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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고다르의 60년대 <경멸> 2019-06-10
첨부파일고다르의 60년대_리뷰.png (238 KBytes)

 

경멸하는 불협화음들

김민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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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이상하다. 영화사 로고와 제목을 알리는 자막이 지나고 나면, 으레 그 시대의 관객들이 보아왔던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의 음성으로 그것을 전달함으로써, 자막이라는 가시적인 언어를 음성이라는 비가시적 언어로 치환해버린다. 프레임 안의 것들은 어떠한가. 후에 프란체스카’(조르지아 몰)로 소개될 여성이 걸어가고 그것을 찍고 있는 영화 제작진의 모습, 카메라가 관객을 향해 마주보면 그 다음 비로소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씬이 사실은 영화의 시작이 아닌 것처럼 기능한다. 영화 안에서 관객과 제작진 사이 암묵적으로 약속되는 어떤 것들을 고다르는 철저히 비틀어버린다. 이것은 단순히 클리셰 파괴 혹은 편견을 깨기 위한 치기 같은 것일까? 아니, 오히려 치밀하게 의도한 어떤 화음 같은 것은 아닐까? 마치 불협화음처럼 말이다. 고다르는 <경멸>(한국 개봉 명으로는 사랑과 경멸’)을 통해, 끊임없는 불협화음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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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불협화음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단어로써 불협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음악에서의 불협화음, 어울리지 않는 음을 뜻한다. 고다르는 이러한 불협화음의 성질을 영화화하려 한다. <경멸>은 오프닝부터 삐걱대는 불협화음을 알린다. 영화 곳곳에서 불협화음들이 등장한다. <경멸>에 등장하는 수많은 불협화음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언어의 불협화음이다. 프란체스카와 프로포쉬(잭 팰런스), (미셸 피콜리) 사이에서 교환되는 언어의 차이를 보라. 마치 공을 주고받듯이 프란체스카를 경유하는 언어는 반드시 화자가 의도한 바대로(주로 프로포쉬가 폴로 향하는 발화이지만) 해석되지 않음을 뜻한다. 영사실에서 프로포쉬가 프리츠 랑에게 화내는 씬에서 드러나는 불협화음은 또 어떤가. 분명 랑은 대본대로 영화를 찍었지만, 프로포쉬가 원하는 대로 영상이 찍히지 않는다. 대본()과 영화(영상)의 불협화음인 셈이다. 이것은 언어의 불일치와 동일한 성질을 가진다. 프리츠 랑은 자신의 언어(영화)로 프로포쉬의 언어(대본)와 부조화할 것을 선언한다. 언어뿐만이 아니다. 공간의 부조화는 어떠한가. 폴이 계단을 내려오는 프란체스카에게 화장실 위치를 묻는 씬에서 배치된 가구의 괴상함을 보라. 완전히 동떨어진 스타일의 가구들이 한데 우겨져 있는 모습은 불협화음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폴이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갈 때 들어가는 문을 대하는 태도의 이상함, 폴의 모자(영화 내내 단 한번만 벗는)와 마치 그리스인의 복식 같이 메어져있는 목욕 가운과의 불일치 등등, 그 외에도 <경멸>의 세계에는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불협화음의 세계에서 각자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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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협화음외에도 <경멸>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영화의 제목이기도한 경멸일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 간이든, 작품 밖의 어떤 것이든, 불협화음은 대상을 경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프닝 다음 씬을 살펴보자. 영화 끝까지 맥락화 되지 않는, 따로 뚝 떨어진 독립적인 씬이 뜬금없이 나오는 것도 그렇지만, 색의 변화야말로 고다르가 의도한 효과일 것이다. 씬 자체가 일종의 조롱 같기도 한데, 붉은색이던 화면은 까밀(브리짓 바르도)의 나체를 자세히 보여줄 때만 자신의 색을 되찾는다. 몸을 훑고 지나가면, 화면은 파란색으로 변한다. 이를 브리짓 바르도의 누드를 강요하던 제작자에게 보내는 고다르의 조롱이라면 억측인 것일까. 비록 영화 외적인 부분이지만, 고다르가 영화 제작자에게 보내는 경멸을 영화가 내재하고 있는 불협화음의 방식으로 완성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씬이 끝나면 오프닝에서 프란체스카가 걸어가고 있던 바로 그 장면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끊어진 테이프를 다시 잇는 것처럼, 무심히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 전술한 언어의 불협화음 역시 고스란히 인물간의 경멸의 감정에서 기인한다. 인물들(고다르를 포함하여)은 각자의 언어로 경멸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선언한다. 그 경멸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인물과 인물, 인물과 공간, 예술과 다른 예술 간의 불협화음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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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르는 영화 속의 자기 반영매체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으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말을 붙이지 않겠다.)들을 경멸하는 불협화음들을 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되묻게 만든다. 끊임없는 불협화음들은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에 기대하는 당연한 속성은 어김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관성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는 다시 말해 전통과 혁명, 논리와 비논리, 현실과 비현실, 자본과 예술 등 서로 조화되지 않을 것 같은 속성들로도 화음을 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영화의 바깥 형식을 부수지 않으면서도 영화 안의 형식을 부셔버리는, 양가적인 속성의 영화를 고다르가 아니라면 누가 가능하게 만들겠는가. 더욱 중요한 건, 단순히 내적 논리로써 예술적 이상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60년대의 고다르는 영화를 통해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을 설파하려는 것만 같다. 비록 자본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영화의 현실일지라도, 얼마든지 자본을 경멸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일종의 정치적 저항인 셈이다. 이는 자본에 맞서 누벨바그의 가치를 붙잡고 저항하려했던 그의 의지이자, 일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후에 더욱 노골적인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것도 <경멸>에서 보인 태도와 견주어 볼 때,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랑의 카메라를 두고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서로를 마주보았던 카메라는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영화가 인용하는 바쟁의 말처럼, 고다르의 카메라는 현실을 가리키는 창문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경멸하는 불협화음들은 적확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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