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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의 시네필로' <미안해요, 리키> 특별강연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2019-12-19(목)  - 소극장
영화의전당 12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미안해요,리키 , 2019.12.19.(목)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12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미안해요, 리키>

공유경제와 제로 아워계약의 두 얼굴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는 기그(Gig) 경제 체제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가족을 그린 영화다. ‘기그 경제는 우버 택시와 같이 기업과 노동자가 고용 계약이 아닌 서비스 제공 계약 형태를 맺고 일하는 것을 말한다. ‘제로 아워계약은 기그 경제의 한 갈래로 고용인이 필요할 때(오직 그 때에 한해서) 근로를 요청하는 형태를 말한다. 현재 영국은 제로 아워 계약을 포함해 110만 명 남짓한 인구가 기그 경제에 종사한다.

  미국 컨설팅업체인 맥킨지2015년 보고서는 기그 경제를 장밋빛으로 그린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만일할 수 있는 근로시간의 유연성이 전업주부나 은퇴자들의 노동시장 재진입 기회를 주고, 기존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의 실제 노동 시간도 늘려 소득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기그 경제에는 분명 빛과 그림자가 있다. 영화는 그 그림자를 담아내며, 영국 사회가 기그 경제의 허상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켄 로치 감독은 이처럼 지금 시대민중이 마주한 문제를 잡아내고, 관객들에게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는 작업에 뛰어나다. 이 점에서 감독은 한결같다. 1960년대 BBC TV영화로 출발한 감독은 각 시기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현안을 분석하고,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려 애썼다. 감독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 민중의 친구는 누구인가?’ 민중의 관점에서, 민중을 위한 정책을 고민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감독의 영화는 시각 예술성이나 미장센보다 정치적 메시지에 더 비중을 둔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은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더 선명해지고, 인물 성격이 스테레오타입이란 느낌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주인공 성격이 다소 과장스럽거나, 서사 전개가 감성적 멜로드라마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정치적 메시지 전달을 중심에 두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감독의 정치 성향

 

  감독은 1936년 잉글랜드 너니톤(Nuneaton)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안 배경 때문에 감독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관점을 지녔을 걸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감독의 아버지도, 감독 본인도 전형적인 토리’(보수당의 별명) 지지자였다. 감독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유서 깊은 에드워드 6세 그래머스쿨을 다녔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진학했다. 감독이 정치적 관점을 바꾼 건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감독은 1960년대부터 SLL(사회주의 노동동맹)을 비롯해 레프 트로츠키’(1879~1940)의 급진 사상을 표방하는 정치 집단에서 활동했다. 반면 노동당과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다. 1990년대 노동당이 사회주의 노선을 폐기한 뒤로는 지지를 철회했고, 2015년 제러미 코빈이 대표로 선출되자 비판적 지지로 돌아섰다. 감독은 <제러미 코빈과의 대화>(In Conversation with Jeremy Corbyn, 2016)란 다큐를 만들었고, 지난 12월 총선에는 <미안해요, 리키>의 출연진들과 노동당 홍보 영상을 제작했다.

  이 같은 입장은 트로츠키주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는 노동자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와 영구혁명(Permanent revolution) 개념으로 대표된다. 영구혁명은 국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머물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국외적으로는 자국의 혁명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적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한편,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거리를 두는 이유다. 스탈린의 비민주적인 관료독재는 노동자 민주주의 개념에 어긋나고, 사회민주주의의 타협적이고 절충적인 노선과 점진적 개량주의는 영구혁명 개념에 어긋난다. 이처럼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은 감독의 영화에 빈번하고 지속적으로 반영된다. <토지와 자유>(Land and Freedom, 1995)가 대표적이다.

  영화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포움’(POUM) 집단에서 활동하는데, 포움은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농민들의 자생적 집단이다. 이들은 공화국을 지키려고 프랑코 반란군에 맞서 싸우지만, 결국엔 프랑코 반란군이 아닌 공화국 측의 스페인공산당에 의해 무장해제 된다. 당시 스페인공산당은 소련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들에 의해 파멸을 맞은 셈이다.

 

근본주의적 관점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 그림 <180853>을 떠올리게 하는 결말부에서 공산당 군대에 포위된 포움의 인물이 지금까지 우리는 헛것을 위해 싸웠다고 절규하는 모습은 감독의 생각을 대변한다. 진짜 민중의 친구는 누구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체제 안정을 위해 민중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희생시키는 체제는 민중의 친구가 아니다. 감독이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다.

  영화는 스탈린주의의 비민주적인 관료주의와 독재 체제에 대비해서 농민들의 토론 장면을 12분 동안 자세하게 묘사한다. 실제 카탈루냐 지역 주민들이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모습을 촬영해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완성됐다. 이 장면은 매우 트로츠키적이다. <,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관료주의와 형식적 복지체제에 대한 비판, <미안해요, 리키>에서 가족 간의 격렬한 토론도 이 관점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도 비슷한 맥락이다. 1921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조약은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아일랜드를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영화는 한 선량한 형제가 조약의 찬/반을 둘러싸고 갈등하는 모습을 처절하게 그린다. 동생은 타협적인 개량주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꿈꾼다.

  동생이 아일랜드의 사회주의자인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내일 당장 영국군을 몰아내고더블린 성에 녹색깃발을 꽂아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우리 노력은 모두 헛될 뿐이며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개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1960년대 TV영화에서부터 <미안해요, 리키>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트로츠키주의로 요약되는, 또는 반스탈린주의와 반사회민주주의로 압축되는 근본주의적정치사상으로 일관된다. 이와 함께 감독의 영화 스타일에도 일관성이 있다. 무엇보다 자연주의적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자연주의 스타일

 

  감독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 <자전거 도둑>(1948)을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는 사실은 감독의 스타일을 짐작하게 해준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양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스튜디오 외부에서 16mm 카메라로 진행되는 야외 촬영을 영화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인공조명보다 자연광을 선호하며, 디지털보다 필름 카메라를 원칙으로 생각한다(실제 감독의 장편 27편은 모두 필름으로 제작됐다). 한 마디로 자연주의라고 할까.

  인물 배역도 촬영 지역에 기반 한 직업적 배우와 지역 주민을 배합한다. <, 다니엘 블레이크>의 데이브 존스는 뉴캐슬 지역에서 오랫동안 스텐딩 코미디를 진행한 코미디언이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키 역을 맡은 크리스 히천은 영화 인물 설정과 마찬가지로 맨체스터 출신 배우이며, 생계 수단으로 건설 현장 일용직과 배관수리를 연기 활동과 병행했다.

애비 역을 맡은 데비 하니우드는 지역주민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습보조원으로 일했다. 애비가 남편과 아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에서 학교 업무의 경험을 잘 살린 것으로 보인다. 세브 역을 맡은 라이스 스톤 또한 뉴캐슬 청년이다. 지역 예술위원회의 청소년 작가 양성 프로그램인 뉴라이팅 노스에서 디지털 게임과 연관된 창작 훈련을 받고 있다. 세브가 톡톡 튀는 대사를 내뱉고, 그래피티와 같은 서브 컬처에 몰입하는 모습과 잘 어울린다.

  감독은 캐스팅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장시간 인터뷰로 배우의 생각과 즉흥적 감수성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사귐을 유도한다. 이 과정을 중시하는 것은 촬영 방식과 연관이 있다. 감독은 출연진에게 전체 시나리오를 주지 않고, 촬영 진행에 맞춰 대본을 준다. 배우의 역할 몰입과 출연진들 간의 유대, 그리고 즉흥성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영화 속 식사 장면에서 소년이 아닌 남자전용 카레를 먹던 리키가 힘들어 하고(“, 진짜 맵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 모습(“남자와 소년이 갈렸네.”)은 즉흥적인 것이다. 그런 만큼 자연스럽다.

  또 감독은 시퀀스 순서대로 촬영한다. 그래야 배우들의 몰입감이 높아지고,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엔딩 부분에서 온 가족이 리키의 차를 막고 실랑이하는 장면은 실제 가족 같은 유대를 느끼게 하는데, 이 유대감은 시퀀스 순서대로 촬영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각본에 대해서는 1990년대 말부터 짐 앨런에 이어 폴 라버티가 각본을 맡은 뒤로 서사가 섬세해진 느낌을 준다. 일상적 삶의 정치학이 중심 주제가 되며, ‘작은 사건들이 중요해진 것 같다. 반면 멜로드라마 성격이 짙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선량한 민중과 악당의 이분법도 뚜렷해지고, 감성적 결말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관객의 평가가 엇갈릴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감독이 각 시기별 의제를 선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안해요, 리키>도 기그 경제의 그림자를 선구적으로 영화화했다. 시민들의 상당수가 기그 경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 감독은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날 선 비판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것은 단지 감독이 민중의 삶 속에 밀착해있고, 민중의 삶을 고민한다는 도덕적 태도의 산물일 뿐 아니라, 동시대 사회의 의제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뉴캐슬이란 도시

 

  이 관점에서 <미안해요, 리키>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자. 영화는 <,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뉴캐슬을 무대로 하는데, 이 장소 선택은 뜻 깊다. 뉴캐슬은 산업혁명의 심장이었다. ‘석탄의 수도로 불리던 이 도시는 산업혁명의 에너지원과 산업단지가 결합한 곳으로 조선 산업과 중공업의 중심지였다. 증기 기관차와 전구 가로등이 이곳에서 개발됐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증기기관은 1차 산업혁명을 대표하고, 전구는 2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니까 말이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이 도시는 구시대 산업의 상징이다. 애비와 로지가 ‘1984년 광산 파업사진을 보는 장면이 있다. 마거릿 대처 총리는 만성적자였던 20개 탄광을 폐쇄하고 2만 명의 광부를 감원하며, 산업구조를 바꾸려 했다. 광부 노조는 이에 맞서 총파업을 벌인다. <빌리 엘리어트>가 그린 것처럼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파업으로 전국을 1년 동안 뜨겁게 달군 이 파업의 중심지 또한 뉴캐슬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산업 변화는 끝내 이 지역을 시들게 만든다. 그 결과로 과거 산업의 유적지처럼 돼버린 뉴캐슬에서 4차 산업혁명과 연관된 기그 경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반면 기그 경제를 비판하고 제동을 걸려는 관점에선 역설적으로 가장 적절한 곳이 아닐까. 더구나 이 도시는 제로 아워 계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화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축구팀 셔츠를 입은 고객이 리키와 입씨름하는 장면이 있다(“지역 팀 응원 해야죠”). 뉴캐슬 유나이티드 구단주는 마이크 애슐리인데, 영국 최대 스포츠용품 업체인 스포츠 다이렉트회장이다. 스포츠 다이렉트는 제로 아워 계약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한때 전체 직원 23천 명 가운데 2만 명 이상이 제로 아워 계약을 맺었다.

제로 아워 계약은 말 그대로 최저 노동시간을 보장하지 않아서 피고용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을 지불하므로, 일감이 없어 일을 못하면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더구나 스포츠 다이렉트는 직원들에게 갖가지 경고 조항을 제시하고, 한 직원이 6개월 안에 6회 경고를 받으면 해고한다. 경고 사유 가운데는 근무 중 너무 오래 화장실에 가있는 경우와 같이 과도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파업에 참여해도 해고된다.

  이런 근무 환경 탓에 직원의 자녀들은 몸이 아파도 학교에 나온다고 이 지역 초등학교 교사들은 말한다. 아이가 아파도 부모가 해고될까 두려워 휴가를 신청할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201512<가디언>의 탐사보도로 밝혀진 이 내용은 영국을 놀라게 했다. 그 뒤로 애슐리 회장은 근무 환경 개선을 약속했다지만 노동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높은 것 같다.

 

2018년 우버 재판과 택배기사의 죽음

 

  또 다른 영화의 배경으로 우버 재판을 들 수 있다. 2016 영국 고용심판소는 우버 택시 운전사 두 명의 초과근무(휴일)수당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우버의 성격 논쟁을 촉발했다. 영화 도입부 매니저의 말처럼 우버 운전사 각각이 개인 사업자라면 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이들이 고용 기사라면 당연히 초과수당을 줘야 한다. 이에 대해 우버는 자신들이 택시 서비스가 아닌 앱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고, 직원을 고용하는 기업이 아니라 정보를 중개하는 정보센터청산소’(clearing house)라고 주장했다.

  몇 해 전 미국 법원은 우버의 청산소 주장에 손을 들어줬지만, 201812월 영국 고용심판소는 우버를 기업으로 규정했다. 영화 결말부 애비의 말처럼 우버가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리키가] 자영업자라고요? 6, 하루 14시간씩 당신을 위해서 일해요. 당신 밑에서요. 그게 무슨 자영업이에요. 회사가 사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예요?”

 

  하지만 논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우버의 성격 논쟁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영화 서사와 인물 설정에 크게 영향을 준 사건이 있다. 201814일 택배기사 돈 레인(Don Lane)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사망할 당시 나이는 53세였고, 유럽 최대 배송업체 가운데 하나인 DPD의 택배 기사로 19년 째 일하고 있었다.

  그는 당뇨병을 앓았지만, 병원 진료를 받는 날 배송 업무를 할 수 없어 벌금 150 파운드를 내야 했다. 그 뒤로 진료 약속을 번번이 어기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배달 업무의 폭주에 시달리다 쓰러져 사망했다. 영화 라스트신에서 리키가 아픈 몸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돈 레인이 일하던 회사 DPD는 리키가 일하는 회사 PDF에 상응한다. 실제 DPD 관리자는 돈 레인이 대체 기사를 구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 불행한 사건이 어디까지나 택배 기사 본인의 과실 때문이라고 말했다. 리키가 휴가를 요청하자 매니저가 대체 기사를 구하라고 말하는 대목에 상응한다.

 

기그 노동과 가족의 삶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영화는 기그 경제에 종사하는 엄마와 아빠의 노동 형태가 그들 자신과 가족에게 주는 영향을 살핀다. 영화는 노동 유연성의 극한점에 서있는 리키가 점점 가족 관계에서 유연성을 잃고, 아빠로서 위상이 추락하는 모습을 그린다. 리키의 독선에 화난 세브가 집을 나가자 리키는 자전거를 타고 아들을 찾아 나선다. 카메라는 골목길에 늘어선 쓰레기통을 클로즈업한다. ‘가정 폐기물 전용’(Domestic Waste Only). 어느새 리키는 가정 폐기물(쓰레기)’ 신세가 된 것이다.

  엄마 아빠의 노동 형태와 함께 아들과 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서사의 긴장을 증폭시킨다. 아빠와 대비해서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확보하려 애쓰고, 아이들은 원래 가족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어린 딸이 뜻밖의 행동을 한 것은 가족을 원래대로되돌리고 싶어서였다. 라스트 신에서 아들은 아빠의 출근을 막아서며 호소한다. “예전의 아빠로 돌아와. 모든 게 돌아가면 좋겠어. 더 바라는 거 없어.”

  리키가 세브의 진로를 놓고 언쟁하는 장면에서 세브는 감독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브는 아빠의 자발적 노예화에 반대했다.

 

리키 : 그런 거지같은 일만 하다 보면 결국 종놈(skivvy 하녀)이 돼.

세브 : 아빠가 선택한 거잖아. 주어진 게 아니라, 아빠가 스스로 된 거야.

 

  영화 원제인 ‘Sorry, We Missed You’는 배송 기사와 고객의 시간 약속이 어긋난 상황을 가리키는 문구다. 영화는 이 문구를 역설적으로 활용하며, 기그 경제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그 경제는 고객의 시간과 더불어 (택배 기사의 움직임을 추적·기록하는) 기계의 시간을 절대시하지만, 기그 경제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 가족, 이웃,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놓치고 살아간다.

  리키 가족은 기그 경제 때문에 해체 위기에 몰린 가족 공동체를 지키려고 분투한다, 리키 가족은, 아니 우리는 과연 기그 경제 체제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까. 감독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그리고 라스트 신은 이들의 갈등이 가족 때문에 증폭됐지만, 이들의 희망 또한 가족에게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가 단지 비극으로 끝난다기보다 가족의 화해를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을 암시한다고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이 벼려 만든 수갑

 

  감독은 영화 각본을 책으로 펴냈다. 책 후기에서 감독은 이 체제는 지속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하루 14시간 혹사하는 배달기사를 통해 쇼핑하는 이 체제는 지속 가능한가? 이 체제는 과연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점원과 대화하는 것보다 나은 시스템인가?” 또 각본을 쓴 폴 라버티와 감독은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귀를 언급한다. ‘마음이 벼려 만든 수갑’(the mind-forg’d manacles).

  이것은 한 마디로 자발적 노예화를 의미한다. 세브의 말처럼 기그 경제 체제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수갑이고, 족쇄란 이야기다. 물론 이 말은 기그 경제 노동자를 비난한다기보다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결단하기만 하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그 결단은 기그 경제의 본질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감독의 관점에서 기그 경제는 오래된 착취방식을 신기술로 포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그 경제가 겉으로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 개념을 내걸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공유란 말이 무색하다. 진짜 공유경제라면 각자가 쓰지 않는 자원을 나눠 쓰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기에 비중을 두며, 플랫폼 기업이 가치를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영화가 그린 것처럼 현재 기그 경제 노동자들 대부분이 낮은 수입, 불안정한 노동, 열악한 사회보장을 겪는 반면 플랫폼 기업은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1812월부터 영국이 노동현장 개혁법을 시행한 이유일 것이다. 영국 정부는 플랫폼 기반 노동이 회사와 노동자 모두에게 융통성을 제공한다고 전제하면서도, 현재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짚었다. 이 개혁법은 정규직과 고용 중개업체 노동자 간의 임금차별을 금지하고, 회사가 노동자를 고용할 때 노동자의 권리를 고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한편, 현행 플랫폼 기업의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트레버 숄츠 교수가 제안하는 플랫폼 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디지털 플랫폼 기술을 활용하되 조합원이 공동 소유·관리하는 형태다). 숄츠 교수는 플랫폼 기업들이 제공하는 편의를 소비자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말자고 제의한다. 달리 말해 노동자의 시선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자는 이야기다.

 

감독의 생각

 

  이런 관점은 분명 감독의 문제의식과 겹친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감독은 트로츠키주의자이고 독실한 사회주의자이며 계획경제와 (국영화된) 공공서비스를 신봉한다. 감독이 기그 경제를 개선하려는 사민주의는 실패하리라 단언하는 이유다. 이 점에서 감독은 영국 정부의 노동현장 개혁법이나 플랫폼 협동조합을 근본적인 대안으로 여기진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안해요, 리키>는 기그 경제에 관한 핵심적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기그 경제의 대안에 관해서는 의견이 저마다 갈릴 수 있겠지만, 영화가 논의의 디딤돌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는 말이다. ‘마음이 벼려 만든 수갑의 역설적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니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문장이 떠오른다.

 

  “어떨 때는 변화의 속도가 변화의 방향 그 자체만큼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변화의 방향은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가 자주 있지만, 그러한 변화에 어느 정도 속도를 허용할지는 우리의 뜻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1944) 3(밑줄은 인용자)

 

  우리가 기그 경제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다 해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의 여유를 두면 좋겠다. 폭넓게 대안을 고민하고, 그 대안이 성장할 수 있게 허용해주는 시간적 여유. 물론 근본주의자인 감독은 성이 안 찰 수 있겠지만 말이다.