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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미국 인디의 전설: 존 카사베츠 & 짐 자무시 <오프닝 나이트> 20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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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디의 전설: 존 카사베츠 & 짐 자무시 2020.12.5.토~12.16.수 매주 월,화요일 상영없음

 

<오프닝 나이트> : 중첩, 중첩, 중첩, 마침내 표면

이광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오프닝 나이트>(1977)에서 즉각적으로 인지되고 계속해서 관심이 가는 것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배우를 주인공삼아 그가 참여하는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설정에 있다. 소녀 팬의 죽음으로 정신적 피폐함을 겪고 있는 머틀(지나 롤랜즈)을 따라가며 영화는 시종일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존 카사베츠의 인장이라고 부를 만한 다량의 클로즈업이 함께 들이닥치고 나면, 이 영화가 가장 매진하고 있는 영화적 문제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진다. 그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카사베츠의 클로즈업을 떠올려보자. 그의 클로즈업은 종종 배우들의 리얼리스틱한 몸짓을 포착하여 현실과 허구의 영역을 교란시키는 도구처럼 인식되고는 하는데, 단순히 그것이 현실과 허구라는 각자 세계의 불완전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는 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소한 유희보다 더 큰 목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클로즈업은 다른 감독들의 클로즈업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해답을 위해 최근 영화의 전당에서 진행된 '젊은 미국 작가 기획전'에 포함된 사프디 형제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뉴욕의 거리를 쏘다니는 인물의 얼굴을 포착하는 데 매진하는 그들의 클로즈업 말이다. 사프디 형제 또한 인물을 향한 클로즈업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 카사베츠의 적자처럼 여겨지고는 하지만, 그들의 영화가 거주지 없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지속적으로 거리를 횡단하는 움직임을 포착한다는 점만으로도 카사베츠와는 분명 다른 노선을 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프닝 나이트>는 거의 모든 장면이 실내로 이루어져 있는데, 흥미롭게도 머틀에게 큰 문제로 다가와 모든 사태를 발생시키는 소녀 팬의 죽음은 야외에서 촬영되었다. 도식적으로 말해 머틀에게 문제가 되는 삶/연기라는 이항은 곧 야외/실내라는 장소의 격차를 떠오르게 하고, 삶의 문제가 곧 (또 다른 삶이라 부를 만한) 픽션을 창조하는 이에게 영향을 주어 마침내 픽션을 물들이고야 마는 <오프닝 나이트>의 흐름은 충분히 영화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고찰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오프닝 나이트>에 수없이 놓인 클로즈업들은 한 인물을 가까이 관찰하여 그의 정체를 진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거리를 좁혀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정체가 규정되는 게 가능한 것인가, 라는 역설을 실행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은 아닐까? 극도로 감정적인 불안 상태에 있는 인물을 어떠한 카메라 워킹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달리 말하면 말 그대로 표면을 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면의 정체란 대체 무엇인 걸까. 아니, 그 표면이란 정말 화면에 담기기나 한 것일까.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 연기인지, 실제인지, 의도인지, 우연인지, 영화 속 누군가의 제스처가 배우에 의한 것인지, 캐릭터의 자질인지 측정 불가능한 단계로 변모되는 대혼란의 상황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카사베츠 영화 속에서의 클로즈업이란 실상 초현실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흔히 초현실주의라는 표현은 루이스 부뉴엘이 구사했던 독특하고 기괴한 이미지, 꿈과 현실의 대비 구조 등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러한 연상이 종종 초현실주의라는 개념을 (리얼리티와 반대되는) 전위적인 판타지로 오해하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초현실주의란 문자 그대로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에 근거를 두고 성립되는 세계이자, 구체적인 실체를 특정할 수 없는 세계를 일컫는 표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오프닝 나이트>에서 연극 속 인물인 버지니아, 버지니아를 연기해야 하는 머틀, 머틀을 연기해야 하는 영화 바깥의 지나 롤랜즈,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시도 때도 없이 교차되는 연극 무대와 그 바깥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떠올려보자. 이러한 중첩의 중첩의 중첩이 지속되며 형성해내는 분위기 속에서, 각각의 대상들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를 구분하는 작업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중첩의 쌍들이 만드는 하나의 세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모리스(존 카사베츠)와 머틀이 설전을 벌이는 마지막 공연 시퀀스는 이러한 중첩의 단계가 최고조에 달한 진풍경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오프닝 나이트>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보고 있는 저 남자가 과연 모리스인지, 존 카사베츠인지, 저 여자가 머틀인지, 지나 롤랜즈인지, 심지어 관객들의 뒤통수가 프레임에 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카메라의 위치는 화면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 미리 구성된 연극을 담은 실황 영상인지, 아니면 <오프닝 나이트>를 위해 엑스트라로 기용된 이들이 앉아 있는 가상의 연극 상황을 찍은 의도적 숏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비유컨대 풍선에 바람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다 결국 터져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공백의 상태를 상상하는 것. 하지만 그 공백은 풍선 자체가 없을 때의 공백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프닝 나이트>에서 수행되는 이러한 수많은 중첩의 연속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그 혼란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길 권한다. 그곳은 어떠한 인과율이나 상징, 비유도 없으며, 역사적 맥락마저 탈각된 상태로 존재하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세계, 제로 상태를 염원하는 표면의 세계다.

다만 이 모든 불안과 언행을 삼키고 있는 과포화의 상태는 언제나 공백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1988)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말을 빌려 언명한 대로, “이미지 가까이에는 무()가 머무르고 있으며, 이미지의 모든 역량을 무에 호소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다." 카사베츠가 <오프닝 나이트>에서 실행하는 것은 행동과 제스처 사이에서 퍼포먼스를, 말과 소리 사이에서 대사를, 감정과 무표정 사이에서 얼굴을 포착하며, 배역과 배우 사이에서 신체를 구성하면서 표면이라는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 세계를 가리켜 현실적인(real) 세계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진실한(real) 세계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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