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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 리뷰

모리스 피알라 특별전 '모리스 피알라' 감독론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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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피알라 특별전 2020.01.28. 화 ~ 02.09. 일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모리스 피알라 감독론 : 리얼리즘의 연금술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리얼리즘은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이야기되지만 그만큼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할 단어다. 모리스 피알라는 196844세의 나이에 <벌거벗은 유년 시절>(1968)로 늦깎이 데뷔작을 내어 놓는데, 당대의 비평은 이 영화에 사회적 주제를 다룬 리얼리즘 영화라는 분류표를 붙인다. 하지만 데뷔작 이후 피알라가 작업을 거듭할수록, 그의 영화에서 리얼리즘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점점 까다로운 문제가 되어 간다.

 

<벌거벗은 유년 시절>에 대한 당대의 설명으로부터 피알라 자신에 의해, 그리고 평자들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수정되어 온 것은 사회적인 주제리얼리즘이라는 수식 둘 모두다. 이는 얼핏 부모에게 버림받고 위탁 가정을 전전하는 어린 소년 프랑수아의 이야기를 특별한 드라마 없이 관찰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에 어울리는 평가처럼도 보여서 두 개의 이름표가 어떤 지점에서 이 영화에 충분히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벌거벗은 유년시절>은 프랑수아가 저지르는 일련의 비행의 원인을 소년이 처한 사회적 환경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주제를 전면화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이 영화가 제 나이의 어린이답지 않은프랑수아의 행동을 통해 냉혹한 프랑스 사회가 어린 영혼을 어떻게 상처 입히는지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세태에 대한 비판을 덧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수아의 비행과 그의 불우한 환경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단단히 묶이지 못한다. 프랑수아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무리 안에서의 인정 욕구, 반항심, 힘에 대한 동경, 지루한 일상을 보내기 위한 계산되지 않은 거짓말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은 프랑수아와 같은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지 않은 이들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모리스 피알라의 입장은 그 자신의 말을 통해 구체적으로, 또 까다로운 방식으로 설명된다. 피알라에게 리얼리즘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드는 영화는 최초의 영화를 만들었다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이다. 피알라의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야말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촬영했다는 측면에서 리얼리즘 영화의 시초처럼 거론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피알라가 뤼미에르에게서 본 것은 평범한 순간을 포착했을 뿐인데 그것을 특별한 순간으로 변모시키는 영화의 본질적인 역량이다. 이 지점에서 피알라에게 뤼미에르는 멜리에스보다도 환상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피알라에게 영화적 리얼리즘이 갖는 또 다른 함의에 대한 추측은 장 루슈로 대변되는 시네마 베리테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시각에 대한 그의 거부와도 연결된다. 피알라가 현실에 대한 즉흥적 접근이 진실을 보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뤼미에르에 대한 그의 입장보다도 놀랍다. 왜냐하면 이를테면, <우리의 사랑>(1983)의 유명한 가족식사 장면이 촬영된 방식에서 피알라가 시도한 것과 시네마 베리테의 방법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에서 피알라는 그 자신이 아버지를 연기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가 가족의 식사자리에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그는 자신의 등장을 배우들 누구에게도 미리 알리지 않는다. 피알라의 등장을 전혀 모르고 있던 배우들이 보이는 놀라는 표정은 배우들 그 자신의 것이다. 만약 피알라가 얻고자 한 것이 배우들의 진짜 놀라는 표정이었다면 이 장면은 즉흥성으로부터 일말의 실제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장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진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캐릭터로부터 배우를 소환하여 배우가 가지고 있는 실제의 흔적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이 장면 연출에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있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미리 알 수 없던 아버지의 등장 이후에도 연기를 지속하도록 강제된 상황에 놓인 채 여전히 <우리의 사랑> 속에 주어진 배역 안에서 제한된 자유를 가지고 피알라라는 연출자이자 아버지와 싸워야 한다. 인물들을 제약하는 허구적 구성의 힘과 허구적 구성이 충분히 옭아매지 못하는 실제 간의 충돌이 일어날 때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피알라의 질문에 대한 배우의 대답이 실제 그 자신과 얼마나 관계되느냐가 아니라 장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불편함이라는 감정이 생성되고 그 힘이 작용하는 순간이다.

 

 

피알라가 감정의 사실적 재현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감정이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감정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다시 리얼리즘과 관련된 질문을 건드린다. 실제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문제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적으로 재현되기를 기다리는 실제라는 토대다. 만약 걷고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문제라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즉흥적 대답을 기록하는 문제(크리스 마르케, <아름다운 5>(1963))라면, 대답의 순간에 진실이 부재한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감정의 재현과 연결되면 문제는 보다 까다로워진다. 내밀한 감정은 한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비가시적인 사건이기에 그것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전형을 가질 수도 없다.

 

사적 감정에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 지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재현될 때 동원되는 관습적 표현들은 이 공통 지대로부터 가능해진다. 그런데 피알라의 영화에서, 이를테면 <룰루>(1980)에서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이자벨 위페르의 이야기를 만약 지독한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려 한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위페르의 결정에 대해 드파르디유와의 계급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이는 마치 <벌거벗은 유년 시절>의 프랑수아를 사회적 문제의 산물로 환원시키는 것과 비슷한 시각이다.

 

<룰루>는 위페르의 심리를 설득력 있게, 이를 달리 표현하면 위페르의 행동이 관객의 관념과 일치하는 사실적인 감정의 산물임을 드러내기 위한 인과적 상황들을 섬세하게 배치하지 않는다. <룰루>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선재하는 감정의 체계적 재현이 아니라 배우들의 시선과 육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내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감정의 덩어리들이다. 피알라는 그의 두 번째 작품 <우리는 함께 늙지 않는다>(1972)에서도 그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다루는 동안 자신이 경험했으므로 누구보다 적확하게 이해하고 있을 연인의 드라마를 감정의 연속을 기준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 피알라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때때로 저열하고 평범한 감정들이 점멸하는 순간들이다. 피알라가 육체적 충돌의 순간들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 고흐의 삶을 다루면서 정작 그가 완성한 작품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이상한 전기 영화 <반 고흐>(1991)의 오프닝이 보여주는 것은 캔버스 위에 붓이 만들어내는 물감 자국이다. 피알라에게 보다 실제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완성된 작품이나 완성된 작품이 구현하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 감추고 마는, 붓이 캔버스 위에 물감 자국을 만들어내는 임의의 우연한 순간으로부터 나온다.

 

 

피알라는 사랑보다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죽음 앞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는 <벌어진 입>(1974)에서 죽어가는 신체를 무자비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지만 죽음 앞에 선 인물들은 응당 기대되는 감정이나 행동의 자리에 쉽게 들어서지 못한다. 영화 초반부, 음악을 듣는 모자(母子)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서사에 필요한 감정의 표현을 위해 충분하다고 인식되는 시간을 훌쩍 초과해서 진행되는 쇼트 안에 놓인다. 음악의 재생이라는 음악의 가장 사실적인 재현 앞에서도 배우들은 드라마와 비()드라마적 순간을 오가며 자신이 표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것은 관객도 마찬가지다.

 

피알라의 이와 같은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졸업이 먼저>(1978)의 오프닝 장면이다. 낙서 자국으로 뒤덮인 나무 책상 표면 위로 철학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교사는 학생들(어쩌면 관객들)을 자리에 앉히고 말한다. “철학에서의 어려움은 여러분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문학을 포함해 많은 것들이 주입한 이미 만들어진 생각들을 가지고 여러분은 이 자리에 온다.” 이 철학 수업의 첫 번째 과제는 지금까지 들어온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피알라는 그의 유작 <르 가르슈>(1995)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등장시킨다. 재현의 틀 안에서 통제되지 않는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매 순간 영화는 아이의 자유로움이 만들어내는 즉흥적 상황의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다른 한편에는 <벌어진 입>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의 드파르디유가 있다.

 

 

피알라가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 영화가 가진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의 단순한 재인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오히려 영화에서 진정 보아야 할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피알라가 영화에는 평범한 것, 저열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할 때, 저 평범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일상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저 특별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 살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영화에서 본 것은 존재로부터 포착되는 순간적인 매혹이다. 피알라의 작품에는 영화의 마술적 힘에 매혹된 그의 분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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