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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오필리아> - 그린 셰익스피어, 그린 오필리아2021-07-23
오필리아 스틸 이미지

 

 

 

7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 오필리아> : '그린 셰익스피어, 그린 오필리아'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오필리아>(Ophelia, 2018)는 성()과 숲의 대비 속에서 전개되는 오필리아의 사랑, 성장, 변신을 그렸다. 영화는 리사 클라인이 지은 소설 오필리아(2006)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른데, 가령 숲속의 치료사 메틸드와 왕비 거트루드와 관련된 설정(나오미 왓츠의 12)을 그 위에 덧붙였다.

 

엘시노어 성, 생테밀리옹 수녀원

 

   서사 측면에서 영화는 숲을 중심에 놓고 [1 2]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성은 특정한 기호(언어) 체계로 규정되는 사회에 상응하는 반면, 숲은 이 같은 기호 체계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의 외부에 상응한다. 전반부 성1은 덴마크 엘시노어성이고, 후반부 성2는 프랑스 남서부의 중세 요새 도시인 생테밀리옹에 있는 수녀원이다.

   영화 자막은 생테밀리옹을 옮기지 않았지만, 실제 대사에서는 언급된다. 오필리아는 기도하는 햄릿을 발견한다. 클로디어스 왕과 폴로니어스(오필리아의 아버지)가 햄릿과 그녀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숨어 있는 상황이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선왕의 살인자가 클로디어스란 사실을 알려주자 햄릿은 복수를 결심하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생테밀리옹에는] 어머니가 살았던 수녀원이 있어. 거기라면 안전할 거야.”

There is a convent in St. Emilion where my mother lived as a girl.

You will be safe among the nuns.

 

   그리고 수녀원으로 가!”(Go to the nunnery!)라고 소리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같은 대사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당시 ‘nunnery’는 수녀원, 수녀사회를 뜻하는 한편 사창가를 뜻하는 속어였다. 폴로니어스가 햄릿이 미쳤다고 판단하는 결정적인 이유다(다른 장면에서 햄릿은 폴로니어스를 생선장수” fishmonger로 부른다. 생선장수는 당시 포주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폴로니어스가 딸을 이용하려는 심보를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햄릿>(“수녀원으로 가!”)을 재해석한다. 오필리아에게 모욕을 주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을 그녀의 안전 보호를 위한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테밀리옹에 있는 수녀원은 어떤 곳일까. 그것은 우르술라(St. Ursula) 수녀회로 짐작된다.

 

우르술라 수녀회 이미지

 

 

   우르술라 수녀회는 1620, 유럽 최초로 빈곤 계층의 소녀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생테밀리옹에 세워졌다. 영화가 이곳을 피신처로 설정한 맥락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여성 교육, 여성 기본권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여성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엘시노어, 감시 사회

 

   물론 수녀사회도 어쨌거나 하나의 사회다. 내부적으로 위계질서, 모순, 억압이 있으며, 외부적으로 또 다른 기관들과 위계질서 속에 있다는 말이다.

 

거트루드 : 암탉들이 서로 쪼아 대는 걸 본 적 있니?

오필리아 : 수녀들도 그래요?

 

   이처럼 엘시노어와 생테밀리옹, 즉 성1과 성2는 저마다 하나의 사회란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거트루드 왕비의 머리 장식과 수녀들의 두건(Coif) 장식은 모두 십자가의 변형으로 보이지만, 전자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데 비해 후자는 검소한 끈으로 만들어졌고, 백인/흑인, 왕비/수녀의 대립·차이를 보여준다.

   사실 엘시노어 사회는 전쟁 상황이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지독한 감시 사회다. 1978년 체코 프라하에서 공연된 <햄릿>(Vaclav Havel 연출)이 당시 체코 사회의 비밀경찰 체제에 대한 알레고리로 표현됐다는 사실은 이 점을 증명한다.

 

   엘시노어는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염탐한다. <햄릿>은 선왕의 유령과 연관된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으로 출발한다(이것은 남자들의 서약이다. 반면 영화에서는 오필리아가 비밀을 지키는 인물로 설정된다). 또 영화 속 왕비는 주인공이 궁전 외부에서 하는 행동을 안다(“평민 사내와 시골에서 노닥거린다며?”). 왕비도 정보망이 있다는 이야기다.

   <햄릿>에서 폴로니우스는 아들에게도 스파이를 딸려 보내 감시한다. 그는 또한 영화에서나 <햄릿>에서나 햄릿과 오필리아를 감시하고, 딸을 미끼로 이용한다. 그는 건전한 인물이 아니다. <햄릿>의 최초 판본(1603)에서 그의 이름은 코람비스’(=거미)였다.

   폴리니우스의 직책은 흔히 시종장’(Lord Chamberlain)으로 번역되는데, 오늘날 대통령 의전 비서관이나 청와대 행사기획 자문위원에 가까운 것 같다. 햄릿이 마련한 연극 공연이 문제를 일으키자 폴로니우스가 목이 달아날 것을 걱정하는 이유다.

 

오필리아 스틸이미지

 

 

 

   이처럼 삭막한 환경에 사는 주인공이 진짜 연결된 세계는 숲이다. 도입부 엘시노어로 이주한 주인공은 작은 식물 화분을 창가에 올려놓는다. 주인공은 식물과 함께 성장한다. 관객들은 이후에 성장한 주인공과 함께 창가 화분의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숲 끄트머리에서 놀았다. 그 뒤로 왕비 시녀로 지내면서도 숲, , 식물을 대피소’, 휴식 공간으로 향유하고, 자신을 강화하는 세계로 향유한다.

 

   한편 주인공에게 숲은 교육 공간이다. 그녀는 숲에 사는 메틸드로부터 은밀하게 식물학 지식을 전수받는다. 주인공이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죽음을 가장하는 의식을 치르게 해준 지식 또한 여기서 배운다. 그것이 은밀한 이유는 메틸드가 세상 사람들에게 마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처음 메틸드를 만날 때부터 그 지식을 비밀로 여겼다. “저도 [비밀을] 배우고 싶어요”(Could I learn such secrets?).

   그리고 숲은 통과의례 공간이다. 주인공은 죽음을 가장하는 의례를 거행하며 숲에서 거듭나고, 또 다른 성(=사회), 즉 생테밀리옹의 수녀원으로 간다. 이처럼 주인공이 진실로 연결된 세계=숲은 사회적 공간=성을 지배하는 기호로 규정되지 않는 공간이다.

 

오필리아 스틸이미지

 

 

   영화는 주인공과 숲의 연결성을 청록색옷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심지어 아버지 장례식에도 청록색 옷을 입는다. 이것은 주인공이 에코필리아(생태친화)의 삶을 근본 중심에 놓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햄릿>에서 폴로니우스는 주인공을 그린 걸이라고 불렀다(“You speak like a green girl”). 이때 그린 걸은 새파란 애송이, 철부지란 의미다. 주인공의 순수함을 깎아내리는 뉘앙스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린 걸이란 표현을 말 그대로, 에코필리아 성격을 표현하는 의상 색채로 옮겼다.

 

엘시노어: 에코포비아 공간

 

   반면 엘시노어 성은 인공성이 강하고, 에코포비아(생태혐오) 경향이 뚜렷한 공간이다. 에코필리아의 삶을 근본 중심에 놓고 사회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에코포비아의 삶을 중심에 놓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오필리아가] 보석이 아니라 꽃을 머리에 꽂은 거 봤어?”

흙바닥 dirt을 뒹구나 봐

흙냄새가 나더라”(She smells of garden soil).

 

   성에 있는 자연 환경으로는 정원, 과수원이 언급된다. 이들은 매우 인위적으로 조성한 환경이다. 흰 공작새가 복도를 돌아다니는 모습은 성의 인위성을 드러내주는 사례다. 성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흙을 꺼린다. 콜로니어스는 왕비에게 말한다. “저는 답답할 때면, 옥상에서 바람을 쐬죠.” 이들은 인위적인 환경에 갇혀있다. 오필리아와 대비된다.

   한편 왕비는 디아나(Diana) 여신을 그린 자수 작품을 만들게 한다. 여신의 모습은 왕비를 닮게 제작됐다. 하지만 디아나의 상징은 숲, , 정조(=비혼), 여성 공동체다. 이것은 왕비가 생활하는 인공적 환경의 삶과 거리가 멀다. 에코필리아로서 숲과 연계된 오필리아의 삶에 가깝다. 게다가 디아나의 여성 공동체는 주인공이 수녀원을 찾아가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영화는 성/숲의 대립을 보여준다. 그것은 에코포비아/에코필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한편, ‘윤곽이 분명함’ / ‘윤곽이 불분명함’(메틸드 집을 찾아가는 장면), ‘우뚝 솟음’ / 연속적임(덩굴이 우거진 공간, 동굴 같은 공간), 가식적임(클로디어스의 뻔뻔함) / ‘상처 유합’(메틸드의 내상), /어둠, 명랑·활발함 / 섬뜩함(uncanny)의 대비를 보여준다.

   여기에 덧붙여 외과·해부학 / (약용)식물학의 대비가 있다. 성에 사는 햄릿, 호레이쇼, 레어티즈는 대학에서 해부학을 배운 듯하다. 특히 호레이쇼는 무덤 시신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해부학 연구를 지속한다. 이처럼 엘리트 남성이 수행하는 외과·해부학 연구는 메틸드와 오필리아의 식물학 연구와 대비된다.

   전자가 대학에서 연구·교육하는 정식 과학인 데 비해 후자는 정상 과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또 전자가 보편적인 인체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반면, 후자는 지역에 고유한 식물과 생태종의 지식에 바탕을 둔다. 여기에는 보편지식 / 토착지식의 대비가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에코페미니즘의 의제와 연결된다.

 

오필리아 스틸이미지

 

 

오필리아, 에코페미니스트

 

   오필리아의 에코페미니스트 면모를 생각해보자. 오필리아는 톰보이로 성장하고(“개구쟁이 같으니”), ‘빨강 머리로 묘사되며, 결말부에서 인생의 주도권을 찾고, 진정한 결정(=포기)을 내린다(“잘 가요, 내 사랑”).

   또 전반부 주인공의 인간관계는 동시대적, 수평적이지만, 후반부 주인공은 여성의 역사(=스토리)를 인식하며 역사적, 수직적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주인공의 태도가 어머니와 닮았다는 사실(“네 어미를 꼭 닮았구나”), 메틸드가 마녀사냥을 당한 사연, 거트루드의 고뇌, 딸의 탄생과 성장을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뤼스 이리가레의 말처럼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인간과의] 사랑에서 느끼는 행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문제로 표현될 수 있다(식물의 사유: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8). 오필리아는 자연 속에 혼자 있을 때 행복했으나, 햄릿과의 관계에서 파란을 겪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딸과 함께 새로운 조화를 이룬다. 영화는 이 주제를 [조화 균열 조화]의 서사로 그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을 빨강 머리로 설정한 것은 빨강 머리가 인류의 2% 미만이란 희소성과 함께, 빨강 머리 여인이 정열적이거나 별나다’(?)는 상징성이 있고, 역사적으로 문제적 여성이 빨강 머리인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클레오파트라, 엘리자베스 여왕), 미술사에서 정열적이고 개성 있는 여성 인물을 빨강 머리로 묘사하는 경우가 빈번했음을 상기하자.

 

티치아노 <비너스>, 라파엘 전파

 

  티치아노의 <비너스>(Venus Rising from the Sea, Titian, 1520), 라파엘 전파, 특히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여성 인물(가령 La ghirlandata, Dante Gabriel Rossetti, 1873)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주인공을 빨강 머리로 설정한 것은 페미니스트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지닌 인물로 적합하다는 말이다.

 

오필리아의 지식

 

   햄릿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1502년에 세워진 이 대학은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고, 중세 스콜라신학을 벗어나 인문주의를 지향했다. 이 점에서 햄릿이 자유로운 사고의 지성인이고, 인문·철학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오필리아는 오빠에게서 책읽기를 배우고, 숲에서 배웠다. 또 왕비의 감성 교육을 받고, 메틸드의 약학, 식물학을 배웠다. 햄릿에 비해 비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럼에도 선왕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밝힌 것은 오필리아다. <햄릿>처럼 선왕의 유령이 비밀을 알려준 게 아니라, 자신의 식물학 지식으로 비밀을 알아냈다. 이처럼 주인공은 에코필리아적이면서도 탈-중세적이고, 과학 정신을 추구하는 인물 성격이다.

 

네 어미처럼 돌봐줬더니

내 아들이 내게 등 돌리게 만들어?”

 

   오필리아의 지식은 나비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무 것도 모르던 햄릿은 오필리아의 말을 듣고 복수를 다짐한다. 엘시노어 성을 피로 물들인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죽게 되고, 햄릿과 주인공의 사랑도 파국을 맞는다.

   햄릿의 15살 생일잔치에서 콜로니어스가 들었던 비유처럼 주인공의 지식이 순수’(=햄릿)를 죽인 걸까. 주인공은 사과’(=지식)로 햄릿을 유혹해, 어머니와 햄릿을 갈라놓은 이었을까. 하지만 어린 오필리아의 말처럼 지식은 죄가 없다(“[이 문제에 관해서] 사과는 아무 죄도 없는 걸요”). 잘못은 주인공의 지식이 아니라, 콜로니어스의 거짓된 행동에 있었다.

 

   콜로니어스도 식물학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지식을 어느 쪽으로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벨라도나, 헨베인, 만드레이크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가지 과에 속하며,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Kill and Cure) 식물로 알려져 있다. ‘이 될 수도 있고 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벨라도나는 동공을 확대하는 기능이 있어, 중세 시대에는 눈을 아름답게 만드는 용도로 쓰였다. ‘아름다운 여인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다. 하지만 로미오를 죽게 한 독약의 재료이기도 하다. 또 헨베인이란 이름은 암탉(Hen)을 죽이는 풀에서 유래했다. 위장 장애와 귓속 통증 치료에 사용됐지만, 독약으로도 작용한다. <햄릿>에서 선왕을 살해한 독이다. 그리고 만드레이크는 수면제, 불임 치료제로 쓰였다. 소설 오필리아는 주인공이 만드레이크로 죽음을 가장한 것으로 묘사한다. 만드레이크 또한 독극물이다.

 

 

반다나 시바 이미지

 

반다나 시바 사진 (출처: 경향신문)

 

 

여성의 토착지식과 생물 다양성 보존

 

   이로부터 사과는 죄가 없다는 말을 거듭 생각할 수 있다. 지식은 누가,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독극물인 만드레이크가 주인공을 거듭나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드레이크가 마녀를 상징하는 식물이었고, 식물학에 밝은 메틸드가 마녀로 여겨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은 당시 여성들이 쌓은 지식의 성격과 지위를 생각하게 한다.

   여성들은 근대과학의 여명기에 보편적인 과학 분야들 사이의 중간 영역에 속한 지식을 계승하고, 빈틈을 연결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다나 시바의 말처럼 생물 다양성을 개발하고 보존하는 그들의 역할은 여성의 노동과 지식의 다른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비노동, 비지식으로 여겨졌다(에코페미니즘, 11).

   앞서 말한 외과·해부학 / (약용)식물학의 대비를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의 지식은 과학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주인공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호레이쇼: 언젠가 치료사(healer)가 되고 싶어요.

오필리아: 치료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죠.

호레이쇼: 의사 [과학자] 말이에요(A doctor then, a man of science).

 

   반다나 시바의 말처럼 여성의 토착지식은 보편 과학을 비롯해 단일문화, 획일성, 동질성을 몰아붙이는 가부장적 진보 모델속에서 지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문제는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화에 대비되는 로컬’(다양성, 고유성)의 관점에서도 의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어, 위트

 

   영화의 페미니즘 요소로는 언어를 빠뜨릴 수 없다. 주인공은 위트를 통해 생각의 독립성을 표현한다. 주인공의 위트는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선다. 그것은 만약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논란이 될 수도 있을 법한 생각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폴로니어스: 보물을 닦는 건 여인들의 일입니다.

                   제 소임이 아니죠(and alas, I am no lady).

거트루드: 그 말도 맞군요(Alas indeed).

오필리아: 제가 계집이긴 하나, 그리 딱하게 보실 필요는 없어요.

               (I may be a lass, but there is no call for such alas-ing.)

               남자가 아닌 게 다행인 걸요.

 

   햄릿의 생일 축하연에서 나눈 대화다. 어린 오필리아는 얼라스’(Alas=아아: 슬픔·유감을 나타내는 소리)어 라스’(a lass=아가씨, 소녀)의 언어유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자신이 아가씨(여성)’란 사실이 아이고아이고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햄릿이 주인공에게 불쑥 나타나서 말을 걸자, 그녀는 유령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한다.

 

햄릿: 학교에서 인체를 부위별(his parts)로 해부했지만

        혼(his ghost)이 들어갈 자리는 없더군.

오필리아: 그렇다면 믿어야겠죠.

               전 [남자] 인체(the parts of men)에 대해선 모르니까요.

 

   햄릿은 인체 부위을 남성으로 지칭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남자 인체는 모른다고 말한다. 이것은 남성 중심 어법의 오류를 꼬집는 것이다. 가령 인류’(Man(kind))으로 지칭하는 것은 오류다. 남성만이 인류를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 마찬가지로 인체, 영혼을 남성으로 지칭한 것은 오류다. 남성만이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

   이 관점에서 주인공이 햄릿의 말을 믿겠다고 한 것은 중의적이다.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남자의 육체에는 영혼이 없다는 말을 믿겠다는 것. 다시 말해 남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믿겠다는 뜻이다. 오필리아는 이처럼 남성주의가 낳은 관례적 어법을 위트로 비판한다.

 

있거라, 아니면 기쁨이 사라질 터이니”(Stay or else my joys will die)

 

   주인공은 왕실 향연에 뛰어들어 미친 척하고, 노래를 부른다. 존 던의 시 <먼동이 틀 때>(Break of Day)에 후렴으로 들어가는 시 <가지 마세요>(Stay, O Sweet, 1612). 그 내용은 날이 밝자 떠나는 남자를 보내기 싫어하는 여자의 목소리다(이 관점에선 있거라보다 가지 마세요’ ‘머물러 주세요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노래는 사랑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남자를 안타까워하는 여자의 노래다.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의미가 깊다. 선왕은 거트루드를 외면하고 국무를 우선시했다. 그의 아들인 햄릿도 끝내 사랑보다 왕좌, 복수를 택했다. 메틸드는 거트루드의 욕망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거트루드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는 남편을 원한다는 것이다.

 

-언어 : 생각 표현

 

   주인공은 이 자리에서 꽃을 나눠준다. 그리고 꽃에 연관된 상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햄릿>에서는 레어티즈, 왕비, 왕에게 꽃을 주지만, 누구에게 무슨 꽃을 준다는 무대 지시는 없다. 영화는 왕비와 왕에게만 꽃을 나눠주며, 꽃의 의미를 재배열했다.

   먼저 왕비에게 로즈마리를 준다. 로즈마리는 향기가 오래 간다는 의미에서 기억을 상징한다.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뜻도 있고, 자신 또한 왕비를 잊지 않겠다는 뜻도 있을 듯하다. ‘팬지는 프랑스어 팡세(pensée=생각)의 영어식 발음과 같다. 그러니까 왕비에게 생각을 좀 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준 것 같다.

   ‘루타’(Rue)후회하다는 뜻이다. 왕비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주인공이 왕비에게 제비꽃을 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제비꽃은 신의를 뜻한다. 이때 제비꽃이 전부 시들었다는 주인공의 말은 엘시노어에서 더는 신의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다. 왕에게 신의 없음아첨을 상징하는 펜넬매발톱꽃을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데이지는 태양의 눈’(Day’s eye)을 상징한다. 꽃의 생김새도 그렇고, 발음도 그렇다. 주인공은 왕비에게 데이지를 준다. “모든 걸 꿰뚫어 보죠. [누군가] 왕비 전하를 지켜보고 있어요(All seeing. Someone sees you).” 이 말은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안다’ ‘선왕 죽음의 비밀을 안다는 의미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데이지가 모든 것을 본다는 발상에 주목하자. 이 발상은 생태주의 사고의 원형에 닿아있다. 밤길을 걷는데 달, 나무, 새가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섬뜩하다, 무섭다고 할 수 있는 이 감수성은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 공경하면서 두려워함)의 바탕이 되고, 바로 이 점에서 자연을 인간과 대등하게 여기고 아끼는 생각의 토대를 이룬다. 요컨대 인간이 보지 않더라도 계속 거기에 있으면서, 뭔가를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열린 감수성은 심층 생태주의의 원형이다.

 

   오필리아는 이처럼 꽃, 식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 표현 속에는 우호적인 감정도 있고, 날선 비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식물-언어를 통해 주인공은 인공적이고, 생태혐오적인 엘시노어 공간에 자연 환경과 자연 상징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에코페미니즘 퍼포먼스를 구현한 것이다.

 

<햄릿>의 렛비(Let Be) 세계관

 

   영화는 결말부에서 오필리아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햄릿>의 세계관과 비교해보면 두 세계관의 같고 다름이 분명해질 것 같다. <햄릿>의 경우는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의 갈등이 결국은 그냥 내버려 둬라”(Let (it) be)로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31장 햄릿은 광포한 운명의 돌팔매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인내하는 것이 고귀한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대항해 무장하고싸워 고통을 끝장내는 것이 고귀한지 고민한다. 이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란 독백이다. 이때 사느냐 / 죽느냐의 맥락을 고려하면 ‘[그대로] 있느냐 / [그대로] 있지 않느냐로 옮길 수 있다. 이 이항대립은 순응/저항, 수동/능동에 상응한다.

 

   그런데 52장 햄릿은 결투를 말리는 호레이쇼에게 그냥 그대로 놔둬라”(Let be)고 말한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각별한 섭리가 있는 법. 중요한 것은 각오다그냥 그대로 놔둬라.” (5.1)

   또 햄릿은 죽음을 앞두고 렛 잇 비’(Let it be)를 말한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나에게 시간이 있다면죽음의 사신이 매정하게 독촉하지만 않는다면,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그러나 그냥 두자.”

 

   ‘() ’(Let (it) be)는 그냥 마구잡이로 내버려둔다기보다 ‘[자연·섭리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통제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섭리)은 신경 쓰지 마라. (통제)할 수 있는 문제에만 집중하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의 세계관이다.

   이 관점에서 햄릿의 () 는 스토아 철학과 프로테스탄트의 종합이다. ‘섭리’(“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각별한 섭리가 있는 법”)를 인정하는 한편, 그 섭리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나로서는 내가 할 바를 다할 뿐이란 철학을 화해시킨 것이다.

   이것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과 통한다. 또 수동/능동의 관점에서 진인사가 능동적이고, ‘대천명이 수동적인 것처럼 햄릿의 () 는 수동과 능동의 중간 지대에 있는 세계관이다.

 

<오필리아> “가만 놔둬!”(Let her be!)

 

   클로디어스는 주인공의 헌화가에 분노하고, 주인공을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거트루드는 병사들에게 가만 놔둬!”(Let her be!)라고 외친다. 필자는 이것이 <오필리아>의 세계관을 한 마디로 얘기해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그녀답게 존재하도록 놔두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녀가 그녀답게 존재하게 하라. 그녀로 있게 하라, 그녀이도록 하라. 여기서 비(Be) 동사는 있음/없음, 존재/, ~/아님의 영역을 포괄한다. <햄릿>() 가 섭리를 향한다면, <오필리아>의 세계관은 자연-본성을 향한다. ‘그녀가 그녀답게 존재하도록 놔두는 것’(Let her be)(그녀)의 고유한 자연-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오프닝과 엔딩의 내레이션에서 나의 이야기’(my story)가 강조되는 것. 또 엔딩 내레이션에서 나의 길’ ‘나 자신이 강조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난 길(my way)을 잃지 않았어요.” “[복수심에 불타] 나 자신(myself)을 잃지도 않았어요.” 이것은 <Let her be>의 삶에 대한 회상이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수동/능동의 관점에서 그녀가 그녀로 있게 하는 것은 수동적 능동, 중동태’(Middle Voice)라고 볼 수 있다. 자연 본성을 따른다는 면에서는 수동적이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본성이 아닌) 나의 자연 본성만을 따르겠다고 각오한다는 면에서 능동적이고, 또 거기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어떤 불이익(역경)도 무릅쓴다는 면에서 능동적이다.

 

오필리아 스틸이미지

 

물의 죽음, 통과의례

 

   오필리아는 물에서 죽고, 거듭난다. 이것은 사회를 벗어나 있는 자연-세계와 통합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계기로 주인공은 엘시노어-사회와 결별하고, 전혀 다른 사회로 진입한다. 이 의식은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할 의식이란 의미에서 통과의례로 볼 수 있다. 통과의례는 차원 변환을 수반한다.

   오필리아의 차원 변환에서는 수련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앞서 수녀원으로 가!’ 장면에서 햄릿의 첫마디는 님프, 물은 어딨지?”였다. 햄릿은 주인공을 님프’(Nymph)로 불렀다. 수련(Nymphaea)은 님프의 꽃이다. 수련은 주인공 즉 님프의 차원 변환을 상징하는 꽃이다.

 

   상징 차원에서 주인공은 수련처럼 피부 호흡, 전신 호흡을 한다. 만드레이크의 효과로 가사 상태에 빠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호흡과 맥박이 거의 멎은 상태였을 것이다. 상징적 의미에서 주인공은 식물(인간)이 되고 식물화됐다. 말하자면 식물처럼 전신, 피부호흡을 했다.

   또 수련은 낮에 피고 열리고, 밤에 지고 닫힌다. 그야말로 삶/죽음, 활동/정지, 죽음/부활을 상징한다. 주인공이 죽고, 거듭나는 통과의례에 부합한다. 그리고 수련은 흙이 아닌 물에서 산다. 물은 유동적인 토대다. 이것은 주인공이 한 곳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흘러 움직이는 존재란 점에 상응한다.

 

오필리아 스틸이미지

 

 

잘 가요, 내 사랑

 

   햄릿은 끝내 왕좌와 복수를 선택한다. 이에 주인공은 아버지, 오빠, 연인을 뒤로하고, 먼 길을 떠났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결투 장소로 들어가는 햄릿과 평행선을 그리며 엘시노어 성을 걸어 나간다. 처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걷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단단한 표정으로 걷는다. 주인공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주인공이 복수심에 불타 길을 잃지도 않고, 자신을 잃지도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한편 거트루드와 메틸드는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을 디아나의 복수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순간, 두 여인은 전사였다. 필자는 여기서 마리아 미스의 논문 여성에게 조국이란 없다를 떠올린다. 여성들을 속이고 농락하는 사회를 여성들이 수호해야 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오필리아는 성2(생테밀리옹 수녀원)로 들어간다. 이곳의 생활이 성1(엘시노어)의 생활과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성1과 성2가 다를 뿐 아니라, 오필리아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자연-세계와 통합 의식을 겪었다. 주인공은 자연-세계의 관점에서, 자연-세계를 통해서 사회생활을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인간과의 사랑에서 느끼는 행복의 관계는 또 다른 단계를 맞게 된다. 자연 속에 혼자 있던 주인공은 이제 과의 사랑 안에서 둘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조화 균열 조화]의 서사가 마무리된다.

 

화자 오필리아

 

   <햄릿>철학자햄릿을 그렸다. 작품은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년문화를 담았고, 갈등의 핵심은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 있었다. 햄릿은 결정 장애를 겪는 인물이다. 매사에 완벽한 선택을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도 선택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때 렛 비’(Let be) 세계관은 걱정(생각) 과잉을 덜어주며 햄릿을 치유한다. 그것은 될 대로 되라는 게 아니라 (내가 어찌 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섭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그것(it)에 맡긴다.’는 세계관이었다.

 

   영화 <오필리아>는 에코페미니스트 오필리아를 그렸다. <햄릿>에 함축된 오필리아의 에코필리아와 여성주의 성격을 극대화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썼다. 영화에서 갈등은 <자연과 사랑의 괴리>에 있었다. 오필리아는 자연 속에 혼자 있을 때 행복했지만, 햄릿과 있을 때는 행복과 불행을 함께 겪는다. 이때 그녀가 그녀답게 존재하게 하라’(Let her be)의 세계관은 나(그녀)의 고유한 자연-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이 욕망(자연과 교류)의 관점에서 사랑(인간과 교류)을 생각하고, =세계의 관점에서 사회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오필리아의 에코페미니즘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오필리아>의 화자는 오필리아다. 이 점에서 내레이션이 나의 이야기란 말을 거듭하는 것은 과도한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햄릿>의 화자와 비교해보자. 어떤 면에서, <햄릿>의 화자는 호레이쇼다. 그는 <햄릿>의 주요 인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햄릿은 임종 직전에 호레이쇼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 달라”(tell my story)고 부탁한다. 작품 <햄릿>이 호레이쇼의 시점에서 묘사한 햄릿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영화는 이제 오필리아를 화자로 삼는다. 하지만 영화는 오필리아의 시점에서 바라본 햄릿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오필리아가 이야기하는, 오필리아 자신의 이야기다. 이는 곧 영화의 원작이 <햄릿>이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이 관점에서 영화가 나의 이야기란 말을 강조한 것은 오필리아가 자신의 삶=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 즉 주체란 의미다. 영화는 에코페미니즘 주체로서 오필리아의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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