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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이지훈의 시네필로

 

매월 개봉작들을 독특하고 풍성한 인문학적 시각으로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제시하며 재밌고 유익하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져보세요.

<화이트 온 화이트> - 타인의 고통2021-06-23
화이트 온 화이트 스틸 이미지

 

 

6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화이트 온 화이트>: '타인의 고통'

 

 

   테오 코르트 감독의 <화이트 온 화이트>(Blanco en Blanco, 2019)는 한 비인간적인 마을에서 사진작가 페드로가 타락해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 예술의 단면을 그렸다. 감독은 영화의 문제의식이 오래된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스페인 일간지 <엘 문도> 사진

 

(스페인 일간지 <엘 문도>(El Mundo, 30/07/2020)

 

  

   경사진 언덕 비탈에 원주민 시신이 큰대자로 누워있고, 병사들이 언덕 너머로 총을 겨누고 있다(원주민의 왼손은 활을 쥐고, 오른손은 화살을 쥐었다). 누가 봐도 연출된 모습이다. 원주민을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한 현장을 마치 대등한 교전이 있었던 것처럼 연출한 것이다. 문제는 누가, 왜 이런 연출을 했냐는 거다. 사진은 1886년 루마니아 출신 공학자인 줄리우스 포퍼가 티에라 델 푸에고를 탐사할 때의 모습이지만, 작가는 미상이다.

   감독은 이때 사진작가가 누구인지, 또 그는 이 살인 현장에서 결백한지를 묻는다. 대체 그 작가는 어떻게 해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영화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그 익명의 작가가 이런 사진을 찍게 된 연유를 상상적으로 추적하는 스토리텔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엔딩은 이 사진과 비슷한 장면으로 구성된다.

타인의 고통 책 이미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2003)

 

 

   필자는 여기서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2003)을 떠올린다. 책은 전쟁 사진의 도덕성을 묻는다. 이때 도덕성은 타인의 고통을 고려하는 태도이고, 이 관점에선 전쟁 사진 대부분이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무엇보다도 상업주의에서 찾는다. 현대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고, 전쟁 사진은 이 소비 행태에 부응한다는 말이다.

 

• 『타인의 고통

 

   전쟁 사진에 대한 미학적 주장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은폐한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전쟁 사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무정한 일이다. 또 전쟁 사진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경우는 상당수 연출된 것이다.

   아름답게 연출된 전쟁 사진은 피사체가 처한 고통과 현실에 가야 할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리게 만들고, 사진 작품에 관심을 쏟게 만들며, 사진의 기록이란 성격을 손상시킨다. 이처럼 아름답게 연출된 전쟁 사진은 선정주의와 상업주의의 결탁을 예술작품이란 명목으로 은폐할 뿐 아니라, 전쟁을 독려하기도 한다.

 

아름답게 나와야 해.”

 

   영화 엔딩 장면에서 페드로는 원주민 학살이 끝난 뒤, 그 현장을 아름다운’(?) 전쟁 사진으로 연출한다. 이때 사진이 아름답게 나와야 한다는 페드로의 말은 전쟁과 사진(작가)의 공모를 보여준다. 또 같은 맥락에서 손택이 다소 과장스럽게 이야기한 카메라와 총의 동일시’, 즉 피사체를 쏘는카메라와 인간을 쏘는총이 같다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영화는 타인의 고통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면 사진의 도덕적 둔감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서 손택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주목하는 문제는 미화(Beautifying)에 관한 것이다. 전쟁 사진에서 미화는 피사체가 처한 상황을 왜곡하는 것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람들의 도덕적인 반응이 굴절되게 만든다.

 

화이트 온 화이트 포스터 이미지

 

 

 

뭔가를 미화하는 것은 카메라의 고전적인 기능으로서, 이런 기능은 사진이 보여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반응을 하얗게 표백 bleach out 해버린다.”(타인의 고통)

 

   이 문장은 영화 제목과 맥락이 닿아 있다. 말하자면 화이트는 사진이 미화를 통해 현실을 왜곡하고 도덕적 반응을 제거(=표백)하는 효과를 상징한다. 어느 날 페드로 일행은 흰 눈이 원주민의 시신을 덮은 모습을 발견한다. 한 사람이 멋지군”(Beautiful)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신에서 귀를 잘라낸다. 이때 학살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 또는 미화는 흰 눈의 덮음’(=‘화이트 온 화이트’)으로 나타나며, 영화 제목을 거의 문자 그대로 표현한다.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아이> 사진

 

<독수리와 아이>(케빈 카터, 1993)

 

케빈 카터

 

   한편 전쟁 사진의 도덕성이란 문제에서 작가의 고충, 갈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독수리와 아이>(케빈 카터, 1993)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아프리카 수단에서 앙상하게 말라 굶어 죽을 것 같은 아이가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 있는데, 이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독수리가 바로 뒤쪽에 앉아 있다.

   분명 사진작가 카터에게는 단순한 상업주의보다, 수단의 참상을 알리겠다는 의도가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 해도, 독수리가 아이에게 덤벼들 것 같은 장면을 기다린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이처럼 상업주의자도, 폭력 예찬론자도 아닌 작가가 이런 끔찍한 선택을 하게 만든 동인은 뭘까.

   아무래도 심미적, 예술적 선택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독수리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를 노리는 극적인 장면,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구도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카터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이것은 선의의 작가도 예술적(심미적) 감성과 도덕적 기준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설치작품 <침묵의 소리>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 2006)

 

   칠레 출신 미술가 알프레도 야르(Alfredo Jaar)의 설치작품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 2006)는 이 문제를 다뤘다. 커다란 육면체의 외벽은 알루미늄으로 코팅했고, 한쪽 벽면에는 형광등을 부착해, 그 표면 전체가 스크린처럼 하얗게 빛난다. 육면체 내부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면 카터의 생애를 담은 텍스트와 함께 <독수리와 아이>가 영사된다.

 

알프레도 야르

 

   작품은 카터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작가로서 카터의 고통을 느끼게 해준다. 육면체 내부의 어두운 공간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작가의 내면적 고충을 상징한다. 그런 반면 육면체 외벽의 화이트는 외부에 드러난 겉모습(가령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진,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을 상징하고, ‘표백된 현실을 의미한다(야르는 또한 작품 <201151>(2011)에서 내용, 진상을 알 수 없는 것을 하얗게 표백된 이미지로 표현한다).

   야르의 말처럼 사진은 찍히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다. 사진에는 작가가 개입하고, 선택이 개입한다. 이는 곧 사진작가가 심미·예술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 사이에서 선택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의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다. 영화는 야르의 작품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영화는 손택이 제기한 전쟁 사진의 도덕성문제를 야르의 작품과 같이 사진작가에게 초점을 맞춰 구체화한다. 말하자면 심미성과 도덕성 사이에서 작가의 선택이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 영화는 표백의 의미를 시각화한다. 그 하나는 예술작품에 의한 도덕성의 표백’(손택)이고, 또 하나는 표백된 현실또는 진실의 표백’(야르)을 말한다.

   게다가 화이트 온 화이트에는 예술적 장치의 의미도 있다. ‘화이트 밸런스’(WB: 피사체의 흰색을 사진에서 진짜 흰색으로 표현해 주는 것) 이야기다. 사진 촬영에서 화이트 포인트의 선택은 다른 색상을 변형시킨다. 결말부 페드로가 어두운 밤, 풀덤불에 몸을 숨기고 원주민들을 관찰할 때, 한 원주민이 새하얀 깃털 분장을 하고 나타난다.

   이때 원주민 뒤쪽에 있는 풀덤불 또한 흰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이며, 원주민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흰색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두텁고 거대하게 만드는 반면 이 같은 화이트 포인트 설정을 통해 다른 피사체의 색상들을 변형시켰다. 그야말로 화이트 온 화이트를 실행한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성>

 

프란츠 카프카의 <>(1926)

 

 

카프카 <>

 

   영화의 서사 구조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1926)과 닮았다. 억압적인 환경과 명령이 개인의 무력함과 대비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맡은 과제의 성격과 조건을 모르고, 문제의 열쇠를 쥔 의뢰인과의 만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없이 연기되며, 주인공은 어느덧 자신이 속하게 된 시스템과 덧없는 투쟁을 이어간다. 그리고 모두가 그 시스템에 복종하지만, 시스템의 근원(성주, 포터 씨)은 비어있다.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소설의 첫 구절은 영화 오프닝 장면과 닮았다. 또 누구나 클람’(최고 관리, 권력 중심)을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클람을 알지 못한다는 상황, 그러면서 클람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순응하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는 거요”), 이에 따라 주인공이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상황(“이곳엔 클람이 너무 많아. 클람에게서 벗어나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려는 거야”)이 영화와 비슷하다.

 

여기서 떠나고 싶네.() 여기서 나가게 도와주게. 부탁이네.”

 

   이처럼 페드로는 호소한다. 그러나 K, 페드로도 끝내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소설도, 영화도 어떤 결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K와 마찬가지로 페드로는 포터 씨를 만나거나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는 듯 보이나, 실천은 거의 없다. 이들의 시도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그 미완성의 파편들은 성, 즉 시스템을 더 단단한 구조물로 남게 하는 것이다.

   <>과 마찬가지로 영화 인물들의 이름도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것 같다. 포터(Porter)의 어원은 ‘()문지기로서 최종 심급의 결정권자를 의미한다. 그의 예비신부 사라(Sara)의 어원은 공주이고, 아우로라(Aurora)새벽을 의미한다. 아우로라가 잘 차려입은 원주민 여자들을 데리고 다른 부락으로 들어가는 모습, 술에 취해 눈밭에 쓰러진 모습, 남자와 술 마시고 춤추며 뒤엉키는 모습에서 그녀는 아무래도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는 접대부이거나 매춘에 연관된 인물로 보인다.

   또 페드로(Pedro)의 어원은 , 바위이다. 타인의 고통, 즉 도덕성에 무감각한 성격에 어울린다. 그리고 존(John)의 어원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포터의 신정(神政) 체제에서 사도 역할을 하는 인물 성격에 부합한다.

   반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페드로에게 돈을 지급하는 현장 감독’(Capataz, ‘농장 관리인이란 뜻도 있다), 페드로와 영어로 대화하는 개발업자(Propietario, 건물주)에겐 이름이 없다. 이런 익명성은 앞서 말한 상징성과 함께 영화 성격을 좀 더 우화적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특정한 시공간을 넘어, 현재에도 적용되는 보편성을 강화한다.

 

줄리우스 포퍼(Julius Popper)

 

   실제 영화는 시공간을 특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장소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감독은 <엘 문도> 지에서 이 영화가 시대 영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재에 관심이 있고, “모든 식민지화의 배후에는 긴 살인 리스트가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현대 사회의 번영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감독이 칠레와 깊은 연고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감독이 말한 살인 리스트에는 마푸체 종족의 학살·차별과 피노체트 독재’(1974~1990)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줄리어스 포퍼 이미지

줄리우스 포퍼(julius popper, 1857.12.15~1893.6.5) 이미지

 

  

   하지만 영화 내용을 종합할 때 감독은 무엇보다도 셀크남학살을 표현한다. 또 바로 이 점에서 포터 씨의 모델은 줄리우스 포퍼로 볼 수 있다(이 글 첫머리에 감독이 포퍼의 1886년 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이 관점에서 영화가 셀크남, 포퍼를 어떻게 지칭하는지, 또 이들이 어떻게 시대 영화성격을 넘어 보편적 기호로 작동하는지 생각해보자.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는 1870년대부터 유럽 이민자와 해외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이 과정에 남부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원래 티에라 델 푸에고(영화 무대이자 남미 대륙 최남단)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곳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1879년 칠레가 이곳에서 황금을 발견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1881년 국경 분쟁의 결과로 티에라 델 푸에고의 오른쪽 절반을 아르헨티나가 차지하게 되고, 1884년부터 이곳은 유럽인의 골드러시로 들끓었다. 줄리우스 포퍼(1857~1893)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것도 이때다. 1886년 그는 기술자, 사진사를 포함한 대원들과 함께 이곳을 탐사하고, 이듬해 아르헨티나 정부와 재계의 지원을 받아, 사금을 캐는 회사를 세운다.

 

이 땅은 황무지네

 

   포퍼는 동쪽 해안 산 세바스티안만 근처에 인부들이 거주할 마을을 만들고 엘 파라모’(=황무지)란 이름을 붙인다. 포퍼는 이 마을에 자체적으로 경찰, 교도소, 군대를 편성하고, 화물 수송 철로를 건설하며, 금화와 우표도 발행한다. 말하자면 유사 국가를 세운 것이다. 포퍼를 티에라 델 푸에고의 마지막 왕으로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1892년부터 사금 채취량이 뚝 떨어지고, 이듬해 포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해된다. 그 뒤로 엘 파라모는 말 그대로 황무지가 되어 몰락한다. 영화의 무대는 이 시기의 엘 파라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포터 씨의 결혼식을 대신하는 파티에서 한 인물은 우린 이제 망했어. 다 망했다고. 너흰 전부 죽어도 싸!”라고 외친다.

 

셀크남 학살

 

   포퍼는 셀크남 학살에 책임이 있다. 셀크남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 그리고 황금을 찾아 몰려든 유럽인과 목장·농장주의 공조로 희생됐다. 영화가 고전 서부극분위기를 띠는 것도 이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황량한 자연 풍경도 비슷하고, 신생 독립국가에서 백인 이주민과 원주민의 대립, 그리고 새로운 국가·질서가 성립하는 사회상도 비슷하다.

 

우린 여기서 역사를 만들고 있으니까. 조국을 건설 중이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스틸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스틸 이미지

 

   영화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떠올리게 한다. “전설을 인쇄하라!(Print the Legend!)” 엔딩 장면, 신문사 편집장의 말이다. 전설(=픽션)사실로 통용된다면, 그 전설을 사실처럼 보도한다는 것. 영화 주제인 표백된 진실과 맥락이 닿았다. 신생 독립국가는 자신들을 위한 신화, 즉 영웅 서사를 필요로 했던 거다.

   셀크남은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노마드 생활을 했고, 구아나코 사냥을 했다. 문제는 유럽 이주민들이 양떼 목장을 시작하자, 셀크남이 양, 말의 사냥’(?)을 선호하게 됐다는 것. 포퍼의 기록을 보면 셀크남은 양, 말이 구아나코와 달리 사유재산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않았다).

 

구아나코 사냥 이미지

 

 

   “모든 동물은 구아나코다: 말은 큰 구아나코, 양은 작은 구아나코다”(1886년 티에라 델 푸에고 탐사). 하지만 셀크남의 이 공산주의적 경향이 인종청소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심지어 포퍼의 오른팔인 농장주 호세 메넨데스는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원주민의 신체 일부를 가져오면 돈을 지급했다.

   한편 살레시오 선교사(“계곡 건너 신부들”)는 셀크남의 문화적멸종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는 최종적으로 셀크남을 도슨 섬에 몰아넣고, 그 수용 시설의 운영을 선교사들에게 맡긴다. 덕분에 셀크남 상당수가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셀크남의 전통문화와 종교는 사라졌다.

   셀크남이 사라지면서 이들과 함께 살던 개들도 멸종했다. 이 지역의 개는 사냥을 돕지도 않고, 사람들을 보호해줄 만큼 강하거나 용맹하지도 않았다 한다. 그런데도 셀크남이 자신의 인구수보다 많은 개들과 함께 살았던 이유는 뭘까. 포퍼의 가설이 그럴 듯하다. 그것은 빈약한 천막과 옷을 보충하는 난로 역할을 했다는 거다.

   영화는 이 가설을 채용하며, 개발업자의 대사를 통해 이곳의 개를 이야기한다. “좋은 게 뭔지 알아? 얘들이랑 같이 지내면 돼. 따뜻하고 말이야. 정말 좋은 동물이지. 같이 외출도 하고 같이 잠도 자잖아.” 이들은 그야말로 삶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알레고리

 

   이처럼 영화는 셀크남과 포퍼를 직·간접적으로 지칭한다. 이제 이들이 어떻게 보편적 기호로 승화되는지 생각해보자. 영화는 포터 씨의 부재를 통해 체제의 근원은 부재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먼저 생각할 것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함축하듯, 아무리 엄격한 체제라도 그 체제 자체의 근거는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모두가 포터 씨의 명령에 따르지만, 그 명령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생존의 위협을 차치하면) 어째서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현대 사회가 절대시하는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합리성을 증명할 수 없고, 이 시스템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처럼 체제의 근원이 없는데도, 마치 근원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체제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런 체제에 순응하는 예술가를 그리며, 그 체제화가 자동기계화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도덕적 기준도 문제 삼지 않고, 체제의 외부도 생각하지(꿈꾸지) 않는다는 면에서 자동기계가 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같은 체제화는 지배자가 보이지 않는 지배다. 이에 대해 영화의 음향, 음악은 미니멀한 영상 이미지와 조응하며, 보이지 않는 지배를 청각적으로 표현한다. 가령 인간 사냥꾼들이 횃불을 들고 컴컴한 숲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각 요소는 몇 개의 횃불로 극소화된다. 횃불은 마치 도깨비불처럼 어른거리며 어둠 속을 가로지른다.

   이때 밤공기를 찢는 총소리와 함께 들리는 바이올린의 피치카토(손가락으로 현을 퉁기는 연주법) 연주는 유희를 즐기듯,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아무 생각 없이 살인하는 악마적 행위에 상응한다.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배’(=체제화)를 따르는 자동기계들의 행동과 정서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영화는 이 보이지 않는 지배가 작동하는 프로세스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한다. 여기서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宮台真司)의 생각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한 체제는 법, 언어, 손익관계를 통해 자동기계처럼(가령 포터 씨가 없어도) 작동한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범주를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이트 온 화이트 스틸이미지

 

 

, 언어, 손익관계

 

   먼저 법. 사람들의 행동 기준은 포터 씨에게 맞춰졌다. “포터 씨는 이곳의 전부네” “포터 씨의 생각은 어떤데? 포터 씨가 허가해줄까?” “[야만인들] 귀를 많이 잘라 포터 씨께 갖고 와. 포터 씨가 기뻐하실 거야.” 법은 무엇보다도 금지와 연관된 것이다. 포터 씨의 예비 신부에게 부적절한 연출을 하며 법을 어긴 페드로는 얼마 뒤 법의 심판을 받는다. “포터 씨가 인사 전하란다는 말과 함께.

   이 장면은 언어의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페드로는 엽총을 들고 찾아온 두 사람에게 얻어맞고 개새끼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엔딩 장면에서 페드로는 오히려 엽총을 든 사람들을 때리고 이런 개새끼라고 욕을 한다. 이것은 언어 측면에서 페드로가 체제화 됐다는 의미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거다. 영화는 아무 말이 없는 원주민 가이드와 페드로를 대비하며, 언어적 체제화를 보여준다.

   페드로가 사진을 연출하며 큰 소리를 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사진이 다른 사람들에게 효용성을 인정받았다는 말이다. 효용성은 손익 관계의 근본이다. 체제는 손실 또는 쓸모없는 것을 피하고, 이익 또는 쓸모 있는 것을 바라는 메커니즘으로 유지된다. 누구나 그 체제 속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결과로 체제가 유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우로라와 춤을 추던 개발업자는 페드로에게 쓸모 있는 사람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 방값, 밥값, 기여 이때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Always in the Way>(1902)이다. 가족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아이가 언제나 방해가 되는 존재’(=쓸모없는 사람)로만 여겨진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손익 관계는 교환 관계로 실현된다. 원주민의 귀와 농장주의 금화, 원주민의 노동력과 계곡 건너 신부들의 돈이 교환된다. 페드로도 사격술을 익히지만, 결국은 사진술에서 길을 찾는다. 엔딩에서는 사격술과 사진술이 호환된다. 아니, 사진술이 우위에 있다. 이곳에는 총잡이가 많아도 사진사는 없기 때문에 예술가가 나름대로의 권위, 권력, 이익을 얻는 것이다.

   적어도 이 마을의 경우, 체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개발업자는 자신이 자율적이라고 믿지만 페드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페드로가 체제화를 유일한 출로로 여기게 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체제화가 진짜 출로가 아니란 것을 안다. 영화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과 같은 출구 없음의 비관주의를 보여준다.

 

절대적 타자의 미학

 

   이처럼 영화는 셀크남, 포퍼, 페드로를 현대 사회 체제의 보편적 기호로 승화시킨다. 여기서 페드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영화는 심미성이 전부인 예술가가 무정한 광기의 예술가로 바뀌는 모습을 그렸다. 이 변화는 어쨌거나 자신(의 심미성)을 위해 창작하던 예술가가 체제(포터 씨, 생존)를 위해 창작하는 예술가로 바뀌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말해 체제화다.

   물론 영화는 이 체제화 때문에 착한 예술가가 나쁜 예술가로 변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제 심미성이 전부인 예술가는 사실상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미도덕적으로 둔감한 사람이며, 또 그런 점에서 잠재적으로 무정한 광기의 예술가이지 않을까. 예비 신부 촬영 장면과 학살 촬영 장면의 사이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연속성의 중심에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닫힌 미학 체계가 있다. 바꿔 말해 페드로는 이런 미학 체계를 가졌기 때문에 체제화를 쉽게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 닫힌 미학 체계에서 벗어나고, 체제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는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이 미학 체계의 귀결을 보여준다. 그것은 예술의 파국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영화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말부 한 원주민이 새하얀 깃털 분장을 하고 나타나는 장면이다. 페드로는 이 모습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 체계로는 전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존재는 페드로에게 절대적 타자였다.

   이때 만약 페드로가 그 알 수 없는 존재의 알 수 없음, 그 다름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했다면 어땠을까. 닫힌 미학 체계, 백인·유럽 중심의 자의식에 균열이 생기고, 자신을 둘러싼 체제의 외부를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새하얀 깃털 분장이 하인(Hain: 셀크남 성인식)에서 재탄생한 신생아를 상징하듯 페드로 또한 다른 예술가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페드로는 이내 체제화 사회로 되돌아왔고, 학살에 가담했다.

   어디까지나 현재에 관심이 있다는 감독의 말에는 이런 뜻도 있을 것 같다. 비록 감독은 페드로가 줄곧 폐쇄적인 미학 체계에 갇힌 모습을 그렸지만, 그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관객들에게 또 다른 미학을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존재를 향해 열린 미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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