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박인호의 시네뷰

모뉴먼트 밸리에서 신본까지 : 존 포드의 남성들2021-04-20
역마차 스틸 이미지

 

 

모뉴먼트 밸리에서 신본까지 : 존 포드의 남성들

박인호 영화평론가

 

 

1

 

   <역마차>(1939)를 통해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극의 새로운 풍경을 제시했을 때, 존 웨인이 거칠고 삐딱하지만 속내 깊은 서부의 사나이로 등장했을 때, 역마차가 광활한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면서 만들어내는 움직임을 통해 지평선이 확장되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어딘가를 향한 이들의 여정은 쉼 없는 갈등과 대립을 통해 서부가 자신만의 규율과 법칙을 지닌 세계임을 보여주었다. <황야의 결투>(1946)에서는 건축 중인 교회 사이로 저 멀리 홀로 존재하는 모뉴먼트 밸리가 보인다. 이제 막 새롭게 구축되는 공동체의 시작에서도 그곳은 서부의 상징적 장소이자 성스러운 곳이 되고, <수색자>(1956)의 그곳은 보다 더 직접적으로 존재한다. 열린 문 안에 자신을 드러낸 이곳을 배경으로 존 웨인이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모든 일을 마친 후에 잠시 안락한 가정에 머물다가 떠난다.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만의 고유한 지표가 됨과 동시에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사나이의 도착과 떠남을 지시하는 표지가 된다.

 

서부의 사나이는 이곳에서 약탈자의 침입을 받기도 하고, 공동체 내부의 무법을 교정하고자 내면적인 규율을 만들어내고, 가족을 짓밟은 인디언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십년 가까이 떠돌기도 한다. 아직 철도가 놓이기 이전, 동부와 서부의 완연히 다른 지형이 존재하는 모뉴먼트 밸리는 난폭한 악당들의 위협과 경계를 넘나들면서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들로부터 공동체의 신의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뽑아드는 사나이들의 추적과 복수가 공존하는 곳이다. 포드의 사나이들은 보안관, 과거의 범죄자, 카우보이, 개척자, 군인 등으로 신분이 바뀔지라도 이상적인 미국적 가치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간에서 일종의 제의를 치루면서 개척민의 정신을 찬양하고, 정의와 존엄이 유지되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즉, 포드의 서부극은 국가 공동체 내부의 가치를 담아내는 일종의 교육으로 기능함으로써 동시대 미국적 가치와 삶의 방향은 물론 이상적 국가관까지 확립시켰고 그 중심에 서부의 사나이들이 존재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스틸

 

2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는 존 포드와 존 웨인이 함께 만든 마지막 서부극이다.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사양길에 접어든 1930년대에 다시금 서부극을 부활시키면서 규범을 제시했던 존 포드의 서부극과 기차의 관계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변했다”라는 말과 더불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변화보다는 제시, 원형의 확립이 중요했던 고전적 서부극의 시기를 지나온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일궈왔던 그 토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부란 어떤 곳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서부라는 지형이 사라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홀연히 마을을 찾았다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이던 사나이들이 사라진 서부는 어떤 곳이 될 것인가.

   

기차의 도착과 더불어 영화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서부의 신화는 영화의 시작과 그 궤를 함께 했다. 존 포드가 이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포드는 장르와 동일시되는 자신의 정체성(‘나는 존 포드고 서부극을 만든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속적으로 역사로서의 서부에 관심을 가졌고 그 역사가 허구와 결합해서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도록 했으며 광대한 지평선이 불러오는 대지와 삶의 숨결, 경이로운 움직임을 스크린 안으로 불러들였다. 특히 존 웨인에게 서부의 사나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고 그가 수행하는 임무와 역할을 조금씩 변화시켜나갔다. 오랜 시기를 거쳐 포드와 웨인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신본이다.

 

이 영화는 포드의 전형적인 아이콘을 스스로 배반하는 이상한 서부극이다. 첫째, 보여주기보다 들려주기를 통해 중요한 극적 맥락을 만든다. 정갈한 실내극의 외관과 쉴 새 없이 오가는 대사는 서부의 지표를 애써 지우려는 듯 신문사와 식당의 주방에 머물면서 서부의 과거를 더듬고 진실을 고백하게 만든다. 하지만 진실은 신화보다 허약하여 이내 폐기된다. 마지막 서부의 사나이를 실내라는 공간과 회고담 안에 가두어둔 것은 아마도 톰(존 웨인)의 죽은 육신과 사라진 서부의 지평을 스스로 거두어들인 포드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또한 사나이들이 말을 타고 활약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부와 서부가 연결되는 시점에 이미 서부라는 신화적 토대는 힘을 잃었고, 사나이들은 자신의 기질보다 (사회와 법의)시스템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할 미래를 직감했을 것이다. 포드는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라는 악당을 쏜 영웅이자 성공한 정치인으로 살아왔던 신화적인 인물 랜스(제임스 스튜어트)의 회고담을 통해 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 목소리에서 벗어나는 지점이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 씬은 신본에 도착한 랜스가 실내에 머물 동안, 톰의 사랑을 받았으나 현재 랜스의 아내가 된 할리(베라 마일즈)가 허물어진 채로 방치된 톰의 집을 찾아갈 때다. 서부가 서부였을 당시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집에 톰과의 시간이 깃든 선인장 장미가 피어있다. 서부의 사나이가 살았던 황야의 외딴 집, 톰이 마지막 서부의 사나이라는 정체성을 버린 집, 스스로 허물어버린 집은 곧 톰의 육신이나 다를 바 없고, 이곳은 서부 최후의 장소처럼 보인다. 두 번째 씬은 할리의 마음을 알게 된 톰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를 때다. 랜스와 함께 서부에 도래한 문자화된 법전과 투표를 통한 민주주의는 서부만의 질서를 낙후된 것으로 만들었다. 오랜 시간 떠돌다가 이제야 정착하려는 꿈을 지녔던 톰은 이 당연한 변화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할리와 함께 살아갈 나날을 생각하며 지은 집과 그녀를 위해 심은 선인장 장미는 이제 버려져야 할 것들이다. 불을 지르는 톰의 얼굴 클로즈업은 일렁이는 램프의 그림자 때문에 더욱 지치고 노쇠해보인다. 이 두 씬을 통해 포드는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지나온 환경과 노정에 대해 탄식하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서부의 사나이를 애도한다.

 

둘째, 이 영화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지점에서도 기존의 서부극과 다르다. 법률의 수호자인 랜스는 리버티와 톰의 방식 모두를 반대한다. 그에게 이 사나이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행동과 신념의 토대는 서부의 법이기 때문이다. 악당 리버티는 큰 농장의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고용인일 뿐, 공동체를 유린하고 약탈하는 위협세력이 되지 못한다. 이미 자본과 효율성에 자신을 맡긴 무뢰한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톰은 지금까지 지탱해온 서부의 법으로 리버티를 제압하지만, 세 인물의 관계는 선과 악, 영웅과 적대자의 문제라기보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착하려는 자와 방해하려는 자에 가깝다. 서부의 사나이인 톰과 리버티의 차이점이 있다면 리버티는 끝까지 동부의 방식을 거부하면서 총을 들었고 톰은 제 집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셋째, 변화의 상태를 제시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우리는 인물들의 말을 통해 도시화된 신본에 대해서 듣게 되고, 깨끗한 소도시의 이미지를 통해 <역마차>나 <수색자>와는 다른 공동체를 보게 된다. 또한 인물들의 대립을 통하거나 그들이 믿는 서부의 법과 성문화된 법전이 지시하는 삶의 방식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포드 자신과 서부극이 어떻게 모뉴먼트 밸리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지 느낄 수 있다. 특히 첫 숏에서 신본을 향하는 기차는 서부라는 풍경으로 다가옴 보다는 서부로부터 멀어짐을, 이미 사라진 서부의 풍경을 되짚어 봄을, 동부와 서부가 이미 긴밀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서부의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신본의 변화를 통해 장르로서의 서부극과 포드 자신이 고전적인 서부극의 세계를 어떻게 회상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시원적인 풍경과 그 시대의 사라짐에 대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존 웨인은 스스로를 죽은 자의 상태로 만들어버렸거나 유폐되어 사라질 신화의 주검이 된다.

 

3

 

   포드의 서부극은 사막을 가는 도중에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남녀가 줄지어 입장하고 짝을 바꾸며 춤을 추고, 식사할 때 가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정경이 반복된다. 광활함의 풍경과 정다운 이 모습들이 불러일으키는 포드의 세계는 일종의 제의로 기능하면서 살아감의 근본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또 익스트림 롱 숏의 광대함과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빛나는 눈동자가 대비될 때의 감흥은 서부/동부, 야만/문명, 황무지/정원, 무법/질서, 악당/법의 수호자라는 이원적인 세계를 뛰어넘는다. 이를테면 <역마차>에는 마차 안과 바깥의 풍경, 버림받은 존재들과 고상한 사람들의 구역으로 드러나는 창의 이쪽과 저쪽의 빗장을 열어주는 아기의 탄생을 바라보는 사나이가 있다. <수색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사나이의 몸짓은 그가 곧 떠나갈 것을 알고 있는 우리의 바라봄을 허락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뒷모습조차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탄식과 회한은 닫힌 문으로 더 깊이 스며든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톰이 서부의 방식을 포기하는 장면을 통해 더 깊은 울림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서부의 집행자 위치를 내놓은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난폭한 행동을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해 땅을 뒹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얼룩진 옷, 휘청거리는 발걸음은 아마도 그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서부의 몸짓이 될 것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스틸

 

포드의 다른 어떤 서부극에서도 볼 수 없었던 노쇠한 늙은 사나이 존 웨인이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는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다.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 동부와 연결되는 개발을 약속받은 서부가 되기 위해 랜스는 리버티를 총으로 쏴서 죽여야 했고, 이상적 공동체인 서부가 무너짐을 견디지 못한 톰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했다. 톰은 <수색자>의 이산처럼 모뉴먼트 밸리를 떠돌다가 시원의 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사나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포드에게 위로를 받은 순간은 지나치게 소박한 나무 관 위에 놓인 선인장 장미를 멈춰 서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할 때다.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사나이의 관은 황야에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는 진실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약속이자 마지막으로 서부를 달리던 사나이가 지금 여기 누워있음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다음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남자들 : 니콜라스 레이의 남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