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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젊은 미국 작가들 <레이디 버드> 20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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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젊은 미국 작가들 2020.9.29.(화)~10.11.(일)

 

 

<레이디 버드> :떠나오면 비로소 그리운 것들

 

서은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떠나오면 비로소 그리운 것들이 있다. 평생 지나다니던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거리, 정든 가게 및 건물들, 끊이지 않던 엄마의 잔소리, 연애나 뮤지컬 연습 빼고는 딱히 흥미가 없던 학교생활 등등. 돌아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열여덟 살 크리스틴에겐 전부 갑갑하고 지겹기만 하다.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란 닉네임을 지어 붙여 쓰고 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었던 질풍노도의 시절, 틀에 박힌 생각이나 정해진 삶에 대한 강요 따윈 일단 거부하고 보는 크리스틴에게 있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곧이곧대로 쓴다는 건 일종의 구속이다. 크리스틴은 할 수만 있다면 삶을 더 오롯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레이디 버드란 이름은 바로 그런 남다른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의 표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의지는 곧잘 무너지고 열정은 매번 현실에 부딪힌다. 출마가 취미인 학생회장 선거에선 나가는 족족 고배를 마시고, 뮤지컬 오디션에선 주인공이 아닌 있으나마나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 또 이어지는 두 차례의 절절한 연애에서조차도 의도치 않은 비극적 파국을 맞는다. 특별한 능력도 이렇다 할 재주도 없어서일까. 아니면 오직 대책 없이 끓어 넘치는 열정만이 가진 전부라서 그럴까. 엄마와 대학 진학에 대한 맹렬한 설전 끝에 달리던 차 밖으로 뛰어내려 버리거나, 고답적이고도 지루한 강의로 일관하는 성교육 강사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측면으로 볼 때도 크리스틴은 분명 강렬한 열정과 용단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도되는 도전과 노력들은 넘치는 의욕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다만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크리스틴에겐 어떤 포기도 좌절도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역시 크리스틴이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결과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행위 그 자체를 더 의미 있고 중요하게 여기는 열정적인 사람이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비록 한 번 더 노력하고 한 번 더 실패한다 할지라도, 오직 한 번 더 꿈꾸고 한 번 더 달라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어차피 우리의 삶은 결코 온전하게 완성되지 못한 형상의 레이디 버드’, 즉 마치 여자의 몸에 어정쩡하게 붙은 새의 머리처럼 꿈과 현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중적 짝패로 엉겨 붙어 있는, 이른바 모순과 혼란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라는 괴물처럼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자라나던 기괴스러운 한 때를, 숱한 도전들의 이면에 그와 꼭 같은 양으로 점철된 실패들이 가득한 일대 혼란의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어둡지 않은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어떠한 중심으로 귀결되지도 않고 가지런하게 질서 지우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다단한 크리스틴의 열여덟은 그레타 거윅 특유의 경쾌한 톤과 감각적 터치로 밝고도 유머러스하게 다시 그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레이디 버드>(2018)는 도전과 실패가, 웃음과 눈물이 한 데 헝클어져 엮이고 얼룩져진 시절에 대한 한 편의 유쾌한 스케치다.

   더구나 모든 도전이 다 실패했느냐 하면 그건 또 역시 아니다. 딱 하나 성공한 게 있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원래 새크라멘토를 떠나 문화와 문학의 도시인 뉴욕으로 대학을 가고 싶어 했다. 진학을 위한 뉴욕행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유일한 출구였다. 하지만 원체 꿈과 현실은 지독한 상극인지, 이번에도 내 편이 아니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대뜸 꿈을 가로 막고 만다. 크리스틴은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재능도 없고, 성적도 썩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엄마가 경제적인 형편까지 덧붙이며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는 갑자기 실직을 하고, 명문대를 나온 오빠는 몇 년째 취업을 못한 사정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리스틴이 좌절할 리 만무하다. 영화는 달리는 차 안에서 집 근처 주립대 진학을 권하는 엄마와 먼 뉴욕행을 원하는 크리스틴이 이판사판의 승강이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급기야 달리는 차에서 크리스틴이 뛰어내려서 설전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둘의 대립각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더 벌어져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긋는다. 물론 결국 크리스틴은 아빠의 조력으로 뉴욕행에 가까스로 성공하긴 한다. 여기서도 비현실적인 몽상가인 크리스틴과 그에 각을 세우는 현실적인 살림꾼인 엄마, 이 한 쌍은 일종의 레이디 버드같은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여자의 몸에 생뚱맞게 붙어 있는 새의 머리, 혹은 그 반대의 형상처럼 엄마와 크리스틴, 즉 현실과 꿈은 서로의 영역을 확고히 주장하며 대치 중이다. 그러니까 <레이디 버드>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두 영역 간의 대립과 설전의 양상을 구조로 하고 있는 영화이다.

   사실 누구나에게 열여덟은 레이디 버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자도 새도 아닌, 아니 여자이면서 동시에 새인,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시절을 우리 누구나 힘겹게 거쳐 오질 않았을까. 아니 아직도 우리 모두의 가슴 한 편엔, 여자의 몸에 난 새의 머리 혹은 그 반대 모습인 레이디 버드라는 괴물 하나 꽁꽁 묻어 두고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이 영화는 열여덟 살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사실은 꿈과 현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열정과 변덕이 뒤죽박죽 뒤끓으며,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오는가 하면 쾌락과 고통이 수시로 자리바꿈하곤 하는 혼돈의 격전장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레타 거윅은 그렇게 단적으로 뭐라 규정지을 수 없는 제 3의 그 무엇, 모호함의 시선으로 삶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그러한 혼돈과 갈등의 때엔 늘 있던 주변과 일상도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모든 것을 떠나온 공간인 뉴욕에 가서야 비로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크리스틴의 마지막 멍한 눈이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 눈엔 어떤 두려움도 모른 채 갖은 도전과 열정을 기울여 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깊은 통찰이 들어 있는 것만 같다. 혹은 하염없이 시도하고 노력하는 행위 그 자체로 밀어붙인 끝에 불현듯 틈입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 같은 것이 담겨져 있는 듯도 하다. 모름지기 진정한 소통은 모든 것을 떠나온 바로 그 초월의 눈으로만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마지막 장면에서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새크라멘토 거리를 처음 운전할 때 젖어 들었던 감상이 자신의 것과 같았는지를 물어봤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 감상과 느낌들은 혼돈과 갈등 속에 매몰된 시선만으로는 도저히 감지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려놓아야 그제서 보이는 것들, 말하자면 떠나와야만 비로소 그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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