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부대행사

부대행사

'포르투갈의 거장 3인전'<호스 머니>: 페드로 코스타 감독 2016-06-23(목)  - 시네마테크

페드로 코스타 01


6/23 <호스 머니>


 * 게스트: 페드로 코스타 감독

* 진 행: 임재철 영화평론가

* 통 역: 옥미나 영화평론가 



페드로 코스타 감독 02


(임재철) 페드로 코스타 감독은1959년생이고, 대학 때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본인 말로는 80년대 초에 리스본에 국립연극 및 영화 학교라는 게 처음 생겼는데 별 생각 없이 지원을 했다가 합격을 하게 돼서 거기 다니게 됐다고 말씀을 하세요. 3년 과정이었는데, 3년을 결국 다 마치지 못하고 1년 반 정도 다니다가 이리저리. 그리고 여러분들이 약간 영화사를 아시면 알 수도 있는 얘긴데 70년대나 80년대 초에 다른 나라 영환데 포르투갈에서 촬영을 했던 영화가 제법 있었어요. 여러분들 다 아실만한 영화가 빔 벤더스의 몇몇 영화들을 포르투갈에서 찍기도 하기도 했고요. 어쨌든 다른 나라 영환데 포르투갈에서 촬영하는 영화들의 스태프로 참여를 하게 돼요. 그런 일들을 좀 하면서, 그런데 본인은 그걸 할 때도 요새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아르바이트 같은 느낌으로 자기는 그냥 용돈벌이 내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했다고 얘기를 하십니다.


어쨌든 그런 걸 통해서 실제로 영화 현장에 좀 있었고, 그러다가 본인이 직접 영화를 만들게 된 건 89<>라는 영화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라는 영화하고, 그 다음 작품인 <> 두 편이 좀 다른데,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다음 작품들하고 약간 계열이 달라요. 계열이 다르다는 게 대단한 게 아니라 처음의 두 편의 영화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제대로 된 영화사에서 만든 제대로 된 영화예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는 상업영화라고 해도 좋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세 번째 영화인 <반다의 방>부터가 본인이 직접 기획부터 심지어 완성해서 나중에 상영까지 하게 된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상영작들이 <행진하는 청춘>이나 <호스 머니>나 이번에 상영하진 않습니다만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라는 다큐멘터리도 있죠, 그런 영화들을 죽 만들었고요


제가 한국에 제일 처음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영화를 소개를 한 건 생각을 해보니까 2001년 여름에 서울에서 포르투갈 영화 특집 상영을 했어요. 그때 어떤 식으로 했냐면, 사실 그때만 해도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이 워낙 대단한 감독이어서 그때 아마 열편인가를 상영했는데, 올리베이라 감독 영화 다섯 편에다가 다른 감독들 영화 한 편씩 이렇게 상영을 했습니다. 그때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를 상영을 했었죠. 그러고 나서 영화제를 하게 되면서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반다의 방>을 상영했고, 그때 제가 페드로 코스타 감독에게 와 달라고 해서 저도 그때 처음 코스타 감독을 만나게 됐습니다. 사실은 글쎄요. 지금도 얼마나 유명한 감독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유명하다는 것과 중요하다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요. 그 당시에 코스타 감독이 그렇게 아주 인지도가 있는 감독은 아니었는데, 저도 사실은 코스타 감독의 영화를 먼저 봤다기보다 글을 먼저 봤어요. 98, 99년도 즈음에 코스타 감독에 대해 쓴 글을 먼저 보고 흥미로운 감독일 것 같다고 생각해서 시사용 비디오를 먼저 받아서 보고 상영을 하기로 했던 건데요. 그것도 그게 벌써 한 16, 17년 전이니까 많이 바뀌었죠. 요새는 조금 관심이 가는 감독이 있을 때 영화를 찾아서 보는 걸 빨리, 쉽게 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아직 그런 시대가 아니어서 어쨌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한국에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영화를 소개할 수가 있었고요. 이 감독이 중요하다는 걸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쉽게 얘기 할 수 있을까. 아주 간결하게 얘기하자면 여러분들이 고다르 같은 감독을 떠올려서 고다르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영화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있는 건데, 그 현대영화의 흐름에 있어서 거의 끝자락에 있는 감독이 아닌가. 거의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역으로 얘기하면 끝이라는 건 새로운 것의 시원, 시발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는 감독이 아닐까. 물론 이건 굉장히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오셨으니까 본인한테 얘기를 많이 듣는 게 필요할 것 같고, 제가 이런 행사 내지는 여기에서 감독들과 얘기를 할 때 영화를 보시는 분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전제를 했으면 하는 부분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환경이나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측면이 있어요. 그런 측면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어쨌든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의 감독이라는 측면,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서는 도대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수용되는지 하는 영화와 관련된 환경들 같은 부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 부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감독님한테 직접 얘기를 듣도록 하죠.

<!--[if !supportEmptyParas]--> <!--[endif]-->

페드로 코스타 감독 03


(페드로 코스타) 안녕하세요. 제가 포르투갈어로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한국어로 말하면 좋을 텐데요. 영어로 말하는 건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거기다 미국 옷을 입는 것도 참 지겨운 일인데요. 모든 것이 미국 것이네요.굉장히 놀랍습니다. 여긴 정말 대단한 극장이네요. 제가 서울과 전주는 와 본 적이 있었지만 부산은 처음이고요. 영화의전당도 엄청나고, 시네마테크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주 와서 여기에 대해서 잘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포르투갈 특별전을 개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명의 거장과 그리고 저 말입니다.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아주 저예산 영화들인데요. 어쨌든 우리는 천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에서 많은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영화는 상업적이거나 제도적인 영화가 아니라 언제나 시적입니다. 포르투갈은 지금은 굉장히 작은 국가인데요. 예전엔 굉장히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포르투갈의 것이었죠. 우리는 사실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인도, 아시아 일부도 발견한 국가이고요. 그리고 우리가 만들었던 식민지에 가톨릭 같은 것들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잃었죠. 우리가 그것을 잃었던 이유는 잃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개발이나 아니면 세상의 다른 지역들을 탐험하는 데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작가, 시인인데요. 페소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걸 발견하고 정복한 이후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실업자가 되었다.” 우리는 할 일이 없어졌고요. 그래서 약간 시에도 관심이 생기고요.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기타도 치고 축구도 합니다. 그런데 축구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끔 영화도 만들죠. 이상한 영화를 만듭니다. 안토니우 레이스, 마르가리다 코르데이루,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같은 이런 감독들은 굉장히 중요한데요. 저한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90년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던 세대들에게 아주 중요한 감독입니다. 안토니우 레이스나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같은 경우는 이미 죽었는데요. 60대에 죽었습니다. 좀 빨리 죽었다고 생각되고요. 마르가리다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건 굉장히 크나큰 큰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들은 더 많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가 특히 애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요. 아시아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유럽 같은 경우는 중세 이후로 광대라는 역할이 있습니다. 권력자들을 풍자하고 비평하는 그런 역할이 있었는데,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던 감독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바로 그런 예술가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영화를 보시면 아주 위대한 예술작품이라는 사실도 깨달으실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재미도 찾으실 수 있을 것이고요. 포르투갈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시선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몬테이로의 삶의 마지막에 저는 운 좋게도 그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는데요. 작품 하나에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있어 달라고 참여해달라는 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 좋게도 두 달 동안 그의 작업에 참여하고, 그가 작업하는 걸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는데요. 그는 영화에서 연기도 많이 하는데, 그의 실제 삶은 영화에서처럼 정말, 정말 미친 것이었습니다. 제가 작업했던 영화에서 몬테이로 감독님이 작가이자 감독이자 제작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영화 중간에 스스로를 해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살고 있던 해변에 있는 방갈로를 찾아가서 그럼 이제 작업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는데요. 그랬더니 그는 "아니다, 난 아직도 제작자다, 내가 해고한 건 감독이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그가 얼마나 훌륭한 감독이었는지를 설득해야 했고요. 그는 그냥 피곤하고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냥 며칠 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상영되는지 모르겠는데요. 포스터에 나오는 이미지가 저 작품이니까 여기서 상영할 것 같네요. <바다의 꽃>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분이 그립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에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분이 없거든요.


안토니우 레이스는 저하고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인데요. 왜냐면 제가 그 분에게서 영화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진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인데요. 영화를 만들기 전에 시를 쓰기도 했고, 굉장히 유명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정말 진기한 감독 중 한 명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그 분은 정말 거의 농부, 농부 중에서도 시골의 하층 계급 출신인데요. 사실 영화감독들은 늘 도시 출신이거나 중산층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기 마련인데, 그는 좀 달랐습니다. 안토니우는 사실 농부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그가 사랑한 것은 단순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같은 종류의 이런 삶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요. 그가 사랑한 것은 동물, 시골, 나무, 공기, 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집중했던 것은 영화 만들기였는데요. 그가 집착했던 것은 원시 세계, 그리고 자연 세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 하고 있는 짓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걱정을 했어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전통, 고대 문화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세 작품뿐인데, 그가 작품을 만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 준비를 하고 연구하는 작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론 감독이지만 역사학자, 고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꾸준한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의 영화를 통해서 포르투갈 나라의 일부를 볼 수 있을 텐데요. 이 영화를 찍은 지 30년이 되긴 했지만, 장소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원시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까지 볼 수 있을 텐데요. 굉장히 낯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14세기 혹은 중세 같은 인상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감독들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언가를 지킨다는 건데요. 영원히 사라지게 될 어떤 것들, 귀중한 것들을 지키는 것, 그것들이 남아 있게 만드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비단 우리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최고의 모습,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의 영화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신다면 마치 원시 예술을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와 이미지들, 그리고 이미 사라진 시대에 관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고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도 안토니우 레이스에 대해서 굉장히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안토니우는 저의 영화학교 선생님이었는데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장인이라고 말해도 되고, 쿵푸 마스터라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선 같은 것들도 여러 가지 관심이 있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농작물을 재배하는 방법, 나무 조경하는 방법, 가죽 손질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예민하기도 했지만, 굉장히 인내심 있고 침착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영화학교에 갔을 땐 20대였는데요. 멍청했습니다. 제가 음악을 했습니다. 락 음악을 했는데요. 원래 이런 사람들이 좀 그렇습니다. 약간 무식하고, 전 학교에서 못됐고 짓궂은 종류의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 감독님은 "괜찮다, 좀 멍청하게 있는 것이 너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네가 꼭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물들, 주위 모든 것들에 대해서 대항하고 반항하는 그 자세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렇게 해라.' 하는 것과 절대로 타협하지 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는 정말 그런 종류의 선생님이었고요. 그야말로 제가 영화학교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였고, 제가 아직까지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제 다음 세대에도 해당이 될 텐데요. 우리나라 영화계에는 거대한 장인이 있습니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인데요. 다른 작가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만큼 훌륭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 선생님이 저에게 시작을 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 너도 해야 한다."라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이용하자고 말씀하시면서 "영화를 그냥 만들어라, 카메라만 있으면 된다, 돈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남자가 나무를 손질하고 들판에서 일하는 그런 모습들, 아주 어렵지만 단순하게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배운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고요.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는 30세에서 50세 정도의 모든 감독들은 안토니우의 학생 혹은 친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가르쳤던 것들을 단순히 말씀드리자면 영화를 만들 때 그 영화를 산업처럼, 시리즈처럼 만들지 말고 특별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제 직업이고 제가 추구하는 것이고 제가 속한 세계이고 제가 일원인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들은 어느 나라, 뭐 중국에도 있고 여러 군데 있지만 아주 작은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이죠. 그러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페드로 코스타 감독 04


(임재철) 원래 페드로 코스타 감독님이 질문을 하나 하면 대답을 굉장히 오래 합니다. 여러분들이 좀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 말씀하린 걸 제가 두 가지 정도만 요약을 해드릴게요. 포르투갈에서 제일 유명했던 감독, 지금까지도 제일 유명한 감독이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실제로 포르투갈 감독들을 비롯해서 젊은 감독들에게 그렇게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왜 그랬냐면 나이차도 엄청나게 나는데다가, 이건 페드로 코스타 본인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는데, 계급적으로도 올리베이라 감독은 그랑 부르주아예요. 굉장한 부잣집 아들입니다. 거기다 올리베이라 감독이 1908년생이에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요. 그래서 찬탄할 수는 있어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들은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는 더 아랫세대 사람들에게 자극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분들이 일단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또 한 측면은 특히 안토니우 레이스에 대해서는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전부터 저한테도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저도 사실은 안토니우 레이스 감독을 페드로 코스타 감독 때문에 알았어요. 그때까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됐는데, 실제로 개인적으로 레이스에게서 배웠다는 측면, 그리고 배웠다는 측면을 떠나서 가장 중요한 유산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게 "영화라는 걸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영화는 지금 네가 갖고 있는 리소스를 가지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게 영화다."라는 그런 마인드를 배웠다는 것. 코스타 감독이 방금 그런 이야기를 했죠. "너는 장인적인(artisanal)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때 장인적인 감독이라는 뜻은 영화업계에서 원하는, 영화업계에서 주어지는 과업을 굉장히 충실하게 수행하는 감독이라는 의미예요. 그런 장인적인 감독이 되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걸 가지고 너를 드러낼 수 있는 걸 하라. 사실 저와 개인적으로 얘기할 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뭘 배웠다는 게 이렇게 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런 굉장히 구체적인 그런 것보다도 일종의 state of mind.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라."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한 거고, 본인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영화감독이니까 아무래도 여기저기 전 세계적으로 특히 2006, 2007년을 경계로 코스타 감독이 지명도가 높아져서 Q&A를 많이 해요.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본인도 잘 기억도 못하는 세세한 걸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단 얘기를 합니다. 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포르투갈 영화에 전체적인 지형 같은 게 이런 게 있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자기는 안토니우 레이스라는 감독이자 선생에게서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니까 많은 걸 배웠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항상 지금 있는 걸 가지고 일을 해라."라는 것. 그건 무슨 얘기냐면 "장인적인 감독이 되지 말라." 장인적인 감독이란 건 사실 어느 나라에나 다 있어요. 그런 류의 감독이 되지 말고 어쨌든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걸 가지고 너를 표현할 수 있는 걸 하라는 걸 배웠다는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 전체적인 얘기는 약간 된 것 같고요. 더 들어가서 보자면,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측면이냐면 저는 기본적으로는 동의를 하면서도 사실은 아까 얘기했던 장인적인 감독이 하나도 없어도 문제예요. 아주 나쁘게 얘기한다면 전부 다 예술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골치인 것 아닙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선 우리하고 약간 생각이 다를 수도 있어요. 왜 제가 그런 걸 느끼느냐면 결국 포르투갈이란 나라에서는 애초에 영화를 만들어서 유명해질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돈을 번다거나 이런 건 상상하기가 힘든 시장 자체의 제약 같은 면이 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화가 돼서 어떤지 모르겠는데, 90년대 중반만 해도 포르투갈에서 극장에서 개봉을 하는 포르투갈 자국 영화가 열 편에서 열두 편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제일 잘 된 영화의 관객 동원 수가 이십 몇 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대략 그 정도예요. 그러니까 그런 규모에서는 영화를 굉장히 상업적으로 해서 그야말로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영화를 생각한다는 건 어렵다는 얘기죠. 어떻게 보면 그런 기본적인 시장의 제약 자체가 그런 식으로 "그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 바로 영화를 해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코스타 감독 본인도 사실은 그런 의식을 안 할 수도 있어요. 제가 밖에서 보는 입장에선, 그리고 다른 나라 영화들과 비교를 해 봤을 때 그런 측면이 좀 있고요. 어떻게 보면 포르투갈 같은 나라가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시적인 영화가 많다고 얘기하셨죠. 그리고 시적인 영화뿐만 아니라 나라의 규모에 비해서는 영화들이 상당히 보편적인 지향성이 되게 높아요. 그런 부분도 저는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그런 부분 관련해서 본인이 지금 어느 정도 영화를 만들고 경력이 꽤 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본인도 처음에는 보통의 영화들을 두 편 정도 경험을 하셨단 말이죠. 그 과정에서 배운 건 없었는지 질문해보고 싶네요.


페드로 코스타 감독


(페드로 코스타) 저는 제 목소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뭘 보여주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할지. 제가 첫 번째 영화를 만들 때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스태프들이 참여를 하고 장비도 많이 썼고요. 제작비는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조금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굉장히 빨리 작업을 했는데요. 보통은 굉장히 빠듯한 일정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좀 전에 아까 소개 말씀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 영화를 만들기 전에 약 십 여 년 동안 조감독으로 일을 했는데, 많은 작품들을 같이 했습니다. 포르투갈 영화, 프랑스 영화, 미국 영화,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진 각종 영화에서 저는 전문 조감독으로 일을 했습니다. 굉장히 바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가 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그랬습니다. 이것이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인가, 이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인가, 이런 것이 내가 평생 만들어야 하는 영화인가. 그래서 제 말은 조감독과 감독 다 속임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대항하는 대신에 "저 배우가 당신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 거예요. 내일은 더 좋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왜냐면 영화는 진짜 직진밖에 없고, 멈출 수 없는 기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작업이라는 건 사실 굉장히 깨지기 쉬운 작업인데요. 사람의 감정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늘 불안에 시달리고요. 그래서 저는 조감독으로서 감독이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부추겨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제가 조감독으로 있는 10년 동안 내내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작품 굉장히 좋다, 훌륭하다." 사실 그건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문제는 내 영화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그러나 긴장감이나 스트레스를 덜 받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안토니우가 말했던 장인(artisan)과 겹쳐지는데요. 예를 들면 집에 있는 세 가지의 사물만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는 식이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인데요. 시간은 우리 편이고 우리의 친구여야 하고 영화에서 아시는 대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적이 되어선 안 되고, 돈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좀 더 민주적으로 하는 것. 스태프들 그리고 팀, 그 모든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평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고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건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등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순진한, 순수한 사회주의처럼 들릴 수도 있겠죠. 여러분에게 말하기 그렇지만, 저는 영화가 싫거든요. 굉장히 멋지긴 하지만 전 영화가 싫습니다. 영화가 싫다고 말했던 이유는 돈도 너무 많이 들어가고 너무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지금의 이미지와 사운드, 길거리 광고와 사운드, 그 넘쳐나는 이미지들은 다 사기이고 판매를 위해서 이미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라는 것은 원래 판매용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똑같이 보여주는 것인데요. 원시시대 동굴의 그림을 생각해보시면 그들은 그것을 팔려고 그렸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감독으로 산다는 것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내가 믿는 것, 내가 만들고 싶은 것들과 보통 일반적인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이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없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아까 말씀드렸던 소규모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을 보실 때면, 기억해주실 것은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여러분들은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셔야 하는데, 우리가 하려는 것은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산업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보존하려는 것은 인간, 중요한 것들, 숭고한 것들이고, 그리고 아마 여러분들도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요즘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눈에서 뭐가 튀어 나오기도 하는데요.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엔터테인먼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액션 영화 좋죠. 고다르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브루스 윌리스를 보면 저도 좋은데, 그것 자체는 저한테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나쁜 음식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까 나쁜 음식이라고 비유했던 것들이 점점 더 커지기만 하고 모든 걸 차지하고 있다는 건데요. 문제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고 인플레이션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건데요. 더 많은 사운드, 더 많은 효과를 요구합니다. 안토니우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더 작은 것, 최소의 것들로도 잘 살 수 있다, 잘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루는 사람들은 매일 뭔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상실하는 사람들인데요. 그래서 전 그걸 단순하게 매치하려고 노력합니다. 저기 있는 카메라 같은 것, 저거 하나로 전 영화를 찍습니다. 더 이상 어떤 장비도 필요 없습니다. 집 세 개, 보트 세 개가 왜 필요한가요? 물론 전 보트는 없는데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건 바보 같은 짓이고 미친 짓입니다.




(임재철) 이야기하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코스타 감독이 본인이 영화를 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키워드가 될 만한 게 지금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보존한다는 것, 보존한다는 걸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다큐멘트할 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본인이 <반다의 방> 이래로, 아주 디테일한 것까진 아닙니다만, 예를 들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반다의 방>은 제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많이 쓰던 DV 카메라 중 파나소닉 DVX100라고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철거민촌 같은 데를 가서 촬영을 했는데, 본인이 촬영까지 다 했어요. 걸린 시간이 정확하게 2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2년 정도 걸려서 만들고, 그걸 편집을 해서 대략 어느 정도 쓸 만한 걸로 추려낸 게 제가 그때 듣기론 220시간짜리 분량이었다고 했어요. 220시간짜리 분량에서 그걸 본인이 다시 편집을 해서 3시간짜리 영화로 만든 겁니다. 그 다음의 영화들도 사실은 그런 작업상에 있어선 거의 비슷해요. 조금 더 빨라져서 그 다음 영화는 예를 들면 1년 반 정도 걸렸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영화들인데, 물론 장소도 있고요. 그 출발점에 있어서 장소라는 게 아까 이야기했던 리스본의 폰타이냐스라는 말하자면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우리로 치면 동남아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곧 재개발이 될 그런 동네라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하나 중요한 건 인물이라는 측면이 있어요


반다 두아르치라는 실제로 거기 살고 있는 이 인물이 재미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 인물이 살고 있는 데로 가서 놓고 ", 그럼 이제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하고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뭐가 나온 게 없습니다. 그냥 인물을 가지고,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물을 특정한 장소에 놓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을 한 영화들인데요. 그래서 저는 쭉 보면 저는 특히 인물에 있어서 아까 보존한다는 측면이 중요하다고 본인이 얘기했는데, 이걸 역으로 바꿔보면 한 개인에게 있어서 보존한다는 측면이 뭐냐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의 문제가 됩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사실은 반다도 그렇고 나중에 코스타 감독 영화에 주로 많이 등장하게 되는 벤투라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살아있는 그 인물이에요. 물론 저는 그런 부분이 재밌는 건데, 사실은 본인하곤 아무런 동질적인 요소, 조금이라도 공유가 될 만한 요소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을 특정한 장소에 놓고 영화를 만드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그 인물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 인물이 또 나한테 인풋을 가하는 게 있어요. 더 자세하게 물어보면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겠습니다만, 실제로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나 몸짓이나 이런 것들이 인물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풋을 한 결과 감독이 다시 그걸 영화에 집어넣은 그런 것들이 되게 많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한 인물, 그걸 한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기억이라는 문제가 있고, 기억이라는 문제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특히 오늘 여러분들이 방금 전에 보신 <호스 머니>라는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약간 그런 이야기를, ‘기억의 문제를 과연 영화 속에 어떻게 담는가 하는 그런 측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페드로 코스타 07


(임재철) 이야기하다보니까 어떻게 보면 코스타 감독이 본인이 영화를 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키워드가 될 만한 게 지금 말씀하신 걸로 봐서는 보존한다는 것, 보존한다는 걸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다큐멘트할 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본인이 <반다의 방> 이래로, 아주 디테일한 것까진 아닙니다만, 예를 들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반다의 방>은 제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많이 쓰던 DV 카메라 중 파나소닉 DVX100라고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철거민촌 같은 데를 가서 촬영을 했는데, 본인이 촬영까지 다 했어요. 걸린 시간이 정확하게 2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2년 정도 걸려서 만들고, 그걸 편집을 해서 대략 어느 정도 쓸 만한 걸로 추려낸 게 제가 그때 듣기론 220시간짜리 분량이었다고 했어요. 220시간짜리 분량에서 그걸 본인이 다시 편집을 해서 3시간짜리 영화로 만든 겁니다. 그 다음의 영화들도 사실은 그런 작업상에 있어선 거의 비슷해요. 조금 더 빨라져서 그 다음 영화는 예를 들면 1년 반 정도 걸렸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영화들인데, 물론 장소도 있고요. 그 출발점에 있어서 장소라는 게 아까 이야기했던 리스본의 폰타이냐스라는 말하자면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우리로 치면 동남아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곧 재개발이 될 그런 동네라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하나 중요한 건 인물이라는 측면이 있어요.


반다 두아르치라는 실제로 거기 살고 있는 이 인물이 재미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 인물이 살고 있는 데로 가서 놓고 ", 그럼 이제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하고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으로 뭐가 나온 게 없습니다. 그냥 인물을 가지고,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물을 특정한 장소에 놓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을 한 영화들인데요. 그래서 저는 쭉 보면 저는 특히 인물에 있어서 아까 보존한다는 측면이 중요하다고 본인이 얘기했는데, 이걸 역으로 바꿔보면 한 개인에게 있어서 보존한다는 측면이 뭐냐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의 문제가 됩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사실은 반다도 그렇고 나중에 코스타 감독 영화에 주로 많이 등장하게 되는 벤투라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살아있는 그 인물이에요. 물론 저는 그런 부분이 재밌는 건데, 사실은 본인하곤 아무런 동질적인 요소, 조금이라도 공유가 될 만한 요소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을 특정한 장소에 놓고 영화를 만드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그 인물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측면도 있지만 그 인물이 또 나한테 인풋을 가하는 게 있어요. 더 자세하게 물어보면 페드로 코스타 감독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겠습니다만, 실제로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나 몸짓이나 이런 것들이 인물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풋을 한 결과 감독이 다시 그걸 영화에 집어넣은 그런 것들이 되게 많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한 인물, 그걸 한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기억이라는 문제가 있고, 기억이라는 문제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특히 오늘 여러분들이 방금 전에 보신 <호스 머니>라는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약간 그런 이야기를, ‘기억의 문제를 과연 영화 속에 어떻게 담는가 하는 그런 측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페드로 코스타 감독 08


(페드로 코스타) 제가 작업하는 동안 시도했던 것들은 이런 작은 제작요소들을 훨씬 더 강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이긴 하지만 다른 것들도 합니다. 우리는 딱 하나만 하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다른 모든 작업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카메라 앞에 있는 사람들과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들 간의 균형이고, 그 균형이라는 걸 잘 맞추는 게 굉장히 중요했는데요.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작가, 대사를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앞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은 서로 도와주고 공동 작업을 하면서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와서 연기를 하고 끝나고 집에 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우리 세대, 감독 말고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엇인가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강해야 하고, 영화를 꼭 만들겠다는 신념이 필수적입니다. 강한 신념, 그리고 믿음 같은 것들을 불행하지만 제 자신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 안에 있는 걸 믿을 수도 없었고요. 저는 이 세상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아주 나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전 믿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믿을 수 있는 걸 잡아야 했는데요. 그것이 바로 벤투라처럼 제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신념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믿음, 그것이 바로 기억과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제 기억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제 기억은 아주 나쁘고 끔찍하기 때문인데요. 저는 진짜 지금의 삶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관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깨지기 쉬운 것들이고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영화 제작을 통해서 나는 어떤 것들을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직업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 장인(artisan)으로서 가장 흥미롭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그렇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면, 내가 가진 다른 직업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폭발이나 총 같은 것들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제 두 번째 직업이고요. 우리는 이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인간으로 살기 위한 노력 말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해야 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인데요. 찰리 채플린 같은 영화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거리가 있고 개가 있고 꽃을 파는 소녀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영화였다고 생각이 되고요. 우리의 작업은 이런 기억들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작업을 하는 것 자체는 우리 자신에게 이것들이 아직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행위의 연장선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저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전진하고 싶지 않고, 과거의 그 단순하고 기본적인 그 장면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폭력적인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지 그저 잔인하기만한 그런 폭력은 아니었습니다.


<호스 머니>에서는 벤투라와 작업을 했는데, 다른 작품에도 나왔던 배우고요. 이걸 보면서 조금 정리가 안 된다, 이상하다, 미친 것 같다 등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텐데요. 이것은 기억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인데요. 예전에 몸이 안 좋을 때, 피곤할 때 인부들이 추락하고 죽는 그런 사고들이 발생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는 질병,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의 문제라고 합니다. 기억에 관련된 문제이고, 커뮤니티에 대한 감각인데요. 지금의 개인들은 다들 커뮤니티라는 것에서 분리돼 있고, 분절되어 있고 그냥 일부분으로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제가 말하자면 오늘날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너무 슬프거나 부정적이지 않나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영화를 통해서 저희는 정신과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고대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공개적으로 우리의 공포를 표현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패러독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이건 슬프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영화를 만들었고, 그래서 영화가 존재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