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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인문학의 동행 세 번째 <프랑코포니아>: 김재환 큐레이터 2016-06-17(금)  - 소극장


6/17 영화와 인문학의 동행 세번째



6/20 '영화와 인문학의 동행' <프랑코 포니아>


파국적 상황에서의 미술관


* 강 연: 김재환 큐레이터

* 장 소: 영화의전당 소극장

 


캐비닛


영화에서 독일 나치를 비판하는 것인가, 아니면 프랑스를 비판하는 것인가 살짝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감독은 러시아 사람이죠. 처음 나왔던 러시아의 방주라고 하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는 작품들은 많이 빼돌리고 숨기기도 했지만 훼손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소장품이 현재 300만 점입니다. 루브르는 얼마큼 소장하고 있을까요. 38만 점이 있습니다. 러시아 에르미타주, 프랑스 루브르, 영국의 대영박물관. 이 세 개가 가장 큰 박물관이 되는 거죠. 프랑스의 경우 정복 과정 속에서 많은 것들을 수집하려고 애를 쓴 거죠. 과거에 미술관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개념은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고대 그리스 시대에 뮤즈의 제사장을 지내는 곳으로 뮤지엄이 있었던 것이고요, 자기들 주변에 있는 철학자의 조각상, 진귀한 동물이나 예술품을 살짝살짝 모으는 작은 컬렉션 수준으로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쓸 수 있는 단어가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서 캐비닛, 갤러리 두 종류밖에 없었는데, 과거에 작품이 큰 것들이 별로 없어서 캐비닛에 넣어서 닫아두고 보관한 것이죠. 여기서 유명해진 것이 제단화 중에서 삼면화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양쪽 날개가 생겨서 삼면화가 되는 것이죠. 닫으면 안 보이고, 제단화도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 닫고 여는 것을 없애고 삼면화 형식만 제단화 한 것들도 등장하기 시작하죠. 갤러리라는 이름이 붙어서 만들어진 것은 이런 것들이 처음이라는 거죠. 한국에서는 작품을 판매하는 화랑을 가리켜 갤러리라고 부릅니다. 미술관에서는 전시하는 공간은 전 세계적으로 갤러리라는 통념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미술관과 갤러리를 구분하는 의미로 뮤지엄홀또는 엑스비션홀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콩글리쉬죠. 요즘은 어딜 가도 갤러리 1, 2로 전시장에 표기가 되어있습니다.

 

루브르 갤러리

 

루브르라는 공간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지금은 하루에 15천 명이 방문하는 대중화되어있는 공간이 1789년 이전에는 일반인들 출입이 전혀 안 되는 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궁전이었고, 왕과 귀족만 출입이 가능했고, 그 사람들끼리만 모아놓은 소장품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가끔 유럽의 명화들 중에 보면 이쁜 여성의 누드들이 벽에 걸려있습니다. 100호 단위로 나와 있는데요, 보통 130cm*160cm 정도 됩니다. 이게 어떻게 나오게 되었냐면, 귀족들이 왕정이나 궁전 또는 사랑방 같은 내실에 걸어두기에 가장 적당한 사이즈였습니다. 그래서 100호가 표준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쓰는 누드들이 사실은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님들 불러다가 볼 수 있는 이미지였습니다. 주로 부인이 아닌 둘째 부인 또는 애인의 그림을 걸어놓고 친구에게 자랑하는 그런 분위기이었던 겁니다. 중세 시대를 빼고 르네상스 이후부터 미술은 귀족들의 문화였습니다. 수많은 초상화가 있다고 감독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수많은 초상화의 주인은 유럽의 귀족들이었습니다. 귀족들의 본인의 얼굴이었고. 왜 유럽에 그렇게 많은 초상화들이 있었는가 하면 귀족들이 자기들의 권위나 권한들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것을 들어낼 수 있는 부의 수단이었기 때문인 거죠. 다른 곳보다 유럽이 지역별 봉건영주 제도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본인 성에 본인 초상화는 무조건 걸어두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1780년 이후로 나올 텐데 사람이 많습니다. 많아졌어요. 1789년 이후에 루브르 공간에 그림들은 원래 있었고, 귀족들이나 연구자들이 와서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일반인들에게 일주일에 몇 번 공개하기 시작합니다. 혁명의 여파죠. 공화국이 생기는 과정 속에서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미술관이 처음으로 공공의 장소로 등장하는 것이 이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미술관이 공공의 장소로 바뀌는 순간부터 미술관의 유물이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미술관의 역할은 사실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겁니다. 루브르 궁이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미술관사, 즉 미술관의 역사를 다루는 곳에서는 근대화된 것 시민의 권리가 보장된 것이라고 이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가 위신, 권력, 업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미술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같은 상황으로 다른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프랑코 포니아>에서는 후자가 핵심이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나치조사

 

러시아 같은 경우는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열등한 민족이었던 겁니다. 혁명 자체도 어떻게 보면 전체주의 국가로서 맞지만 그 민족 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을 하는 순간 점령하고 없애야 하는 것이 되었죠. 문화재는 중요하지 않았고 다 파괴하는 형식으로 갔고요. 동부가 아닌 서부나 남부 쪽에 존재하는 것들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관찰하고 사진 찍고, 확인해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겁니다. 다 만들어서 필요한 것만 쏙쏙 가져가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것도 있습니다. 현대미술 쪽에 관심 있는 분들은 들어보셨을 텐데 퇴폐미술전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영화의 배경은 19402차 세계대전 당시이죠. 1934년쯤부터 독일의 나치군이 독일 내부에 있는 안 좋은 그림들을 폐기시켜나갑니다. 그리고 더불어 독일 내부에 있는 유럽 전역에 있었던 유명한 그림들을 다 같이 폐기를 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이유로?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나치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우월한 인종이 우월한 국가를 만들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겁니다. 생각을 조금 바꾸면 나치즘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열성인자를 없애고 우성인자가 향상된 인류를 만들어낸다는데 동의하는 사람이 나치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성인자를 제거하는 과정이 유대인 학살이었던 것이죠. 독일인 스스로는 게르만족으로서 우월한 민족이라고 히틀러가 이야기를 하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죠. 나치즘은 사실 히틀러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전 국민이 같이 움직인 행위라고 봐야 하는 것이죠.

퇴폐미술

 

그 과정에서 퇴폐 미술이라고 해서 작품을 모아 불태워 없애고 팔아치우는 일을 했는데, 왜 이런 일을 했는가 하면 사실은 여기서 훼손된 것이 더 많습니다. 폭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손이 되었지만 확인이 된 후에는 대부분 보존을 합니다. 하지만 퇴폐 미술에 해당하는 것들은 찾아서 태워버립니다. 퇴폐라는 단어가 열성적인 것 저급한 것 이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종적으로 낮은 것이라는 의미도 같이 있습니다.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예술 차별을 한 것이죠. 예술의 영역에서 열성인 것들을 다 찾아 없애겠다는 것이 퇴폐 미술을 찾아 없애는 행위였고요. 거기에서 가장 많이 당한 것이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밀 놀데 등 1920년대 독일에서 활동한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피카소, 몬드리아의 그림도 페기처분 대상이었습니다. 퇴폐미술전을 해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퇴폐미술전을 거쳐서 많은 작품이 모입니다. 2만 점의 작품을 나치가 모읍니다. 그중에서 6천 점을 선정하고, 6천 점 중에서 6백 점을 선정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퇴폐미술전을 엽니다. 작품을 바꿔가면서 계속 엽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2백만 명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선전은 이것이었죠. 이런 열성의 작품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재미있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시가 만들어 진 것도 주요한 것이었고, 그 전시를 통해서 오히려 당시에 유명하지 않았던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스타가 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퇴폐미술전을 하면서 독일은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퇴폐라고 했지만 독일 내부에서 당대 유명한 작품들이 다 있었거든요. 다 모아서 팔아보려고 했지만 전시상황이어서 생각보다 안 팔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것들을 안 팔리면 명분상 태워야 하잖아요. 하지만 아까우니 나치의 간부들이 그림을 빼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림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대부분 미국으로 넘어갑니다. 1940년 이후에 미국이 뉴욕을 중심으로 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강자로 부각을 합니다. 그 이유 중에 망명한 작가들도 많았기도 했고,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의 잭슨 폴록 같은 사람을 스타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유럽에 있던 수많은 작품들이 아주 싼값에 대거 들어오게 된 것이죠. 좋은 물건이 많으면 뜨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뉴욕이 미술에서 힘을 가지게기 시작하게 되는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 독일은 1944년 이후로 넘어가면서 패망을 하게 되고, 마지막에 연합군에 의해 폭격을 당하게 됩니다. 폭격 받는 것을 아니까 본인들도 나중에 보존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들을 박물관에서 소금 갱도 같은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아주 안전한 곳을 찾아 옮기고 숨깁니다. 나중에 연합군이 다 찾아냅니다. 다시 분류해서 남길 것과 돌려줄 것을 구분합니다. 국가별로 작가를 찾아 돌려주는데, 주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림들을 각 국가의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그림들은 사적 소유자의 개념이 없습니다. 전쟁을 통해서는 훼손, 파괴된 것도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미술품이나 유물이 돌아다닌 것만 놓고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흥이 날 수가 없는 장면들이 많잖아요. 특히 러시아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장면들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해보았자 의미가 없는 거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서양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더 이상의 비극은 없다. 인문학적 반성은 있을 수 없다.” 이런 말을 씁니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인류가 기계문명을 발달시켜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 기계문명이 결국은 어마한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사람을 죽이게 된 결과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죠. 그 반성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