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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바쿠라우> - 에로스와 타나토스2021-09-30
바쿠라우 스틸 이미지

 

9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바쿠라우> : 에로스와 타나토스

 

 

   <바쿠라우>(Bacurau, 2019)정체불명의 집단에 맞서는 바쿠라우 마을의 모습을 통해 오래된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렸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브라질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아니다.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은 브라질 주간지 <베자>에서 자신은 전단지를 만들지 않았다고 강조한다(Veja, 27/09/2019).

   영화는 브라질의 현재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로컬 현실 차원을 넘어 글로벌 문명 차원에서 세계관의 충돌을 그린다. 또 영화는 적들과 싸우는 모습에서 그치지 않고, 바쿠라우의 대안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영화는 표층과 심층으로 갈라 볼 수 있다. 표층은 브라질 현실과 연관된 반()식민 투쟁을 보여준다. 한편 심층에 깔린 세계관의 충돌은 기술, 에로스, 타운십(Township: 소규모 공동체의 자치)이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요소들이 형상화되는 근저에 1960년대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있다고 본다. 바꿔 말해 감독은 1960년대 대항문화를 기반으로 미래적 유토피아를 형상화했다는 이야기다.

 

권력의 식민성’(Coloniality of power)

 

   표층 차원부터 들여다보자. ‘권력의 식민성은 페루 사회학자 아니발 퀴자노가 개념화한 것이다. 비록 식민지 국가들이 오늘날 해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 형성된 식민 지배 권력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개념이다.

   브라질에서 이 개념은 인종 문제다. 말하자면 백인이 유색인종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문제다. 이는 곧 역사적으로는 노예 지배 300년에 연결되고, 지리적으로는 북부와 남부의 대립으로 연결된다(1500년 브라질에 온 포르투갈인은 1530년대부터 1888년까지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했다. 그 결과로 북부는 혼혈, 흑인, 원주민이 많고, 남부는 백인들이 많다. 경제적으로 북부는 가난하고, 남부는 부유하다. 영화 무대는 북동부 페르남부쿠 주다).

 

   앵글로색슨계에 비해 포르투갈인의 인종 개념은 다소 유연하다. 전자는 인종적 격리, 분리를 추구한 반면, 후자는 혼혈에 관대했다(우생학적으로 우월한 백인들이 열등한 흑인들을 개량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포르투갈인은 피부가 백색이면 백인으로 쳐준다. 앵글로색슨처럼 엄격하게 족보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인종 차별은 있다. 이것은 현재 브라질에서도 백인 지배가 엄존하고, 백인과 남부의 우월감이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는 이처럼 인종적으로 관대하면서도, 백인 지배가 지속되는 모순을 잡아낸다. 바쿠라우를 공격하는 앵글로색슨계 용병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지역 업자(계약자)’로 참여한 조아우는 자신과 바쿠라우 사람들이 다르다고 말한다.

 

조아우 : 우리는 다른 지역 출신이에요

용병1 : 어디서 왔는데?

조아우 : 브라질 남부요. 굉장히 부유한 지역이죠

독일과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곳요.우린 여러분과 같아요.

용병2 : 보자. 딱 보기에는 피부가 흰 것 같은데, 백인은 아니야.

 

   백인들 사이에서의 인종 개념 차이, 또 브라질 백인과 남부의 우월감을 볼 수 있다. 한편 용병 대장인 마이클은 작전 회의 공간에 들어서며, 오래된 조면기(목화의 씨를 빼고, 솜을 트는 기계)를 살펴본다. 독수리 문양과 함께,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제조됐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건물이 과거에 흑인 노예들이 일하던 면화 공장이었다는 사실, 또 북미와 남미를 가로지르는 노예의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영화는 이처럼 과거의 식민 지배 권력과 현재의 바쿠라우를 공격하는 권력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바쿠라우가 시장 토니와 백인 용병들에게 맞서는 것은 반식민 투쟁이 된다. 마을 사람들이 시장을 처벌하는 엔딩 장면을 생각해보자. 악인에게 악마 가면을 씌우고 처벌하는 것은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난다. 또 악인을 당나귀 등에 태우는 것도 꽤 보편적인 처벌 방식이다(모욕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다).

   반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으로 내보내는 것은 과거 노예들을 처벌하는 방식이다. 이 장면은 페르남부쿠 노예 역사의 미러링’(상대방의 행동을 되갚아 주는 것)으로, 시장의 처벌이 반식민 투쟁이란 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랑피앙우(Lampião)

 

 

페르남부쿠 지역

 

(페르남부쿠 지역, 이미지 출처 : 구글 지도)

 

 

   영화는 곳곳에서 페르남부쿠 지역의 역사를 반영한다. 극중에서 강렬한 폭력성을 나타내는 룽가는 페르남부쿠의 전설적인 캉가세이루(Cangaceiro: 노상강도, 산적) 대장인 랑피앙우’(1897~1938)와 닮았다. 랑피앙우는 낭만 도적이다. 연인인 마리아 보니타’(‘아름다운 마리아’)와 함께 무리를 지어 200번이 넘게 무장 경찰들과 싸우고 그들을 공포에 떨게 했지만, 서민들과 성직자에게는 예의바르고 따뜻했다. 1960년대 대항문화 가수 존 바에즈가 그를 노래한 이유일 것이다(“O Cangaceiro”, Joan Baez, 1964).

 

   랑피앙우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페르남부쿠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룽가, 너는 글을 잘 썼지. 공부를 계속해야 했어”). 그는 더운 기후에도 가죽 복장을 착용했다. 룽가도 그 더운 날씨에 가죽 부츠를 신는다. 랑피앙우 집단이 사용한 무기는 바쿠라우 역사박물관에 보관된 무기와 같다. 이는 곧 바쿠라우 사람들이 결전의 날에 사용한 무기다(마우저 소총, 1908. 윈체스터 44구경, 1873).

 

   1938728일 새벽,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 부대는 랑피앙우의 은신처인 농장을 포위, 기습한다. 전투 끝에 40여 명은 달아나고, 랑피앙우와 마리아, 그리고 9명이 사망한다. 경찰은 이들의 목을 베어 공개 전시했다. 1969, 30년이 지난 뒤, 이들의 머리는 살바도르 박물관의 전시품에서 철수되고, 묘지에 묻혔다. 영화 엔딩, 룽가가 백인 용병들의 머리를 역사박물관 앞에 전시하는 것은 또한 페르남부쿠 역사의 미러링이다.

 

   ‘랑피앙우램프, 랜턴을 뜻한다. 1921, 무장 경찰의 공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스물 네 살의 청년 비르굴리노 페헤이라 다 시우바가 이 별명을 얻게 된 것은 한 발씩 수동으로 재장전하는 레버액션소총을 너무나 빨리 발사할 수 있었기에, 밤에는 마치 램프를 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살해됐을 때 바쿠라우 사람들이 랜턴과 총을 겹쳐 들고 가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랑피앙우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들은 모두 랑피앙우인 것이다.

 

희생자들의 이름

 

결말부, 마을 DJ ‘우르수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사람들은 교회 앞 광장으로 모인다. 희생자 이름 가운데는 브라질 역사를 반영하는 이름이 있다.

마리자 레치시아 사우베이라 다 코스타는 룰라 전 대통령의 부인인 마리자 레치시아을 떠올리게 한다(룰라의 비리 혐의 수사가 진행되던 2017,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마리엘르 고메스 드 소자는시의원이자 인권운동가인 마리엘르 프랑쿠를 연상하게 한다(다른 여성과 동성 결혼을 앞둔 2018, 거리에서 암살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명한 조아우 페드루 테이셰이라는 페르남부쿠를 대표하는 농민 운동가였다(경찰의 발포로 1962년 사망했다).

 

   테레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들으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추모와 같은 것이고, 추모는 곧 기억의 계승이다. 바쿠라우는 이처럼 추모 의식을 통해 공동체적 삶을 기억하고, ‘공동체가 함께한 가치를 기억하려 한다. 이때 기억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과거를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것이다.

 

   바쿠라우의 공동체적 기억은 공동체 붕괴의 위기 앞에서 더욱 빛이 났다. 영화는 공동체의 위기를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설정으로 표현한다. 바쿠라우는 마치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어 하루아침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처럼 공통 기억을 기반으로 위기에 대처한다.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에 사는 이들에게 공통 기억은 공동체적 삶의 소멸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이자 최강의 무기다.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원제 三峽好人, 2006)는 댐 건설로 물에 잠겨버린 마을에서 공통 기억의 재구성에 실패하는 인물들을 그렸다. 하지만 <바쿠라우>는 구글 지도에서 마을을 사라지게 만든 백인 용병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여기서 영화가 제기하는 지도의 인식론을 생각해보자.

 

지도의 인식론

 

   근대 유럽에서 발달한 지도는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시대를 거치며, 식민지를 확장하고, 관리·통제하는 도구의 성격을 띤다. 지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만들어졌다. 지도는 있음 / 없음’, ‘보임 / 안 보임을 결정한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으면 없는 곳이 된다는 말이다. 지도의 공간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과 역사(서사), <장소>를 삭제한다.

   이 같은 지도의 인식론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49)에서 잘 나타난다. 식민지 쟁탈을 놓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다투자 로마 교황청의 중재로 세계 지도를 놓고 세계를 절반씩 나눈다. 이처럼 세계를 나누는 사람들에게는 지역민들의 삶(문화, 역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이클 : 외딴 데 늙은이가 있지

바이커() : 이름이 다미아노죠

용병() : 이름 따윈 관심 없어

 

   지도의 인식론은 20세기 후반 세계화’(= 지구화)를 거치며 더 강화됐다. 세계화는 지도의 탈-지역성을 강화했고, 공간 인식은 하이-테크를 매개로 초-매체화됐다. 구글 맵에서 사라지면, 현실에서도 사라지는 것이다.

 

   근대적 지도의 우월한 관점은 지도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오프닝 장면 카메라는 우주, 지구, 인공위성, 남미 대륙의 순서로 다가가고,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를 달리는 트럭을 비춘다.

   영화 제목과 함께 하늘에 별들이 보이는 모습은 브라질 국기처럼 보인다. 이로부터 [ 지도의 인식론 세계화의 시선 브라질 정부의 시선 ]이 이어진다. 지도의 인식론이 세계화의 시선, 즉 백인 제국들이 제3세계를 보는 시점과 같고, 그것이 또한 브라질 정부의 시선, 즉 중앙정부가 페르남부쿠 지역을 보는 시점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이것이 권력의 식민성개념이다).

 

   영화는 이런 지도의 인식론에 맞서 지역 주민들의 장소 감각을 되살리려 한다. 장소 감각은 일상, 지역성, 역사 서사를 통해 체험되고, 신체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지도의 인식론이 제거한 <장소의 ()전유, ()발견>을 주요 과제로 설정한다.

 

감상적인 안티-컴퓨터

 

   오프닝에 들리는 노래는 <미확인>(Não Identificado = Not Identified, 1969)이다. 1960년대 후반 브라질 문화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룹 <트로피칼리아>가 만들었다. 노래는 오프닝의 우주와 인공위성 장면과 어울리는, SF영화 분위기의 기계음으로 시작한다. 노래 가사는 또한 브라질 현실을 넘어 세계관의 충돌을 함축한다.

 

그녀를 위한 노래를 만들 거야

심플한 브라질 노래

나는 만들 거야

낭만적인 (--) 감상적인 안티-컴퓨터

 

사랑 노래를 만들 거야

플라잉 디스크 Flying Disc에 녹음할 거야

 

[내 노래는] 우주로 날아갈 거야

내 열정은 밤에 빛날 거야

마음속 내면 도시의 하늘에서

미확인 물체처럼

 

사랑 노래를 만들 거야

미확인 물체 같은

 

   노래 제목은 정체성의 미확인, 미결정을 의미한다. 바쿠라우가 지도에 없는 상황, 또 용병들과 드론에 연관된 미확인 비행물체와 연결된다. 노래 화자는 자신이 만드는 사랑 노래를 낭만적인 (--) 감상적인 안티-컴퓨터와 동일시한다. 또 사랑 노래는 플라잉 디스크”(LP음반 / 비행접시)에 실려 UFO처럼 날아간다. 사랑 노래는 별이 빛나는 우주와 마음속 내면의 도시 위를 날아간다.

 

[ ‘사랑 노래’ = ‘낭만적, 감상적 안티컴퓨터’ = ‘플라잉 디스크’ = UFO ]

 

   노래는 이처럼 환상, 환각 세계(우주와 내면 도시)의 공유, 에로스적인 기술’(‘감상적인 안티-컴퓨터’)이라는 주제를 포함한다. 노래가 발표된 1960년대 대항문화의 주제이며, ‘허버트 마르쿠제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제안한 주제다.

 

마르쿠제, <에로스적인 기술>

 

   필자는 물론 이 노래나 영화가 마르쿠제를 직접 인용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1960년대 문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 마르쿠제의 사상은 노래와 영화의 주제와 친연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특히 에로스와 문명이 말하는 <다형 도착(성애)><리비도적 합리성>을 예로 들 수 있다.

   먼저 에로스부터 설명하자면, 에로스는 사랑충동이고 타나토스는 파괴’(=죽음) 충동이다. 에로스는 더하기, 곱하기이고, 타나토스는 나누기, 빼기. 마르쿠제는 에로스가 살아있는 실체를 더 큰 단위로 형성하고 개인들을 더 큰 단위로 연합시킨다고 본다(에로스와 문명, 10).

 

   이 관점에서 <다형 성애>는 문명사회의 과잉 억압에서 해방된 에로스다. 바쿠라우에 가득한 자유 성애분위기와 연결된다. <리비도적 합리성>감각(미학적-에로스적 만족)을 억압하지 않는 이성’, ‘상상력과 함께하는 이성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기술>로 나타난다.

   기존의 기술이 세상을 파괴, 통제·관리하는 <타나토스적 기술>이라면, 에로스적 기술은 세상을 융합·연합시키는 것이다. 영화에서 시장 토니는 망막 스캔리더를 지녔고, 용병들은 구글 맵을 바꾸고 지역 통신을 마비시키는 기술을 지녔다. 이 기술은 타나토스적이다. 세상을 통제·관리, 파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니까. 반면 노래 <미확인>감상적인 안티-컴퓨터는 에로스적 기술이다. 사랑(=에로스)과 노래(=예술)와 합체를 향하니까.

 

   이처럼 에로스적 기술은 기존의 기술에 체화된 파괴 충동이 아닌 삶의 충동’(= 에로스)에 따르고, 예술(미학)과 상상력이 재결합된 기술이다. 또 자연의 잠재성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다. 마르쿠제는 이런 기술을 바랐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에로스는 생물과 무생물, 유기체와 무기체의 전 자연에 실재하는 잠재성을 잠 깨우고 해방하기 때문이다(에로스와 문명, 8).

   이로부터 마르쿠제는 에로스적 기술을 통한 사회 변혁을 제안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 사람들과 달랐다. 하버마스는 그가 성 프란체스코와 새의 대화를 꿈꾼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우리는 1970년대 실리콘밸리가 에로스적 기술을 통한 인간 해방을 꿈꿨다는 걸 안다. 또 영화 속 바쿠라우는 에로스의 감성으로 충만하다. <바쿠라우>는 타나토스로 무장한 집단과 에로스로 무장한 공동체의 대결을 그린다.

 

   이 관점에서 <바쿠라우>시작부터 엔딩까지 분노로 가득하다고 보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에로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1960년대 대항문화의 문제의식을 통해 문명의 미래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앞서 영화가 브라질의 현실 차원을 넘어, 문명 차원에서 세계관의 충돌을 보여준다고 말한 이유다.

 

베트남 전쟁의 소규모 재연

 

바쿠라우 스틸 이미지

 

 

   멘돈사 감독은 <바쿠라우>베트남 전쟁의 미시적(microscopic) 재연이라고 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백인 용병들이 마을을 침략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마을에 들어선 용병들은 피에 젖은 옷이 널린 모습을 보고 망할 야만인들”(Fucking savages!)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지옥의 묵시록>(1979), 킬고어 대령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영화가 지닌 대항문화 요소에 주목한다.

 

   베트남전에 미국이 참전한 시기(1965~1973)는 대항문화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시기이며, 베트남전이 끝나면서 대항문화도 끝난다. 브라질 반정부운동도 대항문화와 함께 발전했다. 다큐 <위기의 민주주의>(2019)에서 감독은 1960년대 후반 학생 운동가였던 아버지가 베트남전 반대 시위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대항문화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꿨다. 기술관료제(technocracy: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기업과 기술 전문가 체제’) 시스템과 손익 계산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혼돈과 도취>를 추구했다. 이 운동은 반전 반체제, 성 해방, LSD, 공동체, (사이키델릭) 록 음악, 컴퓨터 사운드·영상 실험과 함께했다. 앞의 네 가지(밑줄)는 바쿠라우와 직결된다.

 

   그런데 1960년대 대항문화가 당시의 기술관료제 시스템과 맞선다면, 바쿠라우는 하이-테크로 무장한 테러 집단과 맞선다. 분명히 다르다. 당시의 기술관료제는 어쨌거나 통합을 추구했고, 대항문화는 바로 그런 통합에 저항했다(시어도어 로자크, The Making of a Counter Culture, 1969, 1).

   반면, 영화 속 용병 집단은 파괴와 죽음을 향한다. 이들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혼동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현실을 게임 공간처럼 여긴다. 그런 한편 용병 대장인 마이클은 팀 킬에 이어 자살까지 시도한다. 자신마저 파괴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술관료제와 영화 속 용병들의 차이는 197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의 생성과 변화에 상응한다. 필자는 용병들이 대안 우파’(Alt-Right)를 상징한다고 본다. 또 이들은 2010년대부터 실리콘밸리 기술자들에서 나타난 신반동주의’(Neo-Reaction)가속주의에 연결된다. 이 글은 대안 우파’ = ‘인터넷 우파’, ‘신반동주의’ = ‘기술자 대안 우파로 정의한다.

 

약 없는 도취’(Drugless High)

 

   실리콘밸리 이야기로 우회한다. 1960년대 대항문화는 1970년대 실리콘밸리, 컴퓨터 시대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기이한 테크놀로지SF소설에 대한 열광, 반체제 성향, 히피 공동체, 선불교와 인도 명상 체험, 그리고 LSD로 대표되는 <감각 확장> 경험을 대표적인 요소로 들 수 있다.

   스탠포드 컴퓨터 과학자들과 함께한 ‘LSD 실험이 있었다(1961~1965, ‘창의적 문제해결실험). 350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는데, 피험자 가운데는 몇 년 뒤 컴퓨터 마우스’(1968)를 세상에 내놓은 더글러스 엥겔바트가 있었고, 그의 조수인 스튜어트 브랜드가 있었다. 브랜드는 컴퓨터 마우스의 발명을 이렇게 회고한다.

 

마우스와 온라인 타이핑. 화면에서 다른 사람과 뭔가를 서로 마사지(massage)할 수 있다는 것인간 지성을 증강시키는 장치였다.”

 

낭만적인 (--) 감상적인 안티-컴퓨터.” 실리콘밸리 개척자들은 이 같은 낭만적 자유주의의 연장선에서 인간과 컴퓨터 상호작용을 개발했고, <감각 확장>의 관점에서 <기술을 통한 인간 해방>을 추구했다. 이때 나온 단어가 약 없는 도취. 말하자면 1970년 미국 정부가 1급 마약으로 지정한 LSD의 대체재로 컴퓨터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감각 확장, 인간 해방은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됐고, 현실 세계에서 관념 세계로 방향을 돌렸다. 이것은 연속적인 좌절의 결과였다. ‘감각의 문은 닫히고(1970 비틀즈 해체, 1971 <도어즈> 짐 모리슨 사망),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여기던 나라들(미국, 중국, 쿠바)에 실망한 청년들은 배낭을 메고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실리콘밸리 개척자들은 컴퓨터 사운드·영상 세계를 파고들었다. 이들은 마르쿠제처럼 에로스적 기술을 상상하고, 거기서 인간 해방을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개인의 해방으로 축소됐다. 그것은 <자궁 회귀적>이었다. 더는 사회적 대항문화가 아니었다.

 

2010년대 신반동주의

 

   2010년대 사정은 또 달라졌다. ‘실리콘밸리 = 자유주의(Liberal)’ 등식은 무너졌다. 대신 피터 틸, 일론 머스크 같은 ‘IT 전문가이자 거대 투자자의 상당수는 리버테리언(Libertarian = 공화주의)을 자처하고, 그 일부는 신반동주의, 가속주의를 지지한다. 이들은 개인의 해방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기술을 통한 사회 변혁>을 바란다.

   이들은 자유주의 진영의 <제도를 통한 사회변혁>이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자유를 축소하고, 전체주의적이라고 본다. 이들은 마지막 수단이자 유일한 수단으로 신기술에 희망을 건다. 이들은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것이 사회를 변혁할 것으로 기대한다.

 

 

피터 틸 사진

 

(피터 틸 사진, 출처 : 구글)

 

나는 더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오늘날 리버테리언의 큰 과제는 모든 형태의 정치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이제 세상에는 진정 자유로운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미지의 나라로 이끄는 새롭고,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과정이 탈출 방식에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유를 위한 새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술에 노력을 집중한 이유다” (피터 틸, 리버테리언의 교육, 2009. 강조는 인용자).

 

   신반동주의는 제도, 체제, 통합에 맞선다는 면에서는 대항문화와 통한다. 또 신기술을 통한 사회변혁을 바란다는 면에서는 마르쿠제와 통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 개념은 다르다. 피터 틸은 신기술로 창조하는 자유 공간으로 사이버공간, 우주공간, 해상도시(Sea-steading)를 예로 든다. 이것은 어떤 국가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공간이다.

   신반동주의는 사회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서로가 격리되어, 서로 간섭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 이것은 기존의 사회 개념을 사실상 해체한 것이다. 이 상호 격리, 상호 불간섭의 공간들은 가상·증강현실 기술로 유지될 수 있다. 이때 공간들은 게임 공간과 같아진다. 게임 공간(= 플랫폼)은 각자 독립적인 소우주, ‘사회를 구성한다.

 

[ 플랫폼 = 공간 = ‘사회’ ]

 

   플랫폼의 설계자를 플랫포머로 부른다. <바쿠라우>의 용병들은 보이지 않는 플랫포머의 지시를 받는다. 바꿔 말해 같은 플랫포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같은 플랫폼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공간, 다른 사회의 존재란 이야기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플랫폼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플랫폼들은 자궁 회귀가 아닌 <다형 도착적> 세계를 구성한다.

 

다른 공간, 다른 사회

 

   브라질 남부에서 온 바이커 남녀는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았다. 이 남녀가 다른 용병들과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이클: [바이커 남녀에게 말한다.] 이봐, 친구, 왜 이 사람들을 쐈지? ()

두 사람은 해선 안 될 일을 했어. 사람들을 죽였지, 자네들은 살인자

바이커() : 아뇨, 할 일을 한 거죠. 우리 임무를 도우려고요

용병(): 우리 임무라고?

 

   마이클이 외려 바이커 남녀를 살인자로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다. 용병 집단은 바이커 남녀가 속한 것과 다른 공간(=사회)에 있다. 그래서 용병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궤변이 나온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1999)의 네오가 총기 난사를 해도 실제 죽은 사람은 없는 것(으로 설정된 것)처럼.

   이 관점에서 용병들은 단순히 제국주의자라기보다, 가상공간으로 현실공간을 대체하는 신반동주의자로 볼 수 있다.

 

마이클: 자네들은 동포를 둘씩이나 죽였어.

엄밀히 말해서 우리들은 여기에 없는 존재들이야. ()

용병: 우리가 하는 일은 완전히 달라.

 

   마이클의 엄밀히 말해서’(technically)란 말은 이중적인 의미로 들린다. 문자 그대로 과학기술적으로란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용병들은 과학기술적으로 여기에 없는 존재들로 이해된다. 바이커와 같은 공간(= 플랫폼)에 속한 존재, 동포’(your own people)가 아니란 의미다(자막에서 동포민족개념을 함축하지만, 실제 대사는 당신네 쪽 사람들’ ‘당신 편 사람들정도의 의미다).

 

가속주의 = 타나토스

 

   플랫포머는 게임 공간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용병들은 플랫포머의 말을 듣는다. 거의 맹목적이다. 용병들은 플랫포머의 지시에 따라 바이커 남녀에게 총을 쏜다. 또 어린아이를 총격한 문제로 두 용병이 다투자 마이클은 플랫포머의 말을 전하며, 다툼을 종결시킨다. “방금 조슈아가 득점했네. 무장한 십 대를 죽였잖나.”

 

   한편 마이클은 팀 킬에 이어 자살을 시도한다. 이 장면은 실리콘밸리 대안우파의 또 다른 갈래인 가속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가속주의는 빨리, 모두 멸망하고 재출발하자는 생각이다. 이 생각의 전제는 어중간한 수정, 보완으로는 현재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외려 문제해결을 지연시킨다는 것. 또 인간은 극심한 파탄을 겪어야 재건의 의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파이트 클럽>(1999)의 말처럼.

 

   마이클이 물귀신처럼 시장 토니를 끌고 들어가는 모습(“나랑 약속했잖아. 토니!!”) 또한 가속주의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가속주의는 혼돈을 촉진하고, 멸망(파괴, 죽음)을 가속한다. 그야말로 타나토스의 사상이다.

 

   가속주의에는 좌파적 가속주의도 있고, 우파적 가속주의도 있지만, 어쨌거나 이들이 공유하는 생각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위해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확대해야한다는 것. 또 자본주의를 심화시키면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촉진해,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마이클이 나치란 단어에 과민 반응하는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마이클은 나치가 멍청하고 뻔한 말”(stupid cliché)이라고 깎아내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미국 사람이고, 자신을 나치로 부르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장면은 가속주의의 아버지닉 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랜드는 인터넷 경제신문인 <쿼츠>에 보낸 메일에서 자신을 나치로 부르는 것이 단순히 유치한 모욕이라고 말한다. 그가 볼 때 나치 파시즘은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이기 때문이다(대안우파와 실리콘밸리 테크노필을 뒷받침하는 신파시스트 철학, Quartz, 18/06/2017).

 

   신반동주의와 가속주의는 가깝다. 두 개념은 모두 <제도 이전의 욕망(=충동)>이 인간적이고, 선하다(좋다)고 본다. 그래서 대항문화와 마찬가지로 혼돈과 도취를 추구한다. 물론 대항문화가 에로스를 향한다면, 이들은 타나토스를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가령 용병 남녀가 자동차에 총을 난사한 뒤에 벌이는 성행위는 파괴 충동이 성욕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이 바라는 혼돈과 도취가 타나토스 쪽이란 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제도를 통한 사회변혁을 거부하는 반면 기술을 통한 사회변혁을 바란다(신반동주의는 상호 격리, 불간섭 공간의 창출, 가속주의는 기술을 통한 자본주의 무한 강화). 이들은 기술관료 체제와는 반대로 통합이 아닌 분열적 공간’, 또는 혼돈(자기 파괴)을 바란다.

 

   신반동주의와 가속주의는 플랫폼을 마련하고, 용병들을 끌어들인다. 영화 속 용병은 대안 우파의 상징이다. 대안우파의 상당수는 주변화(중심 위치에서 벗어남)의 불안감을 메꾸기 위해 권위적인 것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아내와 이혼한 용병은 묻지마 테러를 시도하고, 뜬금없이 주님을 들먹인다. 또 용병들이 매달리는 권위에는 하이-테크도 있다.

 

줄리아(용병) : 총이 왜 좋아졌냐고요? [베이비시터로] 뉴욕에 살 때 할아버지가 톰슨 총을 갖고 계셨어요.최첨단으로요 super high-tech. 그 기관총에 대해 물으니 하루는 그걸 꺼내셔서는 제 손에 쥐여 주셨어요. 그때부터죠.

 

   그런데 마이클이 자살을 시도하는 순간, 카르멜리타가 나타난다. 마을을 상징하는 영혼의 나타남. 문자 그대로 사이키(= 영혼) 델릭(= 출현)’이다. 영화는 이처럼 하이-테크로 무장한 집단과 사이키-델릭으로 무장한 바쿠라우 마을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병렬 세계, 다중 시점

 

   감각 확장의 관점에서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변화(사회 해방 개인 해방)와 대조적으로 바쿠라우의 사이키델릭 문화는 1960년대의 사회성을 되살린다. 사회성의 관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 일상 사회 -일상 세계 ]의 이륙이 개인적이냐, 공동체적이냐는 것.

   영화는 사이키델릭 문화가 마을 공동의례처럼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마을의 운명이 걸린 결전의 날, 또 마이클을 매장할 때). 이때 사이키델릭 의례는 바쿠라우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다. 달리 말해 바쿠라우는 사이키델릭 의례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성의 두 번째 관건은 [ -일상 세계 일상 사회 ]가 연착륙하느냐는 것. 사회성의 관점에선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영화는 일상 귀환을 단지 안정적으로 그릴 뿐 아니라, ‘-일상 세계의 경험을 현실과 병치(공존)시킨다.

   가령 장례식에서 테레자는 할머니의 관에서 물이 샘솟는 환상을 본다. ‘/ ’, ‘죽음 / 생명.’ 여기서 사이키델릭 감각 확장은 현실과 공존하며, 현실을 풍요롭게 만든다.

 

   영화는 이처럼 사이키델릭 세계 인식을 상투적인 환상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서의 병렬 세계, 다중 시점 전개로 표현한다. 예컨대 플리니우 집에 네 사람이 모여 앉아 도밍가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는 도밍가스 집에서 1인칭 시점을 보여준다. 네 사람의 대화, 도밍가스의 1인칭 시점, 화자(플리니우, 마달레나)의 모습, 그리고 도밍가스와 아내가 눈을 마주치는 모습이 이어진다. 동시적으로, 병렬적으로.

 

 

바쿠라우 스틸 이미지

 

 

   영화의 상당 부분은 이처럼 수평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으로 진행된다. 심지어 영화는 비인과적인 예지장면을 보여준다(도밍가스가 부상당한 용병의 모습을 미리보는 장면). 사이키델릭의 세계관은 이렇듯 평행세계로 나타난다.

   이 속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인물 성격이 일관성 있게 심화되지 않고, 인물 역할이 불규칙하게 단절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서사에 대한 몰입 또한 단절되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감독이 해석하는 사이키델릭 세계관의 반영으로 보인다.

 

   실제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 상당수가 주연급이다. 도밍가스 역을 맡은 소니아 브라가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마이클 역의 우도 키어를 비롯해, 할머니 카르멜리타 역의 리아 지 이타마라카시란다’(페르남부쿠 전통 음악·무용)의 전설적 명인이고, ‘룽가팀원으로 짧은 대사(“나도 배고파”)를 맡은 발미르 두 쿠쿠2018<아조그 나자레>히우(Rio) 지 자네이루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바쿠라우의 사이키델릭 세계관은 신반동주의 세계관과 다르다. 전자는 이질적인 세계를 오고가며 서로를 병존시키고 현실을 확장한다. 반면 후자는 상호 격리·불간섭 세계로서 현실과 병존하지도 못하고, 현실을 확장하지도 못한다. 진정한 다형 도착적 공간은 바쿠라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다형 성애공간과 함께 간다.

 

다형 성애

 

   바쿠라우는 성 표현이 다양한’(pan-sexual), 다형 성애 공간이다. 마르쿠제의 성 해방주제가 생활세계로 구현된 것 같다. 도입부의 물 트럭은 마을 어귀에서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사이좋게 사는 집을 지나간다. 이들은 트랜스젠더 여성과 두 명의 남성 배우자들이다. 이를 본 트럭 운전사는 말한다. “다들 저러면 얼마나 좋아.” 바쿠라우는 이른바 창녀, 타락자, 성도착자(도착 증상을 보이는 사람)’를 경멸하지 않는다.

 

   사이키델릭 세계관이 공간적 병치로 표현된다면, 다형 성애의 무드는 <시선의 교차, 만남>으로 표현된다. 파코치와 테레자, 도밍가스와 아내. 이들의 시선은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그 중간의 <중동태적>으로 합체하고, 더 큰 단위를 만들어낸다.

   앞서 에로스가 살아있는 실체를 더 큰 단위로 형성하고 개인들을 더 큰 단위로 연합시킨다는 마르쿠제의 말을 인용했다. 이 관점에서 바쿠라우의 에로스는 <비정형적인 유대>를 형성한다. 마치 다중 시점이 병행세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바쿠라우의 에로스는 시장 토니와 용병들이 보여주는 성욕의 <방출>과 다르다. 전자는 리비도(성 에너지)의 폭발이 아니라 리비도의 확장이다. 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난 리비도가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쿠라우는 미열의 에로스로 가득하다.

   반면 후자는 억제된 성욕을 제도의 지배 안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마르쿠제의 말처럼 제도 안에서 성욕을 해방하는 과정은 억압된 성욕을 폭발시킨다(에로스와 문명, 9). 시장 토니의 성매매는 자신을 능동태로, 여성을 수동태로 만들며, 가학적 폭력성을 보인다.

 

   이것은 바쿠라우 성매매 공간에서 성행위의 리듬, 빨강머리 동료의 손뼉 소리(“리듬이 훌륭하죠?”)가 마을 사람들의 군중 합창과 손뼉 소리, 카포에이라 몸짓, 타악기 연주와 연동하고, 확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감독이 이 장면을 존 카펜터의 일렉트로닉 음악 <>(Night, 2015)으로 발전시킨 것은 탁월하다).

 

혈연이 아닌 장소공동체

 

   에로스 공동체로서 바쿠라우는 다인종 공동체다. 어떤 사람은 바쿠라우에서 킬롱부를 연상한다. 역사적으로 킬롱부는 농장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만든 마을이다. 킬롱부는 토벌군에 맞서기 위해 무장 행동을 했고, 카포에이라 무술을 발전시켰다. 이런 저항의 공간이란 점에서 바쿠라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바쿠라우는 킬롱부가 아니다. 킬롱부 주민은 대부분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반면 바쿠라우는 현대 브라질처럼 여러 인종과 혼혈로 구성된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다. 인종 문제의 측면에서 킬롱부는 마을의 경계선이 곧 인종 문제의 경계선이다. 반면 바쿠라우는 인종 문제가 마을 내부에 들어와 있다.

 

   이 관점에서 바쿠라우를 다인종 마을로 설정한 것은 어떻게 하면 다인종이 조화롭게 공동체를 이루고 살 건가하는 미래적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영화가 그리는 바쿠라우가 다른 인종과 싸우는 저항의 공간일 뿐 아니라, 다인종이 평화 공존하는 미래적 유토피아란 것을 말한다.

   바이커 남녀가 마을 술집에 들어가 바쿠라우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바이커 : 여기 사람을 뭐라고 해요?

소년 : 사람요

 

   자막에서 사람젠치’(gente)를 옮긴 것이다. 젠치는 사람’(= people)도 의미하고, ‘우리’(= we)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소년의 말은 바쿠라우에는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이들이 곧 우리란 이야기다. 바쿠라우는 혈연(인종)이 아닌 장소(지역성) 공동체다. 또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우리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에로스적 유대다.

   바쿠라우의 에로스적 유대는 수평적(= 동시·병렬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 역사적)이다. 시간 속에서, 시간을 머금고, 신체에 축적돼 있다는 말이다. 수평적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수직적 에로스 또한 시선의 만남으로 나타난다.

 

   카르멜리타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교차한다. 장례식 차량 스크린, 도밍가스의 사진. 사람들은 할머니의 시선을 응시하며 각자의 신체와 기억에 새겨 넣는다. 시선은 <중동태적>으로 합체한다. 그리고 마이클 앞에 엽총을 든 마을 남자와 함께 나타난 할머니의 시선. 그 시선은 바쿠라우의 역사, 바쿠라우의 장소의 혼’(Genius Loci), 즉 바쿠라우의 시선이다. 이때 엽총을 든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더러운 놈. 내 땅에서 뭐하는 짓이야?”)은 그 남자의 말도, 할머니의 말도 아니다. 두 사람 모두의 말이다.

 

   수직적 에로스는 이처럼 공통 기억’(= ‘공동체적 기억’)공통 신체감각으로 계승되고, 내면화된다. 카포에이라 몸짓은 공통 신체감각에 상응하고, 마을 사람들의 추모 행위는 공통 기억과 연결된다. 수직적 에로스의 구심점은 역사박물관이다. 앞선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사물, 사진, 시선. 바쿠라우가 박물관을 중요하게, 크게 여기는 이유다.

   마을 사람들은 바이커 남녀에게 묻는다. “박물관 구경하러 왔어요? [박물관은] 멋져요.” “박물관 보러 왔어요? 왜 안 보시고.” 룽가가 침략자들의 목을 박물관 앞에 내던지고, DJ가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추모 행렬이 이어진다. 또 하나의 기억이 계승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자치’ (Township)

 

   에로스의 수평·수직 유대는 정동(affect)의 연쇄로 이어진다. 정동은 직접 느끼는 것이다. 생각하고 계산하기에 앞서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정동은 자발성과 연결된다. 암흑계를 떠나려 했던 파코치는 다시 총을 잡고, 지명 수배 중인 룽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로 돌아온다. 1960년대 정동이 담긴 노래 <마트라가를 위한 레퀴엠>(1966)에 이어 <수국 사이에서>(1958) 연주가 들린다. 음악은 파코치에서 룽가로 이어지는 정동의 연쇄와 공명하며, 이들의 결단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이 결단은 각자 마음에서 솟아나는 결단이고, 미의식과 연결된 결단이다. 이것은 분명 자기결정이다. 그러나 개인적 자기결정이 아닌 <공동체적 자기결정>이다. 이들의 신체와 기억에 새겨진 에로스의 유대에 조응하고, 정동의 연쇄에 조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로스 유대 정동 연쇄 공동체적 자기결정 ]

 

   ‘공동체적 자기결정은 곧 <공동체의 자치>를 말한다. 영화는 마을에서 행정기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장님도, 파출소도 없다(심지어 시장 토니를 처형한다). 바쿠라우가 자체 규율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소규모 공동체 자치는 오래된 미래.

   일찍이 알렉시 드 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민주 제도의 이상적 형태로 예찬한 것이 <타운십> 자치다(‘카운티보다 작은 행정 단위. 당시 타운십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신앙 공동체였다). 이 소공동체 자치는 미국 리버테리언(= 공화주의)의 뿌리이자, 오늘날 정치학자 상당수가 현대 정치의 딜레마를 넘어서는 해법으로 고민하는 주제다.

 

   여기서 딜레마는 리버럴(= 자유주의) / 리버테리언(= 공화주의)’의 문제다. 간략하게 말해보자. 리버럴은 개인의 자기결정주의를 옹호하고, 이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개입을 요청한다. 그런데 리버럴은 제도화 =법제화권리 획득에 치중하던 가운데 삶의 미학을 잃고, 경직된 시스템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대항하던 기술관료제 사고로 기우는 것이다. 이에 반발하는 흐름이 대안 우파, 신반동주의다.

 

   이 관점에서 <헌트>(2020)를 참조할 수 있다. 영화는 <바쿠라우>와 대조적으로 미국 리버럴 엘리트 집단이 우파 인터넷 활동가’(= 대안 우파)들을 인간 사냥하는 상황을 설정한다. 영화는 양쪽을 모두 비판, 풍자한다. 그런 가운데 리버럴을 차가운 엘리트로 묘사하는 한편, 공화주의자를 서민적이고 친근하지만, 어리숙한 사람들로 그린다.

   <바쿠라우>에서 용병 줄리아의 설정은 미국 리버럴이 대안 우파를 보는 시각과 통한다. 줄리아의 직업은 베이비시터였고, 농장 부부가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죠?”라고 묻자 몰라요. 저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별 생각 없이 행동하는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그런 반면 리버테리언은 공동체적 자기결정주의와 최소 국가를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날 공동체(중간집단)가 소멸한 현실에서 리버테리언은 극단적인 개인주의국가주의사이를 방황한다. 또 국가 개입을 줄이고 자율적인 시장원칙을 강조하던 가운데 냉혹한 시장원리주의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마이클 샌델을 비롯한 정치 사상가들이 공동체주의적 정의’, ‘공화주의적 자유주의를 고민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떤 단어를 조합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공동체는 이미 공동화됐다. 공동체는 새 정치의 출발점이라기보다 미래의 목표점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

 

   그래서 바쿠라우는 오래된 미래. 오래됐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형인 소공동체 자치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미래란 것은 지역 원로가 마을의 중심이 되어 비종교적인 에로스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이다(어떤 면에서는 아나키즘으로 보일 수 있다. 고전적 리버테리언과 아나키즘은 비슷한 면이 많다. 둘 다 국가를 부정하고 중간집단을 옹호했으니까).

   이 관점에서는 미국 리버테리언의 왜곡된 변종으로 보이는 용병 집단이 바쿠라우를 침공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용병들은 자신의 원형이자 미래가 될 수 있는 곳을 공격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영화는 진정한 웨스턴의 성격을 보여준다.

 

   필자는 웨스턴 영화의 핵심이 부조리한 세계타운십의 대결에 있다고 본다. ‘부조리한 세계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의 자기결정주의를 훼손하는 상황을 말한다.

   다만 바쿠라우는 19세기 미국 청교도가 아닌 다형 성애’, 교회가 아닌 역사박물관(공통 기억, 공통 감각)을 중심으로 한다. 바쿠라우는 또한 반사회적인(집단 간 격리, 불간섭) 가상공간 기술이 아닌 친사회적인 사이키델릭에 기초한 감각 확장공동체다.

 

   여기서 과학기술 / 사이키델릭(또는 영성주의)’의 대립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대립은 없다. 바쿠라우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인터넷과 태블릿 PC를 학교 수업에 활용한다. 또 마이클을 체포한 남자는 이어폰을 뺏어 착용한다. 바쿠라우는 과학기술에 우호적이다. 필자가 1960년대 대항문화 요소(‘감상적인 안티 컴퓨터’)를 강조한 이유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바쿠라우와 용병 집단은 1960년대 대항문화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둘 다 제도(언어, )에 앞선 욕망과 도취를 존중한다. 다만 한쪽은 에로스 쪽으로, 다른 한쪽은 타나토스 쪽으로 전개됐다. 물론 현실에서 문명사회가 실제 선택한 길은 타나토스의 길에 가깝다. 달리 말해 에로스를 억압한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의 억압이 위험하다는 점을 경고했다. 에로스가 약화되면 파괴 충동을 제어할 수 없다. 과학기술은 이 파괴 충동을 흡수하고, 이것은 삶의 소멸을 향해 작용한다(에로스와 문명, 4). 신반동주의와 가속주의를 예견한 대목이다.

 

   영화는 두 문명(에로스 / 타나토스)의 갈림길로 돌아가 서서 미래를 묻는다. 그리고 문명사회가 가지 않은 길’,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보자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할지 모른다. 곳곳에서 타나토스 과잉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문명의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

   이렇듯 영화는 오프닝 자막처럼 근()미래의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영화가 브라질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면서도 문명 차원에서 세계관의 충돌을 묘사하고, 미래적 대안을 모색한다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영화의 진수는 이 대안의 모색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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