다.

알코올이나 사랑이 독실한 키르케고르와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처럼 키르케고르의 핵심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사랑이 신적인 단어라면, 다시 말해 삶에서 사랑하는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마르틴은 기쁨에 넘쳐 춤을 추는 키르케고르인 것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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