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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시대 '장 그레미용 감독론'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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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5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시대 2019.5.17.(금) - 6.4.(화)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장 그레미용 감독

 

김지연(부산영화평론가협회)

 

 

    삶에는 사랑이 있다. 장 그레미용의 영화 속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적어도 그들에게 사랑이란 상대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단 한 사람에게 머물러있지 않고 삶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또 다른 매혹을 찾아서 움직이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그 속에서 시기, 질투, 슬픔, 불안, 증오가 파생된다. 각자의 도덕률에 따라 편차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그들의 실천이란 매 순간 격렬하다. 마침내 파멸로 치달을지라도 그들은 멈추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산다. 거침없는 폭주자들을 수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리라. 그러니 그레미용의 영화에서 죽음이 등장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거둘 수 없는 나의 마음, 내 것이 될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레미용의 영화 속 사람들은 죽어야 끝낼 수 있다고, 그래야만 남은 자들이 어떻게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집행자와 구경꾼을 막론하고 죽음 이후에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은 결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못한다. <애욕>(1937)의 주인공은 마을을 홀로 도망쳐 나오고, <폭풍우>(1940)의 연인들은 헤어진다. <여름의 빛>(1943)<하얀 발톱>(1949)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맑고 거룩한 사람들은 새로운 짝이 되어 함께 떠나기도 한다.

  

    <창공은 당신의 것>(1944)만이 저 못 말릴 사람들이 분출하는 에너지가 긍정적인 결실을 맺은 사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죽음은 추정된, 그러나 상상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다. 엄밀히 말하면 테레즈(마들렌 르노)가 돌아왔으므로 죽음이 아니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최장거리 여성 비행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 데는 테레즈와 피에르(샤를 바넬) 내외가 비행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능을 보이는 딸의 피아노까지 처분할 만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남편의 뒷받침도 컸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해보자.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케케묵은 표현인 걸 알지만 그것 말고 다른 말을 찾을 길이 없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야무지게 살림을 꾸리고 부지런히 남편의 일을 돕는 테레즈, 그 좋아하던 비행을 딱 끊어버릴 만큼 아내의 말에 끔찍이 따르는 피에르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달성하는 영화에서는 드물게 결정적인 비행 장면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무게중심은 평범한 여인이 걷게 된 영웅적인 여정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 두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다. 점령기라는 제작여건을 감안하면 비행 장면은 아예 불가능한 스펙터클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편이 더 합당하고 사실에 가까운 추측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실관계가 어떠했든 나는 영화 안에서 근거를 찾고 싶다. 그렇다면 <창공은 당신의 것>의 후반부가 오매불망 아내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는 남편의 순정으로 가득하다는 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소박하고 단란한 가정, 가족구성원들이 그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사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당대 이데올로기를 가볍게 뛰어넘어 성 평등이라는 차원을 성취한다. 비시정권이 나폴레옹 법전을 보수적으로 강화한 가부장중심사회, 여성의 참정권이 확립되기도 전이었다는 설명을 굳이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사랑만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폭풍우>의 연인들은 대부분이 형사사건으로 마무리되는 그레미용의 대표작들 가운데 단연 우아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앙드레(장 가뱅)와 카트린(미셸 모르강) 연인 앞에 앙드레의 아내 이본(마들렌 르노)의 임종이 닥쳐온다. 카트린은 앙드레를 보내준다. 앙드레도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인 줄을 알면서 떠난다. 그러나 구조선의 선장인 그에게는 곧 구조요청 신호가 전달된다. 아내의 죽음이나 연인과의 이별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장면, 그는 폭풍우를 헤치며 전진하는 배의 갑판 위에 우뚝 서있다. 비를 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흠뻑 젖은 앙드레의 복잡한 표정, 아니 장 가뱅의 얼굴. 거기에 이 영화의 정수(精髓)가 있다. 위험을 무릅써가며 수많은 배들을 예인했고 그를 따르는 선원들을 책임져왔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의 삶을 구원하지는 못한 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험난한 파도와 거센 바람, 사방에서 쏟아지는 빗줄기와 칠흑 같은 어둠은 어지러운 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연인의 이별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해변, 흘러가는 구름이 빈 모래밭 위에 드리운 무상한 그림자를 보지 않았던가. 산책하기엔 바람이 너무 세고 파도가 사나운 날씨. 그에 괘념치 않는 건 두 사람뿐일 것이다. 그들이 주운 불가사리는 어젯밤 떨어진 별이 아닌 걸 모두가 안다. 카트린은 곧 지워질 앙드레의 이름을 모래밭에 써본다. 뒤이어 그들이 당도한 어둡고 빈 집, 거기에선 사람의 손길이 닿지않아 문마저도 말썽이다. 2층 계단을 올라오는 카트린은 어둠이 그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강한 콘트라스트, 사람들의 얼굴 위에 생겨나는 과감한 그림자들, 창이나 문을 강조해 언제나 인물들이 그곳에 갇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프레이밍은 <폭풍우> 뿐 아니라 <여름의 빛>에서도 어둠을 표현하는 강력한 장치가 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이후에 앙드레가 카트린을 다시 만나러 왔을 때에도 호텔은 정전으로 곧 캄캄해진다. 슬픈 미래를 끊임없이 암시하면서도 그레미용은 인물들의 마음에 감정이 스며들어 가는 과정을 차분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다.

 

    나치 점령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레미용의 대표작들은 그 시기에 주로 만들어졌다. 그가 부역자 노릇을 하며 노골적인 선전영화를 제작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비시정권의 서슬 아래서 저항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일련의 영화들 속에 드러나는 반사회적이고 오만하거나 괴팍한 귀족들의 행태, 비극적인 톤 정도가 어쩌면 당대 사회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그레미용의 입장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여름의 빛> 중후반부, 기관차가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댐 건설 장면 뒤에 이어지는 것은 귀족 파트리스(폴 베르나르)가 여는 가장무도회다. 그렇기에 두 계급을 비교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나 그레미용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유보하고 싶다. 그 대신 나는 영화가 별안간 댐 건설 현장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전환한 것처럼, 카메라가 그 장소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커다란 산을 깎아 곳곳에서 발파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산에 비하자면 턱없이 작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사를 이끌어나갈 어엿한 주인공들이다. 이글거리는 용광로 앞에는 제련에 한창인 손길이 있고, 지하 여기저기에서는 파이프를 연결하려는 용접 불꽃이 축제를 연상케도 한다. 오늘 하루도 성실하게, 그리고 무사히 일을 마친 노동자들은 수직 갱도를 오른다. 내일 또 같은 일을 하러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쇼트의 연쇄에서 느껴지는 노동자와 그들의 일터에 대해 품은 특별한 관심, 나는 그레미용의 태도가 그런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폭풍우>의 노동현장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있는데, 서사의 주요한 흐름에서는 비껴나 있지만, 구조신호를 받고 배에 복귀한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수행하는 몽타주를 살펴보자. 이때 카메라는 기계들이 가동되는 모양을 유심히 살펴본다. 구조작업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기계실의 부품들에 속도가 실리면서 빠르게 움직인다. 노동과 기계의 리드미컬한 순간을 목격하며, 우리는 영화가 그것들에게도 생명을 부여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노동자와 기계, 일터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시트론호()의 소리도 그 혐의를 더한다. 이 배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적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우우우웅, 그것은 꼭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사람들, 정확히 앙드레는 카트린의 방에서도 시트론호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부디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레미용은 시나리오가 지배하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자크 프레베르, 샤를르 스파크, 장 아누이. 그 역시 훌륭한 작가들과 일했다. 하지만 일련의 대표작들 가운데 어떤 영화도 멋진 대사가 홀로 돌출되지 않았고, 그레미용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 또한 꽉 짜인 서사구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얀 발톱>(1949)에서 결국 질투와 배신감에 눈 먼 케리아덱(폴 베르나르)의 손아귀에서 오데트(수지 들레르)가 죽어갈 때, 영화는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장면 대신 케리아덱의 팔에 감기는 신부의 베일을 보여준다. 또 그것을 냉혹하게 떨쳐내는 팔 동작, 베일이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공중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지는 감흥은 일종의 인상(印象)에 관한 것이다. 또 그것을 강화하는 것은 교차로 제시되던 결혼식 피로연의 춤과 노래, 음악소리다. 그것은 케리아덱이 오데트의 형()을 집행한 뒤 그에 맞춰 정확히 끝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리스(미셸 부케)가 오데트와 단둘이 만나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모리스의 어머니와 오데트가 들판에서 마주치는 장면을 대하면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검은 모자와 옷, 주술적 상징을 가진 염소의 등장은 마치 어머니를 마녀처럼 보이게도 하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또한 그 신비함을 강화하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가 반하게 하는 약초라오. 저는 그런 거 없어도 잘 반하던데요? 귀한 건가요? 이건가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모리스가 어머니와 공모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바위 뒤에 숨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장면 전체에 흐르는 이상하고 강렬한 에너지는 무엇인가. 그 장면이 왜 꿈인지 생시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것일까. 홀렸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사람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오데트여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할머니(모리스의 어머니)와의 만남에 신경 쓰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상상은 그것이 상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일러주었다. 어둡던 방에 갑자기 샹들리에가 떠오르고, 작업복이 순식간에 아름다운 드레스로 변해 춤을 추는 장면이 그렇다. 어쨌든 모리스는 어머니가 마련해준 기회를 이용해 오데트의 마음을 얻어내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홀린 것은, 홀려서 사랑에 빠져버렸으므로, 우리이기도 하지만 오데트가 될 수도 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미리부터 염려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레미용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지치지 않는 활력으로 그들을 좇는 카메라는 피사체들을 닮았는지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담하게 움직이고, 필요하면 물리적 제약마저 무시해버린다. 남편이 곁에 없이 혼자 죽고 싶지 않다고 탄식하는 여인을 유리창을 통과해 바라볼 때, 빗물로 흐릿해진 창에는 힘없는 여인의 얼굴이 담겨있다. 좋아하는 여인을 보려고 기웃거리다가 쫓겨나서 2층에 있는 여인에게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넬 때, 카메라는 그를 따라 함께 2층을 올려다본다. 1940년대 전후로 트레킹이나 틸팅이 귀한 기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미용의 영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에 유난히 활력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과 카메라 움직임에 동반된 감흥을 잊기 힘든 것은 왜일까. 빛과 어둠 사이, 이곳과 저곳으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가며 마음만 먹으면 카메라가 가닿지 못할 곳이란 없다는 듯 대담한 자신감으로 세계를 유유히 활보하는 그 움직임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언제나 사랑이 전부인 뜨거운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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