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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아르헨티나 영화의 새로운 시대 <문과 창을 열어라> 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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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영화의 새로운 시대 2020.11.17.화~12.4.금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 더 밀고 나가는일에 대해’,

<문과 창을 열어라>

 

서은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여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 더 밀고 나가보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최근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마저 죽음으로 떠나보낸 세 자매, 마리아나와 소피아 그리고 비올라타. 그들은 현재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의 상태에 있다. 서로의 소통을 원하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이뤄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마리아나와 소피아는 만나기만하면 돈 타령이나 옷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기 일쑤고, 그런 언니들에게 결코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막내 비올라타는 홀연 집을 떠나버린다. 상처와 고통을 견디는 방식도 서로의 도움 없이 각개전투 격으로 진행된다. 마리아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개인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위로를 얻고, 소피아는 남몰래 차고 문을 열고 들어가 부모님의 유품을 만져보는 것으로 아픔을 달랜다. 비올라타 역시 서랍 깊숙이 숨겨 놓았던 죽은 엄마의 속옷을 입어보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한다.

   같은 아픔과 상실을 두 번이나 공유하고도 어떤 중심도 연대도 없는 그들은 마치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영화의 공간과 유사한 모습이다. 단절적이면서 파편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영화의 공간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라. 세 자매가 집에서 상념에 빠지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대부분인 영화는 부분적이고 국지화된 공간을 이어 붙인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전반적인 배경을 보여줄 수 있는 설정쇼트가 부재함에 따라 공간에 대한 전체적인 조감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통일적이고 입체적인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일반적인 영화들에서처럼 공간에 대한 원근감의 깊이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스크린 내에 중심을 차지하며 들어앉을 수가 없다. 어느 한순간도 허구적 중심을 내장하지 않는 파편적인 공간 구성 방식으로 인해 가뜩이나 상실로 휑한 공간은 더 심한 정도의 텅 빈 장소가 돼버렸으니 말이다.

   여기에 인물들의 무의미한 행위들로 인해 중심 플롯이 무효화되는 방식이 영화의 공백감을 한층 더 강화한다. 할머니를 상실한 세 자매는 얼마간의 낙담 속에 묵묵히 견디기만 할 뿐 뚜렷한 의도도 더 나은 성취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인물들은 할 일 없이 집안을 어슬렁거리거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등의 평범한 일상을 흘려보내고 있다. 따라서 목적 없는 대화는 부스러기처럼 흩어지고, 인물들의 행위는 완결된 목적이나 충일한 지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문과 창을 열어라>(2011)는 거의 모든 면에서 특별한 내용도 중심도 없는 공백의 영화, 말하자면 텅 빈 장소의 영화다.

   한 가지 고무적인 점은 그 텅 빈 장소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다른 새로운 체험의 공간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소멸이 아니라 창조다. 이 영화는 끝이자 동시에 새로운 시작, 소멸이자 창조인 그 미묘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 장소는 결코 조화롭거나 동질적인 것이 못 된다. 이 영화에 쓰인, 그러니까 하나의 중심을 향해 가지런하게 모이지 못하는 이질적인 미적 형식들이 동질성을 막아서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화면을 은근히 흔드는 장면이 바로 한 가지 경향으로 동질화되는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대표적인 경우다. 그 결과 현실이 가공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노골화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의 중심으로 굳어지거나 절대적인 차원으로 재현될 수 없는 순수한 현실의 민낯이 불쑥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는 객관적인 시점과 주관적인 시점을 혼재시키고 겹쳐지게 하는 패닝 쇼트도 한 몫 거든다. 특히 소피아가 오랜만에 집 나간 비올라타와 통화하는 장면에서 이질적인 두 시선을 연결하고 병합하는 패닝의 방식은 공간의 중심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제 3의 시선을 발현시킨다. 분리될 수 없는 두 시선이 동시에 수행되는 배치의 한 사례가 된 카메라의 그 변증법적 시선은 카메라의 시점과 등장인물의 시점 간의 이질적이면서도 분리 불가능한 성격이 고스란히 노출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카메라의 시점이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를 느끼도록,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이 관객의 의식 안에서 주제화되는 방식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 결과 상실 이후 병든 인물, 즉 소피아와 우리는 두 개의 확연히 구별된 주체로 등장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물든다. 두 시점 간의 명확한 경계의 혼란이 어떤 시적이고도 서정적인 미적 효과를 낳아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객관적인 카메라의 시점이 인물들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대체되는 순간, 주관적 시선의 대상이었던 소피아 방안의 물건들은 불현 듯 누구의 특권적 시선으로 규정될 수 없는,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현실인 사물이 된다. ‘물건사물이 된 그 후 모든 것이 변한다. 입고 있던 옷가지를 몽땅 벗어 의도적으로 맨몸을 만들고, 집착하던 물건들이었던 부모님의 유품들을 하나둘씩 내다 버리는 소피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파편적 공간구성과 무효화된 플롯, 그리고 핸드헬드 촬영 및 이질적 시점을 중첩시키는 패닝, 이른바 중심을 해체하는 이 영화의 미적 형식은 고전적인 쇼트 및 리버스 쇼트로서의 봉합을 유예하고 좌절시킨다. 이제 현실은 전형적인 봉합의 방식으로는 결정되거나 규정될 수도 없는 순수하고도 모호한 제 얼굴을 되찾기에 바쁘다. 그 얼굴은 봉합이라는 기존 관계의 문과 창을 열어야만 접속 가능한 새로운 장소다. 바로 그 곳이 상실 이후 고립된 세 자매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을 자리다. 밀라그로스 무멘탈러는 이질적인 미적 형식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인물들과 함께 동여매져 있으면서 동시에 인물과 함께 아픈 존재가 되도록 하는, 말하자면 새로운 소통의 관계를 창안하고 있다. 그곳은 마치 세 자매가 유일하게 교감할 수 있었던 음악이 흐르던 할머니의 오래된 방처럼, 철저히 고립된 가운데서도 새로운 형성과 창조, 그리고 연대가 가능한 공간이다.

   진정한 소통, 곧 새로운 차원의 동질성과 공통성을 획득할 수 있을 방법은 기존의 봉합을 상실하고 단절하는 쪽에 있다. 그렇다면 상실은, 단절은 다시 원점에서 사유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상실과 단절 이후 부서지고 고립되는 파편들을 오히려 새로 짜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의 원천으로 보자는 말. 말하자면 이 영화 인물들의 경우처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조금만 더 밀고 나가는 일에 대한 사유를 해보자는 전언. 아무래도 상실과 단절은 이질적인 파편들이 겹치고 포개짐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접속해내는 이 영화의 미적 형식들과 같이 이미 한 차원 높은 결속을 향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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